1.
얼마 전 외삼촌에게서 반가운 전화 한 통이 왔다. 친구분의 전원주택에 놀러 가셨다가 1969년도 대덕초등학교 졸업앨범 속에서 젊은 날의 부모님 사진을 찾으셨다는 소식이었다. 요즘 은퇴 후 자신만의 회고록을 쓰며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기록 중이라는 외삼촌은 누나에 대한 추억을 채우기 위해 내게 여러 질문을 던지셨고, 나 역시 아는 만큼 정성껏 답해드렸다.
사진 속 엄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빠의 ‘지극한 예우?’다. 생전의 아버지는 술은 못 하셔도 담배는 피우셨는데, 성격 대단하셨던 엄마 때문에 집 안에서는 구경도 못 하셨다. 담배를 집 안으로 들고 오지도 못해 집 앞 우편함에 몰래 숨겨두셨다가, 나갈 때 피우고 들어오기 전엔 옷을 털고 양치질까지 하며 무던히도 엄마의 마음을 살피셨다. 그러던 아버지는 내가 군대 갈 때 "네가 군대에서 고생하는 만큼 나도 담배를 안 피울 테니 너도 무사히 군 생활을 해라"며 결단하셨고, 그 뒤로 정말 담배를 끊으셨다. 자식을 향한 마음도 깊었지만, 사실은 엄마의 오랜 감시와 권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원래 4년제 약대에 가고 싶어 했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여자가 무슨 공부를 4년씩이나 하냐"는 집안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2년 제인 안동교대에 가야 했던 아쉬움을 평생 푸념으로 달래셨다.
교대 동창생들의 삶과 비교해도 가난한 집안에 별로 능력도 없는, 그저 성실하기만 한 아빠와 결혼해 셋방살이하며 시시하게 사는 현실이 고단하다고 늘 푸념하시곤 했다. 하지만 자식들 눈에 비친 우리 집은 엄격한 유교적 질서가 강조되던 시대였음에도 묘하게 평등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결코 아버지를 무시하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 엄마의 기세에 눌려 지내시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집안의 기둥으로서 묵묵히 중심을 잡으셨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엄마의 권위를 인정하며 기꺼이 져주셨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성실함을 믿었기에 불만 속에서도 가정을 굳건히 지켜내셨다.
2.
부모님의 진짜 연애담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예순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뒤,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집 거실과 방은 부모님의 연애 시절 흑백 사진부터 결혼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감히(?) 시도하지 못하셨던 일을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듯 하나하나 큼지막하게 확대해 액자로 거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꼼짝 못 하고 사신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하고 생경한 풍경이었다. 벽면 가득한 사진들을 보며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내가 조용히 여쭈었다. "아버지, 저 사진들 보니까 두 분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아버지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시며 그제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충남 서천 출신인 아버지는 군산사범학교 졸업 후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 군대를 다녀와 고향에서 까마득히 먼 경북 김천의 대덕초등학교로 발령받은 28살의 예비역 교사였다. 당시 동료 선생님들은 주말이면 근처 본가에 다녀오곤 했지만, 아버지는 고향이 너무 멀어 명절이나 되어야 내려갈 수 있었다. 게다가 아주 어릴 적 어머니(나에게는 할머니)를 여의신 탓에, 고향 서천에 가더라도 딱히 따뜻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없는 쓸쓸한 처지였다. 그 사연 때문에 아버지는 주말에도 홀로 학교 앞 자취방을 지키는 단골손님이자 전담 식사 당번이 되었다. 당시 총각 선생님들의 자취방은 여선생님들이 단체로 놀러 와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는 아지트였는데, 수줍음 많던 아버지는 동료들이 여선생님들과 담소를 나눌 때도 묵묵히 부엌에서 솥에 나무를 때며 밥을 지으셨다. 주인집에서 얻어온 김치에 된장국을 끓여 대접하는 게 그저 즐거우셨던 순박한 총각 선생님의 모습이, 엄마의 눈에는 다른 어떤 화려한 총각들보다 특별하고 믿음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3.
아버지가 들려주신 결정적인 장면은 어느 일요일 낮이었다. 평소처럼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본가로 떠나고 아버지만 홀로 자취방에 남아 밀린 업무를 보거나 소일거리를 하던 때, 안동교대를 갓 졸업하고 초임으로 발령받은 23살의 당찬 아가씨 선생님이었던 엄마가 홀로 불쑥 나타났다. 낯선 타향에서 홀로 밥을 지어먹으며 조용히 지내던 가난하고 순진한 총각 선생님에게, 엄마의 그 당당한 방문은 인생을 바꾼 사건이 되었다. 아버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엄마가 놀러 오는 게 내심 싫지 않으셨다며 그때를 회상하며 슬며시 미소 지으셨다.
그렇게 사내? 연애를 하다가 엄마가 결혼하자고 해서 결혼하게 되었단다.
연애시절 아버지와 엄마!
결혼 역시 엄마의 주도로 김천에서 치러졌고, 경제적으로나 마음으로나 기댈 곳 없던 아버지를 대신해 모든 예식의 진행과 비용을 외갓집에서 주도하셨다.
하지만 결혼 후 아버지는 달라지셨다. 천방지축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딸이었던 엄마를 어르고 달래며, 중요한 결정은 본인이 내리고 그 책임 또한 온전히 짊어지는 든든한 가장이 되셨다. 가전제품 하나 없던 시절, 셋방살이하며 한 푼 두 푼 모으느라 억척스러운 엄마로 변해가는 엄마를 보며 아버지는 늘 짠함과 대견함을 동시에 느끼셨다고 한다. 그러다 엄마는 50대 중반에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다. 그 힘겨운 투병 생활 동안 아버지는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엄마를 간병하셨다. 평소 엄마에게 주눅 들어 계신 줄만 알았던 아버지는 엄마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 누구보다 든든하고 따뜻한 보호자가 되어주셨다. 아버지는 "엄마만큼 깔끔하게 살아내는 게 쉽지 않다, 엄마가 최고였다"며 평소 다 표현하지 못했던 절절한 그리움을 사진 액자 속에 담아두셨던 것이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 고생했다며 구박하던 엄마의 모습조차 아버지의 기억 속엔 가장 애틋한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4.
어릴 적 자라올 때는 늘 엄마의 발언권이 우리 집을 지배한다고 느꼈다. 엄마의 목소리가 크니 아버지는 그저 주눅 들어 지내시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 역시 나이를 먹고 삶의 무게를 견디는 가장이 되어보니 알겠다. 아버지는 엄마의 기세에 눌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엄마가 마음껏 당신의 색채를 뽐낼 수 있도록 묵묵히 뒷받침하며 집안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계셨던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친구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시 우리 집 분위기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 서로 자라온 환경에 대해 편하게 말하는 나이가 되었는데, 우리 집을 방문했던 친구들은 엄마가 세련되게 꾸며놓은 집안 분위기며 부모님의 말투를 보고는 우리 집이 아주 '특이하다'라고 생각했단다.
이제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알 것 같다. 엄격한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은 엄마의 당당한 권위와 그것을 기꺼이 품어준 아버지의 배려가 묘하게 평등한 균형을 이루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 조화롭고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낸 유복한 정서 안에서 자랐음을 이제야 비로소 실감한다. 이제는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내 기억 속에만 남은 이 찬란한 이야기는, 아버지가 챙겨 놓으신 빛바랜 사진 속에서 오늘도 다정하게 나를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