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하루

by 민서


희끄무레한 구름 새를 힘겹게 비집고 들어와 얼굴을 들이민 햇볕의 어스름한 꼴은 마치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여기저기를 찌르고 다니는 나를 보는 듯해 그다지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한창 볕이 내리쬘 시각인 정오임에도 온몸 가득 습기를 머금은,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축축한 공기가 아스팔트 둔덕 위로 내려앉았다. 구릿빛으로 건강하게 그을리지도, 그렇다고 푸른 정맥이 투명하게 비칠 만큼 퇴폐적으로 희지도 않은 내 피부는 핏기는 없지만 진했다. 짙은 와중에 혈색이 없어 탁한 잿빛의 피부를 보이는 것이 싫어 좁은 어깨 위로 피부에 질척하게 들러붙는 긴소매 셔츠를 늘어뜨렸다. 물기를 한껏 물고 척 가라앉아선 움직일 때마다 팔을 끈덕지게 휘감는 옷감이 거슬렸다. 다리까지 면으로 덮었다가는 정말이지 쪄 죽겠다 싶어 그나마 자주 입던 카고 숏팬츠를 골반에 툭하고 걸쳤다. 엉덩이를 강조해 주지만 실용성은 없는 큼지막한 주머니 두 개—주머니가 박음질되어 열리지 않는다. 사고 나서야 알아차린 사실. —,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기장이 마음에 들어 요즘 나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때면 이 녀석에게만 손이 갔다. 신발은 한 번쯤 지나치다 봤을 법한 특징 없는, 굳이 특징을 꼽자면 높다란 굽 정도인 검은색 샌들이었다. 스트랩의 마감이 엉성해 오래 신고 나면 발등이 까지기 일쑤였지만 굳이 다른 신발을 알아보는 정성을 쏟을 생각은 없어 이따금 신고 있다. 허리까지 기르며 열심히 관리한 탐스러운 머리칼도 지금만큼은 그저 성가셨다. 뒷덜미에 흐르는 땀방울과 엉겨 붙어 애매하게 근질거리는 느낌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한 갈래로 질끈 묶었다. 빗질도 하지 않고 거칠게 묶은 것이라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목에 달라붙지 않으니 한결 나았다. 하늘을 형체 없이 뒤덮은, 먹구름도 흰 구름도 아닌 눅눅한 빛깔의 물방울 덩어리와 그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얼굴을 비춰 보려 안간힘인 태양의 잔손이 퍽 우스웠다. 터벅터벅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숨을 들이쉴 때 침을 삼킬 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기 중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앉은 물방울들이 폐부로 들어오는 것마냥 몸이 무거웠다. 날숨이 입가에 닿는 것마저 후텁해 잠시 숨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질척한 날씨였다. 멍하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요란한 클락션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느덧 도로변이었다. 이 근방은 늘 운전을 험하게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자동차들이 복잡하게 얽힌 도로 옆을 걷고 있자니 배기음과 클락션이 내이까지 쑤시고 들어왔고, 휙 지나치며 뱉은 희뿌연 연기는 뜨끈했다. 성질은 나지만 자동차보고 도로에서 썩 물러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에 잠자코 길 안쪽으로 붙어 걸었다. 문득 오른편을 보니 군데군데 벗겨진 흰 선들의 나열이 보였다. 계속 가던 길을 가더라도 어차피 도달하는 목적지는 같겠지만, 신호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이 더위에서 잠시라도 멈춰 서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횡단보도 앞 군청색 볼라드에 기대어 앉으려다 누군가 붙여 둔 씹다 만 껌에 화들짝 멈칫했다. 정말이지, 시민 의식은 다 어디로 간 건지. 투덜투덜 속으로 불만을 내뱉던 사이 신호는 녹색으로 바뀌었다. 좀 더 쉬었다 가고 싶은 속내를 꾹 억누르고 발을 뗀 순간, 속도를 미처 다 줄이지 못해 정지선을 넘어서고서도 여전히 구르고 있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휘청휘청 뒷걸음질 치다 발이 꼬여 왼쪽 발목이 푹 꺾였다. 자동차는 몇 미터 앞에서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멈추었고, 나는 한낱 자동차에 놀라 볼썽사나운 꼴로 쓰러져 있기는 싫었기에 황급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넘어지다 까진 것인지 그저 아스팔트가 햇빛에 덥혀진 것인지 손바닥이 홧홧했다. 횡단보도를 빠르게 걸으며 자동차를 흘끗 보자 진한 선팅에 운전자의 실루엣만 흐릿하게 보였다. 운전자의 표정이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전봇대 사이로 축 늘어진 검은 전선 위는 늘 퍼덕거리던 비둘기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가로수 사이로 윙윙거리며 울리는 매미 소리도 그날따라 먹먹한 것 같았다. 한산한 식당과 간판이 낡은 구멍가게, 노점 몇 개를 지나치고 나자 한결 번듯한 건물들이 눈에 보였다. 빛바랜 원색 간판들은 유려한 필기체로 인쇄된 입간판이나 오색 글씨가 번뜩이며 휙휙 지나치는 전광판으로 탈바꿈했고, 기껏해야 2층을 넘을까 말까 했던 건물들은 높다란 빌딩으로 훌쩍 자랐다. 제각기 다른 브랜드의 커피숍들이 줄줄이 늘어선 길변을 지나 전면이 유리로 지어진 건물에 도착했다. 날이 흐리지 않았다면 햇빛을 게걸스럽게 반사해 화사하게 빛났을 듯한 건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일광을 머금지 못해 탁한 청람색으로 너울거리는 모습은 그다지였다. 어지럽지도 않은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잘도 도는 회전문의 입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나를 한품에 안았다. 아마도 건물 전역에서 가동되고 있을 강력한 냉방이 순식간에 땀을 식혔고 기분 좋게 서늘한 감각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피부에 진득하게 붙던 셔츠의 감각도 그 순간만큼은 기꺼웠다. 익숙하게 복도를 걸으니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조명 아래의 은행, 이라 쓰인 간판이 선했다. 곧장 입구로 들어가려다 사람으로 북적한 의자와 이미 두 자릿수를 넘어선 대기수를 보고 멈칫, 몸을 꺾어 옆 밀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ATM 기기 네 대가 늘어선 방 안에는 사람이 두어 명뿐이었다. 맨 구석 자리로 들어가 버튼 몇 개를 누르고 기기가 로딩되는 동안 안주머니에서 구깃하게 주름이 간 고지서를 꺼내 들었다. 무더위라 저번달보다 는 전기세 탓에 아슬아슬하게 통장 잔액을 밑도는 금액에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마뜩잖은 심산으로 납부를 마쳤다. 공과금을 낼 때마다 드는 영 불경스러운 마음을 이내 떨쳐 버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막상 건물을 나가려니 논개마냥 바다에 몸을 던지는 듯한 기분이라 이도 저도 못한 채 로비만 서성였다. 다시 저 후텁지근한 공기 속으로 저를 내맡기기엔 이미 건조할 만큼 차가운 실내의 맛을 본 뒤였다. 일말의 습기도 없이 메마른 공기는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손길로 기도를 긁어댔다. 결국 못 이겨 괜스레 결연한 걸음을 떼자 녹아내릴 듯 질척한 공기가 반색하며 다시금 붙어 왔다. 콕콕 찌르듯 따가운 햇볕도 대지를 삼켜 버릴 듯 휘내리는 비도 없지만 그래서 더 찝찝했다. 열파를 애매하게 비낀 엷은 일광, 소낙비도 뱉지 않는 주제에 축축한 담백색 구름 모두 어중간하기 짝이 없어 괜히 불콰한 내심이었다. 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돌아가려던 찰나 샛노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질퍽한 회백의 공기가 게걸스럽게 집어삼켜 색채를 앗긴 다른 간판들 사이 유달리 선명한 그 빛깔은 한 저가 커피 브랜드를 표상했다. 질퍽한 무더위 아래 속을 식힐 차가운 커피 한 잔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발길을 꺾었다. 아니, 실은 홀린 듯 이끌렸다 해야 더 정확할 듯싶다. 전자는 별다른 이유랄 것도 없이 한낱 싸구려 커피에 마음이 기울었다 인정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나의 뒤늦은 명명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고급형 커피 브랜드의 삼 할 정도 가격에 불과한, 아마도 미끼 상품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었다. 문간을 나서며 한 모금 머금자 쌉싸름한, 동시에 반투명한 모양새를 방증이라도 하듯 연한 향미가 스쳐갔다. 제깟 것도 나름의 커피라고 달뜬 속을 차게 가라앉히는 역할은 제법 톡톡히 수행했다. 커피를 동행으로 삼아 무거운 공기의 포식을 지나고 있자니 플라스틱 컵 위로 점차 둥근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엉키고 설키고 뭉치다 보니 어느 정도 배를 불려 묵직해진 몇 놈들은 손 위로 주룩 미끄러져 흘렀다. 마르고서도 끈끈한 잔상을 남기던 땀방울과 달리 한때 축축했다 곧이어 제가 살았던 흔적을 몽땅 챙겨 어느 순간 떠나 버리는 것이 흡족했다. 여러 쓰잘데기 없는 상념들을 이고 지고 걷다 보니 벌써 커피는 마지막 모금이었고, 걸음은 문간이었다. 왼손으로 느릿하게 도어록을 열며 오른손이 들이부은 커피는 검은 찌꺼기들이 흐려 놓은 탓에 텁텁했다. 컵을 협탁 위에 건성으로 놓아두고 셔츠의 단추를 집어 뜯듯 벗어던졌다. 입었을 때보다 한결 짙어진 색의 속옷도 돌돌 말린 것을 곱게 펼쳐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발 빠르게 욕실로 걸음을 옮겨 물을 끼얹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짭찔한 땀방울을 씻어낸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몸을 내맡겼다. 빠르게 머리까지 감고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후줄근한 티셔츠를 뒤집어썼다. 그 상태 그대로 선풍기 앞에 앉으려다 문득 아까 협탁 위에 두었던 컵이 생각나 발을 돌렸다. 반쯤 녹은 얼음과 입술이나 겨우 축일 양의 물이 든 컵이 협탁 위에 서서 고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음이 녹은 물은 티끌만 한 양임에도 찬 기운을 물고 있었고, 열풍에 메마른 입술은 기껍게 받아들였다.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선풍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미약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특별히 차갑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물방울을 쫓아 온수욕에 달뜬 몸을 식히고, 들러붙는 머리칼을 휘날려 떨어뜨려 준 것만으로도 그것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식자 한껏 나른해진 척수는 눈꺼풀을 집어 당기며 주변의 눅눅한 공기마저도 아늑하다 속삭였다. 덩달아 포근해진 나 역시 그의 속살거림에 어물쩍 넘어가기로 하고, 못 이긴 척 눈을 감았다. 뺨에 닿는 바람은 낯간지러웠고, 엷은 구름은 해를 슬쩍 포개 섰으며, 날숨은 말도 안 되게 따뜻했다. 눈을 감자 고조곤히 찾아와 손을 흔드는 정적마저도 반가워 요란스럽게 동석을 물었다. 나를 한 뼘 비껴간 이번 여름은 은근했고, 나는 그러한 여름의 찰나가 썩 나쁘지 않았다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