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마른 편지

by 민서

털썩, 의자에 쓰러지듯 무거운 몸을 뉘여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상 위에 씌워 둔 유리 커버가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 살갗에 닿자 전해져 오는 싸늘한 감각에 앗, 하고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맨살이 닿지 않도록 두꺼운 팔꿈치를 책상에 대니 한결 나았다. 왼손으로 턱을 비스듬히 받쳐 괴고, 오른팔은 책상 아래로 대충 늘어뜨렸다. 약간 바랜 듯한 미색 벽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벽시계의 가냘픈 초침이 낑낑대며 굴러가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본디의 목적을 상기한 듯 흐느적하던 오른손을 놀려 뒤편의 책장을 더듬었다. 번번이 헛손질을 하기를 몇 번, 못 이긴 척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책장을 보았다. 몇 장 읽다 덮어 먼지가 쌓인 책이 두어 권, 너무 자주 읽어 책등이 반들반들하게 닳은 것이 한 권,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빳빳한 것이 또 한 권이었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투명한 반구 형태의 문진과 원목 색감의 포장재를 덧씌워 둔 플라스틱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액자 속 사진은 반으로 접혀 왼쪽에 선 티셔츠 차림의 남자만 보였는데, 찍던 도중에 카메라가 흔들린 것인지 애초에 화소가 많지 않은 카메라였던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다소 흐릿했다. 다시금 시선을 끌어내리자 서랍 형태로 된 책장의 맨 아랫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인가 보다, 싶어 허리를 굽히고 서랍을 당겼다. 약간 빡빡하게 열리는 서랍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언가가 많아도 들어 있는 듯했다. 에펠탑과 빅 벤 시계탑이 찍힌 흑백 엽서 뭉치와 얼룩덜룩한 검은색 수채 물감 팔레트, 뚜껑이 느슨하게 닫힌 유광 바니시까지. 바니시를 꺼내 꽉 잠근 후 서랍에 쑤셔 넣어 잠가 버렸다. 음, 아무래도 이쪽 서랍은 아닌 듯싶다. 반대편 서랍은 좀 더 부드럽게 열렸다.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던 앞전 것과 다르게 이 서랍은 조금 더 얌전해 보였다. 안에 든 것들은 천천히 훑어 내린다. 사 두고 한 번은 썼는지 가물가물한 먹물, 툭 건드리자 오색 가루가 흩날리는 파스텔. 아, 찾았다. 끝이 둥근 직사각형 모양의 빳빳한 유백색 종이 묶음을 집어 들었다. 찾고자 한 것을 손에 넣었으니 서랍을 탁 소리 나게 닫고 다시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책상 구석에 놓인 잉크병을 눈앞으로 가져와 살짝 흔들자 푸른빛이 감도는 잉크가 진득하게 찰랑였다. 형광등의 형형한 빛을 머금고 너울거리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몇 번 더 흔들다 뚜껑을 열었다. 새 책을 펼치면 나는 특유의 잉크 냄새가 훨씬 더 진한 내음으로 방을 채웠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잉크병을 내려 두고 잉크를 삼킬 펜을 찾았다. 몇 달 전, 여름이었던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은 세상의 색을 한층 선명하게 물들였고, 그에 가로수는 진녹색으로 우리의 피부는 커피색으로 그을었다. 가뜩이나 좁은 길가에 끝을 모르고 늘어선 노점들도 그때는 이유 모를 감성으로 다가온 시절이었다. 다닥다닥 모인 노점들을 가로질러 가던 중 청록색 차양을 단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차양에 반사된 찬란한 오색빛 잔상에 홀린 듯 걸음을 멈추었다. 상점의 주인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보란 듯 그것을 손끝으로 건드려 보였다. 모빌처럼 그것에 매달린 오브제들이 청아한 소리와 함께 저들끼리 흔들리고 부딪혔다. 내가 그것을 빤히 보고만 있자 주인은 썬캐쳐, 라며 그것의 이름과 가격을 넌지시 일러 준 후 매대를 구경해 보라며 다른 손님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매대에는 온갖 소품들이 일관성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유리로 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캐릭터가 그려진 헤어밴드 따위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파는 흔해 빠진 노점상이었다. 상술임을 뻔히 알면서도 분위기가 좋으니까, 이런 게 감성이니까, 하며 사는. 그렇게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당하고 말았다. 네가 옆에 있었고, 햇볕은 기분 좋게 뜨거웠으며, 혀로 입술을 축이자 따라온 땀방울은 짭조름했다. 쨍한 자연광을 게걸스럽게 삼켜 희번덕한 잔흔을 남기는 유리 오브제들은 시시각각 쟁그랑거리는 소리로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 결국, 뾰족한 펜닙을 내세운 유리 세필을 하나 집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지금 찾으려니 보이지 않는다. 투명한 유리 세필의 촉립 아래 딤플처럼 파인 요철이 검은 잉크를 머금어 점차 번져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책상에 없다면 아까 그 서랍에 있으려나? 그렇다고 세필 하나를 찾기 위해 서랍을 뒤집어엎을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관두었다. 책상의 오른쪽 구석에 비스듬히 놓인, 손잡이가 깨진 머그컵을 재활용해 만든 —엄밀히 말하면 재활용도 아니다. 그냥 둔 것에 불과하니까. — 연필꽂이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 들었다. 잉크를 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마르면 안 되니까. 뚜껑을 꽉 돌려 닫고 내려 두었다. 제트스트림 0.28. 가느다란 심과 글씨를 쓸 때면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다. 마구잡이로 집은 것치고는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종이를 책상에 곱게 펼쳐 올려 두고 펜을 고쳐 쥐었다. 날짜, 받을 이를 적고 한 줄을 내린 순간 바보같이 멈칫했다. 무얼 써야 할지 막상 펜을 드니 막막해서. 잘 지내? 오랜만이다. 너무 전 연인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안부를 묻는 것 같잖아. 안녕, 나야. 이건 너무 당돌해 보이고. 간소한 인사 한 줄을 적는 데도 수많은 고민이 오가는 내 모습에 픽,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첫 문장은 정해졌다. 다음으로는 내 소식을 몇 줄 담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둥, 함께 걷던 오솔길 옆 동백이 꽃을 피웠다는 둥 원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재미없는 내 얘기를 주절주절 나열하기보다는 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꾹꾹 눌러쓴 안부가 궁금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가득했다. 다만 내 이야기를 적을 시간에 하루빨리 편지를 부치면 네 답신도 조금 더 서둘러 불어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마지막 인사를 쓸 차례였다. 물론 네가 안녕하기를 바라지만, 안녕이라고 적으면 정말 안녕일 것만 같아서 안녕이란 인사말은 적지 않았다. 다만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고민하다 짧게 한 줄 덧붙였다. 그리고 보낸 이를 적으려 손을 아래로 내리었다. 아, 실수였다. 종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바람에 추신이 번져 버리고 말았다. 조마조마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나를 비웃듯 지저분하게 번져 버린 글씨가 그저 매정했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추신을 네가 보지 못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과 내심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던 마음이 번잡스럽게 얽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다시 같은 내용을 쓰기에는 빈약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머뭇거리면서도 종이를 내려 두었다. 미리 준비한 사기색 봉투에 종이를 곱게 접어 넣고, 괜히 엽서도 두어 장 끼워 넣었다. 가지고 있는 우표 중 가장 색이 고운 것—푸른 바다와 녹음이 우거진 산을 배경으로 해 콘크리트 방파제가 늘어서 있고, 선명한 빨간색과 흰색이 교차해 칠해진 등대의 사진이었다. —을 조심스럽게 풀을 칠해 구석에 붙였다. 모래색 노끈을 잘라 편지를 봉하고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주소를 써 내려갔다. 심혈을 기울여 쓴 이유를 묻는다면 다만 편지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겉봉의 글씨가 정갈해 보이기를 바랐을 그뿐이었음을. 담은 것이라고는 글씨 몇 자와 종이 몇 장 걱정과 그리움 몇 뭉치가 다인 편지의 옆태는 얄팍하니 혹 우체통에 넣다 구겨질까 우체부가 전해 주다 바람이 채갈까 괜히 심란해질 뿐이었다. 주름이라도 갈까 아기 다루듯 한 손길로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는 옷장으로 향했다. 편지를 전할 때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네게 전해질 편지라 생각하니 매무새마저 곱게 차려입고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애꿎은 옷장만 이리저리 뒤적이다 결국 꺼내 든 것은 포근한 코코아색 스웨터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니트 스커트, 실밥이 몇 군데 풀리기 시작한 선붉은색 목도리였다. 편지 하나 넣으러 가는데 화사하게 꾸밀 필요는 없다며 애써 저를 다독이며 목도리에 턱을 묻었다. 편지를 소중히 손에 챙겨 들고 문간을 나섰다. 우체통은 오솔길을 멍하니 걷다 보면 금방이었다. 타박타박, 간밤에 눈인지 비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내리긴 한 모양이었다. 길가의 흙이 몽글몽글하게 덩어리 져 진갈색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곧 드러난 맨 이마에 와닿는 공기가 차가워 코끝을 목도리에 더 깊숙이 파묻었다. 보들보들한 털실이 연한 살을 간질이는 감촉이 기꺼웠다. 길가의 왼편 울타리 쳐진 곳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고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름빛 진한 녹색의 이파리와 선연한 다홍색 꽃잎, 솜털 같은 꽃술들이 머리를 모아 샛노래진 덩어리가 각자의 색감을 뽐내듯 선명했다. 동백을 감싼 울타리 역시 젖어 있었고, 적갈색으로 머리가 녹슨 못 하나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옆으로 시들어 낙화한 동백 몇 송이가 쌓여 있었다. 동백이 십자가에 박힌다면 저것과 비슷한 모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갈길이었다. 거의 다 왔다는 뜻일 테다.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한 것들이 지천에 너르게 깔린 모습이 저들끼리 모여 소곤거리고 있는 것만 같아 괜스레 밟기 미안해졌다. 군데군데 슬쩍이 보이는 빈틈을 찾아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저편에 있는 새빨간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것이 너라도 되는 양 달음박질치고 싶었지만 꾹 누르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조급한 기색이 어린 것은 차마 흐린 눈으로 넘기고 말았다. 우체통의 뚜껑에 동그란 물방울 몇 개가 맺혀 있기에 혹 편지를 넣을 때 젖어들까 싶어 손등으로 쓸어 털어 냈다. 더 이상 물기가 없는 것을 보고서야 뻐끔히 입을 벌리고 있는 우체통에 느릿하게 편지를 밀어 넣었다. 날름 게걸스럽게 내 편지를 삼킨 우체통은 여전히 그 허기를 만족스레 채우지 못했다는 듯 전과 같은 외양이었다. 그것을 어물쩍 모른 척 돌아서자 작은 단화 자국이 고스란히 찍힌 오솔길이 보였다. 편지는 내일, 아니 모레 정도면 네게 도착할까? 나는 이제 저 길을 돌아가 오매불망 네 답장만을 기다릴 것이다. 네가 답신을 쓰며 조심스레 고민한 인사말 한 마디를 꾹꾹 정갈하게 눌러쓰는 모습이 기대되는 동시에 당장이라도 네 반응을 보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이 교차했다. 타박타박, 다시 오솔길을 걸었다. 발밑에서는 겨울바람에 시들어 떨어진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 물기를 양껏 머금은 흙이 사각거리며 뭉그러지는 감촉을 생경하게 전해 왔다. 어느덧 문간이었다. 평범한 현관문 옆, 자그마한 우체통은 텅 빈 제 속을 채울 만한 것을 달라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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