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밤이었다. 흰 담요가 포근하게 몸을 감싸고, 밤공기에 살짝은 시리었던 발도 맞대어 모으니 은근히 전해지는 체온에 한결 나았다. 간밤에 내린 소낙비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은 창문 틈새로 새벽빛의 옅은 잔상이 그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가뜩이나 희끄무레한 달빛은 안개에 스며 흐릿했고, 이슬이랄 것도 대롱대롱 곱게 맺히는 대신 풀잎의 끄트머리를 건성으로 쥐어잡은 듯 빙충맞아 보였다. 그 꼴이 마치 방에 처박혀선 침대나 어지럽히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괜히 입에 쓴맛이 감돌았다. 시든 들꽃처럼 무기력하게 스러져 있는···. 아, 이런 나를 들꽃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관대한 처사일지도 모르겠다. 윤기 없이 부스스하게 흩어진 머리칼, 흐리멍덩한 눈동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팔다리. 멍하니 벌어진 입술은 건조한 공기에 튼 것은 물론 얼마나 짓씹은 것인지 울혈이 생겨 지저분하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눈을 감은 채 벽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흐릿한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올라가 본다. 요즘의 기억이랄 것들은 전부 별것 없었다. 곰팡이가 슬어 잿빛이 도는 천장, 한때는 잘 마른 햇빛 냄새가 났던 침대 보의 감촉.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계속, 계속 되짚어 올라갔다. 그러다 회빛 기억들 속 무언가 잘게 반짝였다. 너무 작고 희미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잿빛 녀석들이 워낙 칙칙한 나머지 나의 생기 잃은 눈동자도 잡아낼 수 있었다. 눈을 감았다. 나는 침대 위를 벗어나 그 작은 녀석에게로 한 발을 내디뎠다. 늘 같은 냄새 속에 파묻혀 있던 코는 색다른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햇빛 냄새. 네가, 아니 내가 좋아하던 냄새였다. 흐읍, 하고 숨을 깊게 들이켜자 그 향이 내 몸을 채웠다. 예전엔 이불을 햇볕에 말려서 소독하곤 했지. 이렇게 하면 내 몸도 한결 깨끗해지려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픽,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이윽고 몇 번 더 큰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까지 너를 채우려는 듯이. 이후로도 미처 미련을 다 떨치지 못해 몇 번이나 더 뒤돌며 다시 발을 떼었다. 비척비척 빈약한 몸을 이끌고 앞으로 가다 보니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타박타박, 발소리였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 힘차고 무엇보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듯한 당참. 그것에는 당장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듯 조급한 기색이 있었다. 소리가 들려옴에도 그 광경이 그려지는 것만 같아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왜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보기 싫었을 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었다. 그곳의 가장 내밀한 곳에 도달하기 직전인 듯, 시야의 가장자리가 묘한 금빛으로 물든 것이 퍽 보기 좋았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니, 어렴풋이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또 흐릿한 연기 따위와 씨름하기는 싫어 홱, 고개를 돌려 버리려던 찰나 단내가 났다. 슬그머니 다가온 달큰한 내음이 코를 간질이자 절로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이윽고 보인 것은 딸기 한 알이 올려진 우유크림 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허, 하며 벙쪄 있던 것도 잠시 케이크 위에서 홀로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발그레한 딸기가 시선을 붙들었다. 식기랄 것도 없어 손끝으로 딸기를 집어 들었다. 곱게 베어 먹을 여유는 없었기에 과실을 한 입에 머금고 나니 진한 단맛이 입에 감돌았다. 이렇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이 오래간만인 탓도 있겠지만, 그저 달았다.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 새로 흐른 투명한 과즙이 아쉬워 혀를 내어 핥고 과실을 삼키는 것이 아쉬워 곤죽이 되도록 씹어댔다. 입속에서 점차 단맛이 사라져 가는 것조차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구순에 남은 맛을 되새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듬지 않은지 오래라 길게 자란 손톱 아래 딸기의 찌꺼기와 과즙이 엉긴 것이 눈에 들어왔다. 딸기의 기억은 달콤하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걸치고 있기는 한 담요에 벅벅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나니 우두머리를 잃고 외롭게 남은 우유크림 케이크가 보였다. ···케이크를 맨손으로 먹기는 좀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어차피 손을 더럽혔으니 그냥 즐기자, 고 나름대로 합리화했다. 손톱 아래에 크림이 끼는 꼴을 보기는 싫어 손마디가 접히는 부분으로 케이크를 푹- 떴다.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크림의 차가운 감촉에 케이크를 뭉개 버리고 싶다는 출처 모를 가학심이 스멀거렸으나 이내 떨쳐버리고 케이크를 입술 새로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녹진한 크림이 체온에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퍽퍽한 스펀지 시트도 왜인지 그때만은 달가웠다. 그렇게 케이크를 욱여넣다 보니 어느새 접시는 비어 있었다. 손마디에 묻은 잘게 덩어리 진 크림을 슬쩍이 핥아 삼킨 후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케이크 덕분일까, 한결 여유가 생긴 발걸음에 덩달아 나 역시 주변을 살피었다. 아까의 조급하던 누군가의 발소리, 그것이 다시금 귓가에 맴돌았다. 와락 껴안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다가가는 듯 다급한 발소리에, 그 광경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랬기에 나는 가장 내밀한 곳, 그곳으로 걸음을 떼었다. 보이는 광경은 예상했던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포근한 캐러멜색 코트 차림의 얼굴이 흐릿한 한 남자가 서 있고 허리까지 늘어뜨린 흑발이 눈에 띄는 한 여자가 그 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여자는 초조한 듯 손끝을 비비며 걸음을 뗐는데, 단화가 바닥에 닿으며 나는 투박한 소리가 묘하게 청아해서 듣기 좋았다.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나의 시선이 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자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비록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입꼬리를 빙긋이 올렸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코트를 살며시 열었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이. 여자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번져 들었고, 이내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지켜보는 나조차도 일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남자의 품에 곧이 안겨 기대는 여자의 고동색 스웨터와 캐러멜색 코트는 꼭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이마를 맞댄 둘의 얼굴은 안개가 낀 듯 흐릿했지만, 해사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 표정을 따라지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갔다. 꼭 끌어안고 있는 그들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지만 내 욕구가 더 컸다.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그러나 그들은 나를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에 용기를 얻어 여자를 좀 더 상세히 관찰했다. 키나 체구는 나와 거의 비슷했지만, 훨씬 탐스럽고, 건강하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머리칼, 손끝, 옷차림 하나하나가 예뻤다. 그 모습에 이는 감정이 시기인지 선망인지 나조차도 확실치 않아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돌려진 시선은 남자에게 향했다. 전체적으로 포근한 색감의 매무새가 좋았다. 눈썹을 단정하게 덮은 머리칼은 부드러워 보였고, 멈칫대며 올라가려는 손을 의식적으로 내려야 했다. 그러던 중, 시선이 느껴졌다. 화살처럼 벼려져 내려 꽂히는 시선이 아닌, 올곧고 다정한 시선이었다. 화들짝 뒤를 돌아 주변을 살폈지만, 나, 그리고 얼굴이 흐릿한 남녀 한 쌍을 제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머뭇거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여자는 여전히 남자의 품에 기대어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마도 코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라벤더 향 섬유 유연제의 내음을 맡는 것이겠지. 그리고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 ···아니, 정말인가? 남자의 고개는 미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해서. 저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품에 안고, 지저분한 꼴을 한 나를 보는 건가? 왜? 비록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의 온화한 시선이 닿자 나 역시 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의식적으로 내리고 있던 손을 차마 주체하지 못한 것은. 끝이 잘게 떨리는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유감이지만, 막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나조차 확답할 수는 없다. 그저 올라갔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 손은 이윽고 남자의 뺨에 닿았다. 트고 차가운 내 손과 달리 남자의 뺨은 부드럽고 말랑했다. 따끈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럼에도 나약한 나는 차마 손을 떼지는 못해 가만히 남자의 뺨을 감싸 쥐고만 있었다. 그러던 그 순간, 뿌연 안개로 가려진 듯 흐릿했던 남자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와 그 속의 따뜻한 연갈색 눈동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술까지. 아, 너였다. 나는 곧 그런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돌려 여자를 보았다. 화장기 없이 수수한 얼굴에서도 눈에 띄게 도톰하고 짙은 붉은빛의 입술이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꼴이 익숙했다. 웃을 때면 눈가가 접혀 속쌍꺼풀이 엷게 드러나는 것까지 미치도록 익숙했다. 그래, 그건 나였다. 좀 전까지 내가 미치도록 선망하고, 질투하던 여자가 나였다니. 이보다도 우스운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기껍기도 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나라니. 발그레한 홍조를 띠어 생기 있는 뺨, 살짝 벌어진 입술과 함께 머금은 수줍은 미소, 주름을 잡으며 접힌 눈매. 그랬다. 나는 너를 볼 때면 그토록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한 번만 더 그런 낯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시야가 흐려졌다. 눈을 거친 손등으로 벅벅 문질러 닦고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그러나 아름답던 한 쌍은 그대로 사라졌고, 희뿌예 가물가물한 시야에 남은 것은 곰팡이가 슬어 탁한 상아색의 천장뿐이었다. 사위가 고요한 방 안에서는 색색거리는 나의 숨소리조차 거슬리게 다가와 마냥 조심스러웠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덮어 내리자, 그들의 잔상이 떠올랐다. ···그 미소를 다시금 짓고 싶다. 너를 볼 때,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그 미소를 다시금 머금고 싶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팔다리를 다시 일으켰다. 일어나지 않은지 오래라 저릿저릿한 감각이 관절을 차갑게 훑는 듯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무거운 몸을 휘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분명 아까의 잔상에서는 머리칼이 허리 정도에서 너울거렸던 것 같은데, 엉키고 끝이 부스스한 머리칼이 허벅지를 간질이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 길었구나. 고개를 몇 번 도리질 치자 목과 광대에 붙어 걸리적거리던 머리칼 몇 가닥이 떨어져서 한결 편안했다. 한 발, 한 발 힘겨운 걸음을 떼어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모를 화장대는 단출했다. 향수 두어 개, 립밤 세 개. 먼지가 내려앉은 거울은 제 용도를 다하지 못하기에 후, 짧게 바람을 불었다. 그 탓에 코끝이 간지러워 몇 번 자잘한 기침을 했는데, 그 꼴이 또 우스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거울을 보았다. 정돈되지 않아 길기만 하고 부스스한 머리칼, 거칠게 튼 입술, 핏기 없이 창백한 뺨. 사랑스럽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으나 흐린 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웃어 보고 싶었으니까.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억지로 끌어올리려니 입꼬리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설퍼 보여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매는 억지로 휘자니 더욱 부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아 그냥 관두기로 했다. 다시금 거울을 보았다. 분명 잔상만큼 해사하고 밝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화사한 오뉴월 장미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름 봐줄 만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확실히, 해쓱하게 시들었던 아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화장대를 뒤적여 빗을 집어 들었다. 길고 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끼어 있었다. 아마도 내 것이겠지. 그런 자잘한 사용감마저도 마냥 좋아 빗을 집어 들었다. 머리칼을 빗어 내리자, 처음에는 몇 번 걸리던 손길이 이윽고 슥슥 부드럽게 이어졌다. 어느덧 머리칼은 차분하게 가라앉았음에도 그저 그 일련의 행위가 즐거워 그만두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빗질을 계속하다 화장대 구석 아무렇게나 놓인 립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것까지만. 빗을 다시 내려두고 손을 뻗었다. 페퍼민트, 복숭아, 바셀린. 오늘은 달콤하고 싶어 복숭아 립밤을 집어 들었다. 립밤 통의 뚜껑을 돌려 열자 인위적이고 진한 단내가 훅, 끼쳐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마저도 기꺼웠기에 립밤을 긴 손톱으로 살짝 퍼 건조한 입술 위에 펴 발랐다. 입술을 뻐끔거리자 반질하게 미끄러지는 감촉이 좋았다. 다시 거울을 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칼, 미색 뺨, 엷은 미소가 자아내는 소슬한 분위기가 좋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때는 예쁜 개나리색이었을 것 같은 빛바랜 벽지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책장에 한가득 꽂힌 책들의 등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한때 열심히 모았던 시리즈 소설이 보였고, 초판 기념으로 발매한 한정판 일러스트도 곱게 놓여 있었다. 두 번째 책장 위 투명한 프레임의 액자 안에 담긴 낡은 사진 안에서는, 네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옆 원목 액자 안 사진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나와 네가, 우리가 보였다. 손끝으로 액자 위를 쓸어 보다 몸을 돌렸다. 문고리 위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쇠의 온도가 기분 좋게 손에 닿았다. 이 손잡이를 누르면, 어떻게 될까. 누를까? 눌러볼까? 손톱으로 문고리를 두드려 보기도, 괜히 문대 보기도 여러 번,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눌렀다. 당겼다. 열렸다. 내디뎠다. 문간에서 망설였던 시간이 우스울 만큼 별것 없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거실은 내 방과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크림색 가죽으로 덮인 소파 앞에는 따뜻한 갈색의 커피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티코스터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아까 침대에서 눈을 감았을 때는 새벽이었던 것 같은데, 거실의 너른 창으로는 어느덧 일출이 환한 얼굴을 비추어 벽보를 짙게 물들였다. 창가에 놓인 커다란 도자기 화분 안에는 진녹색 극락조가 한 그루 심겨 있었다. 큼직한 이파리가 차양처럼 드리워진 것이 느슨한 태양과 잘 어우러졌다. 그렇게 적막한 거실을 훑어보던 중, 달칵-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적 속에서 한껏 예민해진 귀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고, 마주했다. 넥타이의 매듭을 푸르는 손을, 바람에 날려 이마를 드러낸 머리칼을, 놀란 듯 커진 연갈색 눈동자를. 침묵이 오갔다.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달리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한 관계로 눈을 내리깔았고, 그는 그런 나의 눈치를 살피듯 몇 번 눈을 굴리고서야 걸음을 뗐다. 나에게 한 발짝씩 다가오다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멈췄다. 그의 넥타이는 미처 다 푸르지 못해 느슨해진 매듭이 대롱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에 입꼬리를 슬쩍이 올리고 말았다. 그는 비죽 올라간 나의 입매를 눈치챘음이 틀림없다. 한 걸음 더 다가와 코트를 활짝 열었다. 연갈색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입술을 휘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 입꼬리는 잘게 떨렸다. 나는 그 모습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잔상을 재현했다. 캐시미어 코트의 보풀이 드러난 맨살에 닿는 감촉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다음으로는 반쯤 풀다 만 넥타이의 매끈한 질감이 뺨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슴께에 닿는 이마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입꼬리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눈매를 접어 웃자 주름이 잡혔다. 아, 그래. 나는 너를 볼 때면 이런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볼 때면 한없이 다정하게 빙긋이 웃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제 우리의 잔상은 없다. 나는 걸어 나왔고, 너를 안았다. 너는 나를 안았고, 웃었다. 이렇게, 회탁의 기억 속 작은 점이 하나 더 봉숭아 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