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날씨가 많이 선선해진 요즘이다. 땅에 공양이라도 하듯 흘러내리던 땀방울은 어느젠가 식어 그 자취를 감추었고, 입술 사이를 아득아득 비집고 나오던 더운 숨은 언 손을 녹여주는 한 줄기 낙락한 빛이 되었다. 가능한 한 많은 살결을 드러내려 애쓰던 진녹색 여름은 노을 지듯 한순간에 그 몸을 가렸다. 숨 한 번 들이쉬면 깊은 폐부 가득히 채우던 물빛 습기 그토록 불쾌하던 것이 이제 와 왜인지 그리운 기분이다. 쟁쟁히 경쟁하듯 내리쬐는 햇볕과 그에 맞서 세차게 들이붓는 빗방울,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머금고 진득한 녹빛 생명력을 뽐내며 피어나는 여린 싹들. 봄비 삼켜 움트던 새순은 여름을 베어 물어 녹진한 잎맥으로 피어났고, 높디높아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의 품 아래 맥동하는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제 한 몸 한 치 망설임 없이 불태워 한 계절 세상을 덥힌 태양은 고매히 서 우뚝 자리를 지킨다. 초목을 쓰다듬을 때마다 넘치듯 새어 나는 자애는 대지를 황금빛 광명으로 칠했으며,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과 손을 맞잡고 한낮의 평화를 내보인다. 그러다 높다란 건물 사이로 희끄무레한, 흰 것도 검은 것도 잿빛도 아닌 모호한 빛깔 구름 한 점 어중간하니 빼꼼 고개를 들이민다. 태양과 무명지 맞대고 놀던 바람 썩 꺼지라며 휘익 눈치를 중에 겁먹은 구름 미적거리며 내키지 않은 발길 돌린다. 하나 만물을 한품에 안은 태양의 자비는 또한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음에 부드러운 일광 손짓하듯 너울거리며 다시금 구름을 제게로 불러들인다. 엷은 먹색 구름 위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햇볕 겹치자 그 따스함 부럽던 산들바람 역시도 슬쩍, 구름에 제 실체 없는 몸 포개어 알음알음 구름 흩트리려 든다. 성화에 못 이긴 태양 모른 척 산등성이 뒤로 눈부신 자태 감추고, 구름은 단아한 자태 유려하게 만발해 수 없는 새털구름으로 변모한다. 그제야 만족스레 웃어 보인 바람 한 수풀 다채로운 빛깔로 쌓인 낙엽 데미 위로 제 몸 흐드러지게 누이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풀밭 한 켠 길 잃은 물방울들 지친 몸 쉬이는 얕은 웅덩이 위로 다홍치마같이 만발한 단풍 몇 이파리 춤추듯 원 그리며 잔잔한 수면 위 엷은 파문 일으킨다. 이윽고 못에 제 한 몸 맡기고 높은 하늘에 미련 없이 느적느적 호젓하게 침수하는 단풍은 세속한 것들에 그 무엇 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서로 가느다란 손들 나름의 의지랍시고 맞잡으며 가라앉는다. 시간은 속세의 것, 하잘것없는 개념 따위에 목 매이지 않고 밝으면 아침 눈부시면 낮 어둑하면 방인 줄로만 알고 사는 것들에게 관섭이란 다만 사치였다. 마냥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던 들꽃 한 떨기 미약하게 저를 부름에 반반하니 자그마한 얼굴 들이민다. 꽃잎 두어 장 흐들거리는 것 헤치자 시야에 드는 것은 거칠고 두터운 색 껍데기 하나, 속내가 검다 못해 보이지도 않는 못난 씨앗 하나였다. 장난스럽게 나뭇가지와 함께 몸을 흔들며 애꿎은 개암만 툭툭 떨구어 대는 바람의 가볍고 장난스러운 행태를 보아하니 작금의 일은 저것의 탓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미 아늑하던 품을 벗어나 황량하다 못해 휑한 초원 가운데에 떨어져 버린 못난 씨앗 하나, 분명 가련하고 안타까운 운명임에 틀림없다마는 구둣발 한 굽에 스러질 듯 얄팍한 줄기의 들꽃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도울 수 있을까. 꽃술을 포근히 감싼 산수유빛 꽃잎만 끔뻑거리며 가만 지켜볼 뿐이다. 한 계절 두 계절 세 계절 나다 보니 어느덧 짧은 생 마친 들꽃은 흙을 헤쳐 새 뿌리내렸고, 흙더미에 덮인 두려운 씨는 그 사이로 떡잎 한 쌍 틔웠더랬다. 선연한 생명을 품은 진녹색 아닌 물이라도 섞은 듯 탁하고 희미한 연둣빛 싹에 은연중 암암한 걱정을 품던 것도 분명이었으나 어느 소슬한 밤 미처 다 마르지 못해 부슬거리던 진눈깨비에 파묻혔음에도 얻어 죽기는커녕 제 이불마냥 휘감아 덮고 남은 겨울 마저 내는 새순 보고선 들꽃 이내 걱정 거두었다. 한 해, 한 해 들꽃은 짧은 생의 피고 짐을 반복하며 싹의 곁을 지켰고 싹은 그 기약 하나 없는 기다림에 응답이라도 하듯 고목이 될 날만을 기다리며 토양을 집 삼고 햇살을 안주 삼아 벗과 함께 텁텁한 봄비를 들이켰다. 그렇게 들꽃이 동산 하나쯤은 세우고도 남았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유달리도 길고 시리던 겨울이 마침내 가고 인자한 낯을 한 태양이 온 세상 초목과 금수들을 훑으며 그 오랜 잠을 깨웠다. 덩달아 부스스한 몰골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들꽃은 만개한 동산을 보고 꽃잎 치맛자락마냥 나붓거리며 자축하던 중이었다. 못 보던 그늘 하나 머리 위에 드리워져 만발한 들꽃 위 손장난을 치기에 기가 차 한 마디 하려던 참, 한 시도 빼놓지 않고 제 곁 지키던 묘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들꽃 괜스레 생색이라도 부리려는 마냥 작은 고개 쳐들고 나무를 올려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저보다 품이 너르어진 것이 빙긋 웃으며 흐드러지는 들꽃 무더기를 바라보고 있기에 못 이기는 척 어물쩍 눈을 돌리고 덩달아 미소나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