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동부의 큰 섬 키프로스. 경상남도 면적보다 조금 작은 섬이지만, 고대부터 주변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왔다.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오스만튀르크, 영국이 키프로스를 거쳐갔다. 1974년에는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군사적 마찰로 분단되어 오늘까지 이어진다.
그리스, 로마, 오스만의 유적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섬 키프로스는 관광으로 유명하다. 지중해 바다 관광도 빼놓을 수 없다. 라르나카 공항 바로 앞에 가라앉은 배수량 만 톤의 난파선 제노비아호를 탐사하는 코스는 전 세계 스쿠버다이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쉽게도 쉽게 가 볼 수는 없다. 그리스, 튀르키예 간의 군사적 갈등으로 여행자제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관광지이다. 위험하고 거칠지만 알뜰한 여행객들에게는 싸고, 미개척된 원석 같은 여행지다.
이런 잠재력을 믿고, 1998년 키프로스 최초의 저가 항공사 헬리오스 항공이 설립되었다. 2000년 737-400, 2001년 737-800 두 기. 리스한 A319. 2004년에는 737-300을 추가로 도입하였다. 도입시기는 4,5월 봄이다. 여름 관광 성수기 직전에 항공기를 보충해 왔다. 마지막 737-300,등록번호 5B-DBY를 도입할 때는 유난히 서둘렀다. 기체는 크고 작은 고장으로 몸살을 앓았다.
2004년, 12월. 바르샤바에서 출발해 라르나카로 오는 5B-DBY. 하강 중 폭발음이 들린다. 공기가 빠져나가고 산소마스크가 떨어진다.
조종사들은 비상 하강을 해서 급히 고도를 낮춘다. R2 좌석 뒤에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승객 세 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키프로스 항공사고조사위가 사고조사를 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히지 못했다. 정비를 한 이후에도 어딘가에서 계속 공기가 빠져나간다.
2005년 8월 14일. 런던에서 출발해 라르나카로 오는 5B-DBY. R2 도어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문 주위에 성에가 낀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베테랑 정비사 앨런 어윈이 정비를 하며 원인을 살펴본다.
737의 기내 공기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엔진의 공기 흡입구로 빨아들여 기내를 순환한 뒤 배출 밸브를 통해 빠져나간다. 고도가 올라가면 기압이 낮아지므로 밸브로 조여 기압을 올린다.
하강할 때는 밸브를 서서히 열어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막는다.
현대의 항공기는 계획한 순항고도에 따라 자동으로 밸브 조절을 하는 여압장치를 가지고 있다.
정비사 앨런 어윈은 여압 장치를 수동 MAN모드로 바꾸고 기내 기압을 올린다. 기내 기압이 8.25Psi까지 올렸지만 공기가 빠져나가진 않았다.
미 연방항공국 기준은 고도 8000ft에서 10.92psi를 유지하는 것이다.
검사를 마치고 정비일지를 적는다.
“최대 압력 차이에도 도어와 해당 영역 이상 없음. 안전밸브는 8.25psi. 누출이나 이상 소음 없음. Door and local area inspected. NIL defects. Pressure run carried out to max diff. Safety valve operates at 8.25 Δpsi. No leaks or abnormal noises.”
규정된 대로 정비를 마친다. 여압 장치를 수동 모드에서 AUTO 모드로 되돌려 놓진 않았다.
8월 14일 새벽 3시 15분. 5B-DBY는 정비 출고되었다. 항공기는 새벽 6시에 출발하는 헬리오스 522편으로 편성된다. 라르나카 공항을 출발해 아테네를 경유한 후 체코 프라하로 비행을 마칠 계획이다.
기장 한스 위르겐 메르텐 59세. 독일인이다. 동독에서 투폴레프 Tu-134기를 운항하며 경력을 쌓은 베테랑 조종사다. 열악한 소형 항공사에서 오랜 기간 운항하며 산전수전을 겪었다. 보잉 737 기종 비행시간도 충분하다. 취미로 RC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는 타고난 조종사다. 총 비행시간 16,900시간. TU-134A 비행시간 9500시간. B737 비행시간 5500시간.
부기장 팜포스 차랄람부스 51세. 키프로스인. 지상 정비사로 항공업계에 들어섰다. 2000년부터 헬리오스 항공에 입사해 비행한 창업멤버다. 총 비행시간 7,549시간. B737 비행시간 3,991시간.
객실 전방에는 사무장과 승무원 하리스 차랄람부스 Haris Charalambous. 후방에 배치된 승무원 두 명중에는 안드레아스 프로드로무 Andreas Prodromou가 있다. 안드레아스는 오늘 쉬는 날이다. 새벽 3시, 갑작스럽게 인원이 비어 대타로 불려 나왔다. 사내 연애 중인 승무원 하리스와 함께 비행하니 나쁜 일만은 아니다. 안드레아스는 영국에서 취득한 사업용 조종사 면장이 있는 에어라인 파일럿 지망생이다. 승무원으로 일하며 비행훈련비도 벌고 사내연애도 하고 있다. 일이 잘 풀리면 언젠가 737 같은 에어라이너를 조종할 것이다. 일도 사랑도 열심히 하는 다재다능한 안드레아스는 숙련된 스쿠버다이버이기도 했다.
키프로스 국적 103명, 그리스 국적 12명이 승객으로 탑승했다.
조종사들은 이륙준비를 한다. 비행 전 점검절차에는 여압 관련 설정도 있다. 여압모드 선택이 자동으로 되어있는지에 대한 확인도 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수동으로 그냥 놔둔다. 비행시작 전 점검절차에도 여압 설정이 있다.
"공조기, 압력 설정. AIR COND & PRESS ..... SET”
"엔진 블리드 켜짐. Engine bleeds ..... ON”
여압 시스템은 여전히 수동이다. 배출 밸브는 새벽에 정비사가 만진 뒤로 계속 열려있다. 정비사가 손 댄 새벽 3시에는 수동으로 표시된 녹색 등이 밝게 켜져 있었지만, 지금 새벽 시간에는 은은하게 보인다.
8시 7분. 이륙한다. 아무 문제 없이 분당 2500피트 속도로 상승한다. 기장은 순항고도인 34000피트까지 상승을 허가받았다. 10000피트까지는 승객들은 귀가 평소보다 먹먹한 것 외엔 큰 불편을 겪지 않았다.
8시 12분. 12,500피트 고도를 지날 때 객실 기압은 10,000피트 상공 수준이 되었다. 승객들에게 무리가 갈 수 있는 기압이다. 객실 고도 경고 알람이 울린다. 이 경고를 들으면 조종사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즉각 하강해야 한다.
기장은 객실 고도 경고음을 이륙 설정 경고음으로 인지한다. 737 개발 시기는 1960년대 후반, 메모리를 아끼기 위해 동일한 경고음을 돌려썼다. 이륙 설정 경고는 지상에서만 울리고, 객실 고도 경고는 공중에서만 울린다. 중복되지 않으니 같은 경고음을 써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노련한 기장은 혼동하고 말았다. 객실 고도 경고는 듣기 어렵지만, 이륙 설정 경고는 이륙과정에서 흔히 발생한다.
기장은 헬리오스 항공 운항팀에 문의한다.
“이륙 설정 경고음이 울렸습니다.”
“장비 냉각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운항팀은 새벽에 정비했던 어윈을 부른다. 기장은 오토파일럿을 껐다 켜고, 자동 추력장치도 껐다 켜며 이륙 설정 경고에 대처한다. 잘못된 진단을 내렸으니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그 사이 객실 기압은 계속 낮아진다. 조종석 아래 전자장치는 공랭식으로 식히는데, 공기 밀도가 떨어지면 꺼짐 등이 켜진다.
“냉각 표시등은 둘 다 꺼져있습니다.both my equipment cooling lights are off.”
독일인 기장의 영어 표현에 문제가 있다. 냉각 표시등이 꺼진 게 아니라, 냉각 꺼짐 표시등이 켜진 것이다. 정비사는 경고등이 꺼져있다는데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 아닌가.
“정상입니다.”
일을 마친 정비사는 귀가한다.
중요한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순간, 객실에 산소마스크가 떨어진다. 고도 14000피트를 지나면 조종사 개입 없이 자동으로 보호 조치가 이루어진다. 대개는 이 순간 여압장치 이상을 깨닫고 고도를 낮추고 회항한다.
기장은 정비사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 객실에 산소마스크가 떨어졌다는 표시등이 켜졌지만(PASS OXY ON), 기장은 보지 못했다.
마스터 경고등이 켜져 경고해야 하지만, 이미 객실 고도 경고때부터 켜져 있어 새로운 문제를 알려 주지 못한다.
기장과 정비사는 장비냉각 회로 차단에 대해 대화한 후 교신을 끊는다.
정비사와 교신하는 사이 고도 29000피트까지 상승했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의 높이다. 훈련된 산악인만이 버틸 수 있는 고도다. 기장은 조종석뒤 장비냉각 회로차단기를 찾아 일어선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저산소증으로 쓰러진다. 부기장은 조종석에 앉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기체는 이제 비행컴퓨터가 조종해 순항고도 34000피트로 계속 올라간다.
객실 승무원과 승객들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 안내방송을 기다린다. 승객들이 들이마시는 산소는 산소 탱크에서 나오지 않는다. 염소산칼륨, 염소산나트륨을 가열하여 화학적으로 발생시킨다. 산소 탱크보다 가벼운 무게지만, 12분 정도는 너끈히 산소공급을 할 수 있다. 그 12분 사이에 호흡이 가능한 저공으로 하강하면 된다.
그러나 34000피트에 도달한 기체는 내려가지 않고 수평으로 순항할 뿐이다.
누구도 조종사들이 쓰러졌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3년 전, 9/11사태 이후 조종석 문은 굳게 닫혀있다. 산소공급이 멈추고 승객들은 하나둘 정신을 잃는다.
헬리오스 운항팀은 헬리오스 522편과 교신이 안 되자 니코시아 관제센터에 알린다. 레이더 궤적상으로는 아무런 이상 없이 순항하고 있다. 무선 통신이 문제인가? 관제사는 트랜스폰더 코드를 변경하라고 요청한다. 헬리오스 522편의 트랜스폰더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관제사들은 수없이 반복한다.
“헬리오스 522편. 들립니까?”
9시 12분, 아무런 응답 없이 52분이 지났다. 헬리오스 522편은 입력된 경로를 따라 묵묵히 아테네로 다가온다.
이제 리플리 지점. 이곳에서 조종사는 하강 보고를 하고, 하강이 시작된다. 그러나 보고도 없고, 하강도 하지 않는다. 조종사가 직접 조종하지 않는 이상 하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헬리오스 522편은 순항고도 34000피트를 유지하며 목적지 아테네에 이른다.
관제센터는 공군에 알린다. 헬리오스 522편은 34000피트 상공에서 30L 활주로에 정렬한다.
그대로 활주로를 지나며, 표준 접근실패 절차대로 케아 섬(KEA) VOR로 향한다. 이제 모든 비행계획이 수행되었다. 헬리오스 522편은 홀딩패턴을 그리며 선회한다.
10시 23분. 한 번, 두 번, 세 번… 모두 다섯 번을 그리고, 여섯 번째 홀딩을 시작할 때, 그리스 공군 F-16 두 기가 현장에 도착했다.
외관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F-16은 더 가까이 접근해 기내 상황을 살핀다. 객실창으로 산소마스크가 내려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
F-16이 바싹 다가왔음에도 승객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조종석을 살핀다. 기장석은 비어있고, 부기장석에는 누군가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항공기는 유령선이다.
이 유령 항공기의 추락은 정해져 있다. 상황에 따라 F-16 조종사가 격추를 해야 할지 모른다.
10시 40분. 조종석 문에서 접근 요청 벨이 울린다. 누군가 조종석에 들어오려 한다. 20초가 지난 후 승무원 복장의 남성이 산소통을 든 채 조종석으로 들어왔다.
F-16 조종사들은 충격을 받는다. 남자는 기장석에 앉아 조종간을 잡는다. 후방 객실 승무원 안드레아스 프로드로무다. 세스나를 조종해본 경험으로 737-300을 조종할 수 있을까. 완전한 착륙까지는 어렵겠지만, 적당한 착륙 장소를 찾아 불시착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헬리오스 522편은 열 번째 홀딩 패턴을 그린다. 연료가 거진 소모되었다. 안드레아스가 조종석에 들어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왼쪽 엔진이 꺼진다.
이제 연료가 떨어진 737-300을 조종하는 문제로 바뀐다. 한쪽 엔진이 꺼진 헬리오스 522편은 고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강한다.
안드레아스는 조종간을 붙잡고 조작을 한다. 지금까지 몰아본 적 없는 거대한 글라이더다. 그러나 안드레아스의 산소 탱크도 어느새 비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헬리오스 522편입니다, 아테네. MAYDAY, MAYDAY, MAYDAY, Helios Airways Flight 522 Athens..."
“메이데이, 메이데이. MAYDAY, MAYDAY."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헬리오스 522편입니다, 아테네. MAYDAY, MAYDAY, MAYDAY, Helios Airways Flight 522 Athens..."
목소리는 저산소증으로 흐리멍덩하다. 안드레아스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교신 주파수도 맞추지 않아, 조난신호는 어디에도 전달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조난신호를 보내는 것뿐이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MAYDAY, MAYDAY."
헬리오스 522편의 하강속도가 빨라진다. 왼쪽으로 선회하다가, 오른쪽 엔진까지 꺼졌다. 이제 고도는 7,000피트. 낮은 고도로 내려와 호흡이 가능하게 되었다.
정신이 맑아졌는지 안드레아스가 전투기에 처음으로 수신호를 보낸다. F-16 조종사는 공항까지 안내해 주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연료 부족으로 엔진이 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만을 전한다. 기체는 계속 하강한다. 하강하며 가속을 거듭한 기체의 속도는 시속 640km. 정상 착륙 속도의 세 배다. 안드레아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헬리오스 522편은 아테네 북동쪽 그라마티코 언덕에 충돌하며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오른다.
언덕 위까지 올라 잠시 떠오른 후 다시 미끄러져 내려온다. 650미터를 지나 완전히 멈추었을 때는 파편만이 남아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탑승자 121명 모두 사망하였다.
사고조사팀은 파편들을 그러모아 분석한다. 사망자 부검 결과, 안타깝게도 충돌 순간까지 의식은 없었지만 대부분 생존했음이 밝혀졌다. 유령 비행기가 아니라, 잠든 비행기였다.
여압 모드 선택 스위치는 수동으로 맞춰져 있다. 시스템 메모리를 확인해 보니, 지난 74회의 비행 모두 여압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 어딘가 새고 있으니, 배출 밸브를 정상보다 조금 더 잠가 여압을 맞추고 있었다. 마지막 비행에서는 어떤 오류도 남지 않았다. 수동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조사 면담에서 정비사는 수동으로 맞췄다고 증언하다, 자동으로 바꾸었다고 번복한다. 그러나 사고조사는 수사로 바뀐다. 사고조사 결과가 개인을 심판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리스 법원은 정비사에게 121건의 살인 혐의를 씌운다. 해고된 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으며 긴 법정투쟁을 하게 되었다.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였다.
스위치 하나를 수동으로 놔뒀다고, 121명을 살해한 범죄자로 봐야 할까. 객실 고도 경고를 착각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여압장치가 꺼진 채 고도를 올리는 사고도 흔히 일어난다. 대개는 그저 해프닝으로 몇천만 원 수준의 벌금을 내고 끝난다. 원인을 파악해야 할 순간, 운 나쁘게도 조종사들은 다른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산소증은 서서히 스며들 듯 진행되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는 이미 판단 능력이 상실된다.
만약, 안드레아스가 좀 더 빨리 조종석에 진입해 조종사를 깨웠으면 어땠을까. 왜 안드레아스는 연료가 다 떨어진 후에야 조종석에 들어갔을까.
3년 전, 9/11 이후 조종석 문은 굳게 잠겨있다. 들어가려면 비상 코드가 필요하다. 이 코드는 전방에 있는 사무장이 가지고 있었다. 사무장이 의식을 잃었으니, 그 자리에 함께 한 연인 하리스 또한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안드레아스는 쓰러진 연인 옆에서 비상코드를 찾아야 했다. 이 모든 일을 저산소증으로 흐려진 정신으로 해야 했다. 모두가 쓰러진 비행기에서 혼자 남아 외롭게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