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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epression

우울증에 걸린 서른살 여자 01.

제 글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by 클레어

황당하다.

수년을 잠적하다 새롭게 쓰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그간 길었던 얘기를 압축하여 쓰는 건 집어치우자.

어차피 아무도 관심 없으니까.


20대의 끝에 걸린 병마가 끝내 서른이 되어도 낫지 않았다.

서른이 되면 더 건강하게 진짜 어른으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린 날을 생각하며

지금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 비참한 내가 있을 뿐이다.

썩어가는 직장생활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겠노라 다짐한 것은 이미 풋내기 같은 생각이 되어버린지 오래고 매일매일이 투병 끝 흙으로 돌아가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1.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코로나 기간에 생기게 된 애니메이션 보는 취미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무라 타쿠야의 모습을 담은 '롱베케이션'이라는 드라마를 보게되며 나는 일본의 감성에 푹 빠졌다.

그래서 나는 관련 회사에 취업을 했고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며 일본이라는 세상에서 언젠가는 일을 해보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병마가 아직 몸을 차지 하기 전이었던 나는 한국인들끼리 있는 회의 자리에서도 당황하면 얼굴이 쉽게 빨개지고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뱉을 수 없었다. 모두가 나를 아무 도움 안 돼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아 어느순간부터 나는 회의 시간에 한 마디도 제대로 뱉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2. 8살 어린 남자와의 연애

그와중에 8살 어린 남자와 만나게 되었다.

우린 어느 바에서 만났고 비슷한 일본에 대한 취미, 취향을 나누며 가까워졌다.


그는 일본어와 일본 음악에 박학하고 무엇보다 가장 나를 이끌리게 했던 것은 그의 무모함과 어림에서 오는 패기였다.

그당시에도 나는 20대 후반에 와있는 내 자신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만을 할 뿐인 나의 모습을 재미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는 나를 좋아했다. 매 평일 저녁 나를 보러왔고 그는 내년이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할 예정이었지만 우리는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국경을 극복하기 위해 매번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되풀이 했다.


그 사람은 생기와 무모함과 젊음을 흘러넘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 나는 그저 그의 말과 약속들에 빨려들어갔다.

우리의 약속의 한 페이지에 있었던 '내가 일본에서 자리를 잡는 것' 을 위해 나는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는 안 했다. 너무 바빴다. 연애도 해야했고 일도 해야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한 달 뒤 나는 그를 보러 도쿄 여행을 계획해놓았던 터라 조금은 이별의 아픔이 상쇄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여행을 가기 3일 전 우리는 헤어졌다.

작은 방안에 흙과 먼지와 피로 이루어진 내가 존재했고 나는 텅 비었다.


스물 아홉에도 이런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니. 누굴 탓하리오.


그때 몸속에 꿈틀대던 병마가 얼굴을 내밀더니 몸속에 한번 돈다.

그리고 이내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내 꿈을 집어삼키더니 이내 지금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3. 2025년

무엇 때문이었을까?

시간은 흘렀고, 2월 이십 며칠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언제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멈출까 생각하다가

이내 술기운 때문에 잠이 든다. 전기장판도 한 몫했다.

꿈에서는 지금 연인과 칼로 서로를 죽이려는 한 바탕 싸움도 일어났다.

이내 한 시간쯤 흘렀을까 눈을 떴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서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토할 것 같았다. 술이 필요했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술이 필요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어떤 사람도 병원도 나를 고쳐줄 수 없다는 생각에 닿았고

마지막 발악으로 글을 다시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도 얼마 안가겠지 싶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언젠가 이 글을 읽고 얼마나 나를 한심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상상해보다 이내 드는 생각은, 결국 나는 이짓도 그만 두겠지.

그런데 이 거지같은 삶을 어떻게든 이어나가보고 싶으니까 쉬프트 키가 빠져버린 노트북으로 글을 한자 한자 써내려가 본다.

아무도 고쳐줄 수 없는 병마에 걸린 나는 어떻게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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