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 R - C

2024년 12월 3일 이후 드러난 우리 사회의 수익과 비용

by 까마귀

(1) 이윤은 수익에서 비용을 뺀 값이다


이윤(Profit)은 수익(Revenue)에서 비용(Cost)을 뺀 값이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민간 경제주체는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잘 나가는 동네 치킨집 사장은 치킨 한 마리를 파는 데 들어가는 직접적인 비용(닭, 양념, 기름 등)과 간접적인 비용(튀김기, 임대료, 관리비, 인건비 등)을 주민등록번호처럼 외우고 있고,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 삼성전자와 같이 잘 나가는 대기업 CFO들도 마찬가지다. 비용을 줄이면 이윤이 커지고, 이윤이 커져야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에게 더 많은 배당을 줄 수 있고, 임직원들이 보너스를 요구할 수 있다. 이는 관련된 사람들이 ‘더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윤극대화를 위해서는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수익을 늘리는 것이다. 치킨집 사장이 플랜카드를 걸고, 고객 프로모션을 하고, 리뷰이벤트를 하고, 고객에게 더 맛있는 치킨을 제공하기 위해 레시피를 연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삼성전자가 신제품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활동에 수조원을 투자하고, 수요조사를 위해 고객을 심층면접하고, 매년 CES에서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비용극소화와 수익극대화, 이 두 가지 요소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사장은 그 결과로 다른 치킨집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갈 수 있게 되고, 그 덕분에 사장 개인은 더욱 윤택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삼성전자의 경우 대규모 상장기업이기 때문에 주주, 채권자, 임직원, 정부 등 더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그 수혜를 입게 된다.


(2) 대한민국은 수익극대화에 치중해 왔다


이윤극대화를 위해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해당한다. 이 상식을 대한민국 사회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현대 대한민국은 아주 젊은 나라이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 약 80년밖에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그 짧은 기간 동안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 역시 상식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그동안 ‘발전’이란 무엇을 의미해 왔을까? 이윤극대화보다는 ‘회계적 수익극대화’에 가까운 듯하다. ‘발전’이란 말과 함께 등장하는 단어는 보통 ‘1인당GDP 성장’, ‘반도체, 조선’, ‘수출규모’ 등이다. 다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이다. 80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가 주요 과제로 내세운 것은 이러한 수치들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고, 그 덕에 밥을 굶는 사람들의 비율은 한국전쟁 직후에 비해 엄청나게 감소할 수 있었다.

외연 확장에 따라 어느 정도는 낙수효과가 발생한 셈이다. 백두산 정상에 있는 주먹만한 그릇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산 초입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 정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만약 당신이 산 초입에 있던 사람이고, 여태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면,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게 된 현실에 얼마나 감사함을 느끼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일이고, 분명히 칭찬할 일이다. 이를 건조하게 표현하면, 굶는 게 일상이었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익을 키움으로써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즉 사회 전체의 이윤이 늘어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우리가 간과한 것은 “원칙”이라는 비용이다: 힘에 의한 질서와 원칙에 의한 질서


자, 이제는 이윤극대화의 다른 측면인 비용극소화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여태까지 공장을 짓고, 기업을 키우고,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수익을 키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비용을 지불했을까?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전태일 의사의 분신자살으로 이어진 노동자 착취를 들 수 있다. 사회/정치적인 의미에서 그동안 크게 간과된,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된 비용은 바로 원칙의 상실이다. 원칙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을 한 대 때리면 나도 한 대 맞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상식이다. 다만 개인적인 응징이 보편화되면 장기적인 안전이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응징을 개인이 아닌 사회에 맡긴 것뿐이다.

민주화 이전의 대한민국 사회에도 “질서”는 분명히 존재했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미군이 정하는 대로 움직였고, 이승만~전두환 정부 때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명하는 대로 움직였다. 약 50년 간 대한민국을 규정한 것은 힘에 의한 질서였다. 민주공화국 건설을 추구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며 일본에 부역한 자들은 광복 이후 미군정의 통치상 필요에 따라 새로운 질서의 중추로 옷을 갈아입었으며, 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이들 부역자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한 몇몇에 의해 이따금씩 공론의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 이외에는 여전히 질서의 중추로 기능해 왔다. 신생아 대한민국이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이마에 불결한 교훈이 새겨진 셈이다. 권력자가 누구든 힘을 따라가는 것이 질서이며, 힘에 거역하지 않는 이상 먹고 살 수는 있다는 교훈이.

민주제 사회에서 질서는 명확한 원칙과 그에 대한 준수를 통해 달성된다. 힘에 의한 질서는 일견 원칙에 의한 질서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둘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개인이 취해야 할 행동이 달라지지만, 후자는 권력의 위치와 무관한 선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원칙이 굳건한 사회는 선택의 일관성을 가능케 하며, 이는 곧 예측가능성을 의미한다. 남을 때리면 나도 한 대 얻어맞는다는 사실이 자명하다면 남을 때리는 행동이 선호되지 않을 것이고, 사회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쪽으로 변화하게 된다. 대화, 타협,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전적 경쟁이 폭력의 수단적 지위를 대체하고, 이는 곧 진정한 의미의 능력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타인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곳에서는 타협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건전한 경쟁을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이들, 다시 말해 능력을 가진 이들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향유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힘에 의한 질서는 원칙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는 폭력을 일상화하고, 사회의 예측가능성을 저해한다. 그에 따른 비용은 원칙에 의한 질서를 억압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 전반의 능력 말살이다.


(4) 그들은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다: (주)대한민국의 대리인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오랜 기간 동안 오용된 단어는 “엘리트”라는 단어이다. 누군가를 엘리트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자가 최상위급의 능력을 갖췄으며, 그가 향유하는 정치적, 경제적 이득은 그의 뛰어난 능력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한 것은 “그가 어떠한 질서 안에서 엘리트인가?”의 문제이다. 대한민국은 80년의 역사 중 ‘87년 개헌까지 약 40년 동안 명목, 실질적인 의미 모두에서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1987년에 우리는 명목상 원칙의 지배를 확립했으며, 이후 40년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원칙의 지배를 뿌리내리는 과정이었다.

힘에 의한 질서 하에서 높이 올라간 이들이,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같은 수준의 이득을 누릴 수 있을까? 이들은 소수가 가진 권력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능력의 척도였던 사회에서 성공했던 자들이다. 이 자들이 과연 불특정 다수를 설득해야 하고, 자신의 위치가 아닌 자신의 결과로 평가받는 원칙 기반 사회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원칙에 의한 질서가 확립된 사회에서 이들은 엘리트가 될 수 없다. 과거의 엘리트들은 현재의 기준에서 무언가를 “잘”하는 이들이 아니다. 이들이 엘리트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잃지 않은 과거의 위치 때문이지, 원칙 기반 사회의 관점에서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젊기 때문에 두 가지 질서가 공존한다. 실은 힘에 의한 질서가 더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나긴 한반도 왕조의 역사에서 보면 원칙에 의한 질서는 고작 40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의 엘리트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힘이 지나치게 강한 무능력자들”에 가깝다. 능력 없고, 권력은 충만한 엘리트들은 온 힘을 다해 원칙에 의한 질서에 저항한다. 이들이 가진 힘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이는 사회에 엄청나게 큰 상흔을 남긴다. 다음 예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이 하나의 거대한 반도체 제조기업이고, 우리는 (주)대한민국의 주주라고 해 보자. (주)대한민국은 창립 후 줄곧 제조공정 A를 통해 반도체를 생산해 왔다. 공장, 설비, 노동자 모두 공정A에 요구되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 갑자기 네덜란드에서 혁신적인 기술이 고안되어, 제조공정B로 바꾸지 않으면 경쟁우위를 상실할 위험에 놓였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경영진은 비효율적인 공정A를 고집하고 있고, 그 결과 주가는 폭락 중이다.

주주인 우리는 다음 주주총회에서 무엇을 요구해야 하겠는가? 당장 공정B로 바꾸고, 공정A에 투입되는 생산요소를 처분하는 안을 밀어붙여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칙에 해당하는 상법상 기업의 주인은 자본을 제공한 주주이고, 그 외 경영진, 임직원은 모두 이해관계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리인에 불과한 이들이 공정A에만 전문성이 있든지, 공정A에 투입되는 설비를 생산하는 기업과 이해관계가 있든지 등 갖은 이해관계 때문에 공정B 도입을 거부한다면 (주)대한민국은 시름시름 앓다가 망할 수밖에 없다. 향후 몇 년간 경쟁우위 상실로 인해 수익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설비와 무능한 임직원 때문에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감가상각비와 인건비만 계속해서 발생하여 비용은 그대로일 것이다. 이윤은 계속해서 떨어져서 상장기업 기준 밑으로 떨어져 (주)대한민국은 결국 상장폐지되고, 청산에 들어간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주인 우리에게 떠넘겨진다.]


존폐의 위기에 직면한 (주)대한민국에서 주주, 경영진×임직원, 제조공정A와 B가 각각 무엇에 대응하는지 각자 고민해 보자.


(5) 냉정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대한민국의 주주


나는 이런 일이 벌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국가의 주주인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익을 키우기 위해서는 현명해야 하며,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한다. 새로운 공정을 도입하는 데 적극 목소리를 내야 하고, 비용만 불리는 자칭 엘리트들을 즉시 해고하고 구 설비를 처분해야 한다.

만약 이들의 저항이 너무나도 거세서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효율적인 운영과 안정적인 이윤 확보가 가능한 새로운 사업분야를 가능한 빨리 찾아서 투자해야 한다. 새로운 분야에는 힘에 의한 질서가 침투할 여지가 없어야 하며, 그 이윤은 성장동력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주인인 주주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생산공정을 굳이 처분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발악이 주주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그 비중을 미미하게 만들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수익 증대와 비용 감소, 두 가지 모두 해야 한다. 만약 “지금 우리의 경쟁자들은 공정 B,C,D까지 도입하고 있는 상황인데 한가하게 공정A를 처분하는 데 집착할 때냐”고 반박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자. 그들은 기존 공정과 그 이해관계자들이 얼마나 이윤을 깎아먹는지를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윤=수익이 아니라, 이윤=수익-비용이라는 점조차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는 자들이다. 모른다면 순수하고 무능한 것이며, 외면한다면 무능한 기존 경영진과 결탁한 악한 자들이다. 어느 쪽이든 경영진으로서 적절하지 않다.

대한민국이 기업이라면 주주는 국민이고, 경영진은 정치인 및 공직자이다. 주주는 주인이고, 경영진은 대리인이다. 수익을 키우고 비용을 줄이면 이윤이 늘고, 이윤이 장기적으로 늘면 주가가 올라간다. 주가가 올라가면 주주는 부유해진다. 대리인이 주주의 자원을 가지고 주인의 부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 해임해야 한다. 우리는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