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1부 Ch2: The Spirit of Capitalism을 읽고

by 까마귀


Capitalistic Class Consciousness


1. 독후

<Part 1, Chapter 2: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1) 자본주의 정신이 벤자민 프랭클린식 윤리의 형태를 띠는 이유는 무엇인가?(정말 금욕적 이윤추구와 소명의식이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자본주의 정신이 다른 종교나 사상적 전통 중 유독 개신교 정신과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베버가 지목한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 구성요소들은 개신교 교리에만 존재하는가?)


대신 베버는 다음의 질문을 던지고, 이를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1) 자본주의 정신을 담은 표현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으며, 여기서 어떤 윤리관을 읽어낼 수 있는가?

(2) 이 관념은 노동자-사업가의 맥락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가?

(3) 이 관념의 기원은 무엇인가? 물적 토대인가? 물적 토대가 아니라면 사상적 뿌리가 있는가? 사상적뿌리라면 그것이 합리주의적 전통이라는 의견은 타당한가?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실체와 그 기원은 탐구를 거친 후에야 사후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성질의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는 이 장의 초반에 자본주의 윤리관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을 제시한다. 그는 구태여 자본주의 정신과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 추정컨대 이는 의도된 서술방식일 것이다. 사전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서도, 베버가 앞으로 밝히려 하는 관념의 실체에 대한 적절한 예시를 미리 제공함으로써 그 맥락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일관성 측면에서 이 전략은 성공적이다. 실제로 베버는 '소명의식에 따른 금욕적 이윤추구와 부의 축적'이라는, 일견 모순적이지만 내적 합리성을 지닌 관념을 제시함으로써 이 관념이 노동자와 사업가 차원에서 작용한 양상, 관념의 기원으로서 물적 토대를 지목하는 것이 잘못된 이유 등으로 이어지는 추후 논의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뿌리에 위치해야하는 근거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 근거가 다른 챕터에 밝혀져 있을 수 있으나, 이번 챕터에서는 베버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선정한 프랭클린의 예시가 사실상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정의로 기능한다. 즉 베버가 그의 의도대로 자본주의 정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2. 감

그러나, 출발점과 구분이 불명확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도착점 - 그가 제시한 벤자민 프랭클린식 윤리, 이를 내면화하여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노동자와 이상적인 기업가의 표상,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요소로 지적된 비합리성 - 은 현대 자본주의 교리의 충실한 신도인 경영대생에게 그의 신앙을 의심케 하기 충분했다.


탐욕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동기로 움직이는, 우리의 금욕적이고 명민한 '이상적인 기업가'와, 어떤일을 하든 소명의식을 갖고 주어진 임무에 성실히 임하는 '근면한 노동자'의 표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물론 1905 년 당시 베버의 관점에서 이는 단지 '표상'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이 쓰인 시점에서 120 년이 지난 지금도 위대한 (미국의) 기업가로 기억되는 앤드류 카네기, 존 로커펠러 등은 당대에는'시대의 거인'으로 칭하기에 더더욱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상적인 기업가'에 대한베버의 묘사는 상업에 종사하는 다종다양한 직업인 중 하나라기보다는 성직자에 가까운 모습이다.


위대한 기업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그렇게 얻은 이윤을 사업에 재투자하며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영위한다. 이 '최초의 혁신가'들은 온갖 미움과 모함을 받지만, 강인한 의지와자제력으로 이를 감내하며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이렇게 일궈낸 성공은 과시가 아닌 겸손의세례를 받으며, 그들은 화려한 소비도, 남들의 인정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일을 잘 해냈다는비합리적인 감각"을 느끼며 다음 성공을 찾아 나선다.


노동자들은 조금 더 후천적인 노력을 요구했지만, 이들 역시 결국에는 소명의식과 의무감으로 무장한 충실한 조력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고용주들은 도급율, 즉 임금을 단순히 높이거나 낮추는것으로는 노동자의 전통주의적 관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소득극대화를 위해 움직이는 기계보다는 더 복잡한 존재들이었고,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려면 단순한 임금조정이나 고용주의 감독만으로는 부족했다. 홀스타인 소가 오랜 교배와 선발 끝에 탄생했듯, 소명의식의 내면화는 고용주의 의도적 선별과 종교적 양육, 그리고 사회적 규범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달성할 수 있었다.


위대한 기업가들과 그들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성실한 노동자들에 대한 베버의 분석은, 당시에는 현상에 충실한 기록이었을 수 있으나 이후 120 년 동안 여러 변형을 거쳐 신화가 되었다. 기업가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Jr.', '2세, 3세'라는 호칭이 붙었고,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만나는이 후손들이 전설 속의 그 인물들이 맞나 하고 갸우뚱하곤 한다.


하지만 신화는 강력하기에 우리는 은연중에 "부자들이 실제로는 검소하고 겸손하며 예의 바르고,'없이 자란 사람들'은 경박하고 나태하다"는 의식을 갖고 산다. 마찬가지로, 소명의식이라 부를 만한것의 내면화는 때때로 부의 축적이라는 지상목표와 상충하곤 하지만, 그런대로 우리의 의식체계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뭘 하든 충실히, 후회 없이 해라"라는 메세지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는 환경미화원들은 직업의식의 화신이다. 동시에 우리는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지 않을 수 있는사람이 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친다.


끝으로 "세속적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목적을 위해 달리는,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으로 지목한, 자본주의 정신의 비합리성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인간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2026 년의 우리는 마치 1990 년대 중반에 기업이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라는 '전통주의적' 관성을 탈출하여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단일한 목표를 갖게 됐듯, 부의 축적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추구하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자 상황에 맞는 내적 합리적인 행위를 하는 경제주체이다. 하지만 이 목적의 비합리성을 본능적으로 느끼기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정점에 올랐다가 돈의 허무함을 깨닫거나 삶의 의미를 잃고 나서야 목적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이야기가 끝나면 "저런 배부른 얘기는 돈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합리적으로 비합리적인 일상에 복귀한다. 우리는 ‘부의 크기’라는 일률적인 기준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통해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자신의 위치를 평가하고 더 높은 곳을 갈망한다. 이처럼 비합리적인 목적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이 집단적 연대가 아니라 개별적 상승의 경쟁으로 귀결되는 상태는 하나의 독특한 의식 형태로 작동한다. 자본주의적 계급의식이라 부를 만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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