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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도 꿈이 있었다

미야 작가님 숙제

by 윤슬 걷다

최근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언니는 경기도 어딘가의 대형 카페로 엄마와 나를 데려갔다.
실내는 멋진 꽃들로 인테리어 되어 있어, 마치 어느 부잣집의 화려한 정원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와 커피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자 언니는 우리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번 생과 다르게 하고 싶은 게 뭐야?”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87세의 노인에게 그런 상상은 쓰잘데기 없는 소리로 치부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는 하실 말씀이 너무 많았다.

첫째, 네 아빠는 안 만나고 싶다.
둘째, 학교를 다니며 배움이 긴 사람이 되고 싶다.
셋째, 막내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보고 싶다.


---

1939년생인 엄마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셨다.
그 시절 시골 풍경은, 농사일은 많았으나 일본의 수탈로 인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우리나라는 독립을 맞았지만
곧 6.25 전쟁이 터졌고, 그때 엄마는 여섯 살이었다.
식민지, 전쟁, 분단…
한국 현대사의 숨 가쁜 비극 속에 엄마의 어린 시절이 놓여 있었다.

이런 시국이었으니 누가 교육에 신경을 썼겠는가.
가난한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신 엄마는 자연스레 배움의 길 대신 노동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

어린 시절, 학교를 길게 다니지 못한 것이
엄마에게는 늘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늦게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으셨다.

젊어서 시드니에 오실 수 있었을 때,
우리 집에 오시면 교민 신문과 잡지를 펼쳐 들고 정말 열심히 읽으셨다.
문화센터에도 꾸준히 다니셨다.
국선도, 영어, 컴퓨터, 장구…

물론 영어와 컴퓨터 수업은 너무 어렵다며 중간에 포기하시기도 했지만,
‘알고 싶다’는 지적인 호기심은 늘 살아 있었다.
엄마는 최근까지도 아침마다 성경 필사를 하셨다.
글자를 눌러쓰는 그 순간이 엄마에게는 배움이자 기도였던 것 같다.


---

엄마의 이런 호기심은 나에게로 그대로 물려졌다.
나는 늘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을 꿈꾼다.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엄마의 못다 한 꿈을 나는 어떻게 이뤄드릴 수 있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해보면 위로가 될까.

“엄마 대신 내가 요즘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있어요.”

아니면
다음 생엔 좀 더 좋은 시절에 태어나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잡으시길 기도해야 할까.


---

나에게도 못다 이룬 꿈이 있다면
나의 자식은 그것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없다!

그저 엄마가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고,
엄마의 빼앗긴 꿈을 함께 안타까워하며,
그 어려운 시대를 견뎌낸 엄마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낼 수 있을 뿐이다.


---

나는 오래도록
엄마는 그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모든 걸 자식에게 양보하고도,
그마저 고마워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또 자식을 독립시키고 나니 알겠다.
항상 주기만 하는 게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고,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며 누린 모든 혜택이
그녀의 꿈의 희생이었다는 걸.

엄마,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다 (2)

***이 글은 글빵연구소 미아 작가님의 섬세한 피드백 덕분에 한층 더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시선과 조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근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언니는 경기도 어딘가의 대형 카페로 엄마와 나를 데려갔다.

실내는 멋진 꽃들로 인테리어 되어 있어, 마치 어느 부잣집의 화려한 정원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와 커피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자 언니는 우리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번 생과 다르게 하고 싶은 게 뭐야?”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87세의 노인에게 그런 상상은 쓰잘데기 없는 소리로 치부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놀랍게도 엄마는 하실 말씀이 너무 많았고, 나의 놀라움은 곧 엄마를 너무 몰랐구나 하는 깨달음과 묵직한 미안함으로 이어졌다.


첫째, 네 아빠는 안 만나고 싶다.

둘째, 학교를 다니며 배움이 긴 사람이 되고 싶다.

셋째, 막내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보고 싶다.



---


1939년생인 엄마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셨다.

그 시절 시골 풍경은, 농사일은 많았으나 일본의 수탈로 인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우리나라는 독립을 맞았지만

곧 6.25 전쟁이 터졌고, 그때 엄마는 여섯 살이었다.

식민지, 전쟁, 분단…

한국 현대사의 숨 가쁜 비극 속에 엄마의 어린 시절이 놓여 있었다.


이런 시국이었으니 누가 교육에 신경을 썼겠는가.

가난한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신 엄마는 자연스레 배움의 길 대신 노동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


어린 시절 학교를 길게 다니지 못한 것은

엄마에게 늘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늦게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으셨다.


젊어서 시드니에 오실 수 있었을 때,

나는 아버지를 위해 교민 신문과 잡지를 가져다 드리곤 했다.

그런데 막상 신문과 잡지를 읽는 건 늘 엄마였다.

교민 신문을 펼쳐 들고 열심히 읽으시며, 간간이 교민 사회 소식에 대해 질문하시기도 했다.


평소엔 문화센터에도 꾸준히 다니셨다.

국선도, 영어, 컴퓨터, 장구…


물론 영어와 컴퓨터 수업은 너무 어렵다며 중간에 포기하시기도 했지만,

‘알고 싶다’는 지적인 호기심은 늘 살아 있었다.

엄마는 최근까지도 아침마다 성경을 필사하셨다.

글자를 눌러쓰는 그 순간이, 엄마에게는 배움이자 기도였던 것 같다.



---


엄마의 이런 호기심은 나에게로 고스란히 물려졌다.

나는 늘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을 꿈꾼다.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아마도 이건 나의 꿈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못다 이룬 꿈이 씨앗이 되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엄마의 꿈을 나는 어떻게 이뤄드릴 수 있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해보면 위로가 될까.


“엄마 대신 내가 요즘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있어요.”


아니면,

다음 생엔 좀 더 좋은 시절에 태어나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잡으시길 기도해야 할까.



---


나에게도 못다 이룬 꿈이 있다면,

나의 자식은 그것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없다.


그저 엄마가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고,

엄마의 빼앗긴 꿈을 함께 안타까워하며,

그 어려운 시대를 견뎌낸 엄마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낼 수 있을 뿐이다.



---


나는 오래도록

엄마는 그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자식들 잘 자라기를 바랄 뿐, 엄마 자신의 꿈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 늘 그렇게 희생하며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또 자식을 독립시키고 나니 알겠다.

항상 희생하고 주기만 하는 게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고,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며 누린 모든 혜택이

그녀의 꿈의 조각들이었다는 걸.


엄마,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엄마의 꿈이, 하루하루 제 삶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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