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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Mar 06. 2022

우리 아이는 대체 뭐가 문제인가요?

Hoya의 ‘나의 선생님’ (2)

끔찍했던 그 해, 2010년

2010년은 내 인생에서, 아마 남편의 인생에서도, 최악의 한 해로 기억한다.


미국에 온 지 이미 5년 차.

남편은 박사 학위 막바지라 학위 논문 준비와 취업 준비를 동시에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존 작업을 잘 마무리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스트레스받는 일인데, 새 출발도 함께 준비해야 하니 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새로 온 이메일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잠드는 일을 하루 밤에 최소한 서너 번씩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5살 된 아들의 생떼는 이미 우리 부부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전부터 훈육에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5살 전후가 최악이었다. 그 어떤 설득도, 훈육 방법도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상황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디에서건 주저앉아 악을 쓰며 울어댔다. 더 심해지면 바닥에 뒤통수를 쿵쿵 찧어대며 울었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도, 행동도 먹히지 않았다.

유치원에서도 이미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선생님의 통제를 거부하는 일도 빈번했고, 좋아하는 장난감은 절대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낮잠 시간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녀 다른 아이들의 낮잠을 방해했고, 선생님이 다른 액티비티를 해야 하니 저쪽으로 가자고 잡아당기면 화를 내며 때렸다. 당연히 또래 아이들도 걸핏하면 때렸고 물고 발로 차 댔다.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이야기하고, 울며 사정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5살이 되기 전, 우리는 이미 유치원에서 아이가 통제가 안 되니 나가 달라는 요청을 두 번이나 받았다. 요청을 가장한, 실은 쫓겨난 것이다. 좋은 유치원이면 좀 다를까 싶어 비싸고 좋은 곳으로 옮겨 봤지만 이곳에서는 그나마 한 달도 못 버텼다. 자기들이 아이에게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으니 나가 달라는 말에 가슴을 치며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미 그전부터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왜 오늘은 유치원에 안 가냐'라고 아이가 물었을 때 '우리 거기서 쫓겨났어'라고 말해 줄 용기가 우리 부부에겐 없었다. 쫓겨날 때마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사고 두어 달 가량 있다 들어왔다.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도 힘들어하는 우리 아이. 그 어떤 캠프도, 유치원도, 30분짜리 유아용 프로그램에서도 우리 아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설령 받아주는 곳이 있어 간신히 유치원을 보내고 있어도 아이를 데리러 오라는 유치원 교사의 전화를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받았다. 내가 둘째를 안고 유치원으로 뛰어가던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남편이 랩 미팅을 하다가도, 실험을 하다가도 아이를 데리러 가든지 해야만 했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우리 부부는 심장이 두근거려 터질 지경이었다. 아이를 달래 유치원에 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보내고 나서도 우리 둘 다 24시간 대기조처럼 언제든 아이를 데리러 갈 만반의 테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무사히 공부를 마친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우리는 우리 아이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은 6개월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왔다. 미국으로 오기 한 달 전, 약 2주 동안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떨어지지 않아 응급실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의사는 백혈구 수치가 높은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BCG 주사의 부작용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원인을 모르니 약도 쓸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을 비롯해 온 식구들이 돌아가며 애 옆을 지켰다가 열이 오르면 열을 떨어뜨리고 애를 재우느라 애를 먹었다. 2005년 7월 마지막 두 주는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는 악몽이었다. 아니 아예 블랙아웃이다.

그리고 2 후에 미국으로 왔다. 아이는 주변 식구들이  명씩 없어지는 것에 불안함을 느꼈던  같다. 우리를 미국까지 데려다주셨던 시어머니까지 한국으로 가시고 엄마와 아빠만 남자, 아이는 잠시라도 내가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불안함에 어쩔  몰라했다. 원래부터 잠이 없던 아이는 18개월이 되자 아예 낮잠을 자지 않았다. 대신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깨지 않고 잤는데, 가뜩이나 저질 체력인 나는 낮잠 시간이 없으니  틈이 없었다. 주변에 비슷한 또래조차 없어 데이케어에 가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나랑만 있어야 했다.


우리 아이는 또래들에 비해 말이 느리고 발달이 느렸다. 행동도 빠르지 못했다. 그런데 기억력이 엄청 좋았다. 글자를 배우기 전에 이미 내가 반복해 읽어주는 책을 외워 읽었다. 글자를 터득하고, 이 글자들을 조합해 읽는 것 자체는 순식간에 배웠다. 영어뿐만 아니라 한글도 그랬다. 친구의 권유로 그 친구가 일하는 한글학교에 보냈더니 순식간에 읽고, 말하고, 썼다. 다만 이것이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했다. 좋아하는 유아용 비디오는 고장 날 때까지 봤고, 대사들을 모조리 암기해 버렸다. 다른 이들의 감정을 읽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 아빠가 화난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고, 우리보다 앞서 화를 냈다. 그 당시에 내가 본 우리 아들은 탱탱볼 같았다. 우리가 세게 던지면 던질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르는 탱탱볼 말이다.

미국 아이들은 2살 반이면 보통 데이케어를 간다고 해서 우리도 3살 때 아이를 등록시켰다. 아이는 헤어질 때마다 울었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았지만 처음엔 애들 다 그런다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힘들게 버텨왔는데 조금만 더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6개월이 지나니 더 이상 안 울었다. 그리고 6개월이 더 지나자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물었다. 동생을 보자 문제행동은 더 심해졌다.


단순히 고집이 세고 의사소통이 안 되어 답답한 마음에 이러는 건지,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우리는 절실하게 알고 싶었다. 유명하다는 육아서를 들여다보고 자료를 찾아봤지만 그 어떤 자료도 우리 아이 케이스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유치원 교사는 우리 아이 같은 케이스는 처음 본다고 했다. 울 아이를 6개월 때부터 봐 온 소아과 의사는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다고 했다.

'도대체 우리 아이가 뭐가 문제지?'라는 불안함 서린 질문에 대한 전문가들의 이런 답변에 우리는 안도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부모로서 뭐가 문제인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아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전문가들의 대답을 듣고 위안으로 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위로는 한 시간도 지속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의사가 해야 했었던 일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호소하는 우리 아이의 케이스를 '전문의'한테 전원시키는 것이었다. 아니다. 우리가 더 강하게 의사에게 요구했어야 했었다.


'I am Sorry'와 '우울'에 압도되어 버린 일상

하루하루가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는 '좌절'이라는 형태로 우리 가족을 짓눌렀다. 매일이 한숨과 눈물과 고성으로 점철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전쟁 그 자체였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칭찬만 받아온 모범생이었고, 나도 남편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리 엄마의 '자랑스러운 우리 딸'이었다. 우리 둘 다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마다 따가운 시선에 더 있지 못하고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왔다.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매일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편은 무사히 학위를 받고, 동부의 좋은 연구소에서 오퍼도 받았지만, 이런 불안정한 일상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동부의 유명한 연구소 대신 학교 부근의 작은 연구소를 선택헤 이곳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곧바로 '우울감'이 찾아왔다. 내가 무엇을 해도 이 아이를 바꿀 수 없다는 좌절감, 분노, 실망이 뒤엉켜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나'라는 우울감에 압도되어 한동안 일을 손에 잡지 못했다. 옆에서 보기에 꽤 심각한 우울증이었다.

이런 남편의 상황을 옆에서 들여다 봐 줄 여유가 나에게도 없었다. 매일 전쟁통에서 전쟁하듯 아이들 둘과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전과 다르게 무기력한 남편의 모습을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도움을 준다던가, 걱정을 한다던가 하는, 가족들의 우려스러운 상황을 보면 의례 나와야 할 반사작용이 나의 뇌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뇌의 기능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때 남편을 위기에서 건져 준 이는 바로 남편의 박사 과정 지도 교수였다.


2010년 10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남편은 교수님과 점심 약속이 있다며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외출했다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랩 미팅하다가 도중에 나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교수님이 괜찮다고, 어서 가서 아이 데리고 오라고 이해를 해 주셔서 단순히 이해심이 많은 분이려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이 자폐인의 아버지였다. 남편이 아들 육아 문제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당신이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남편한테 해 주신 것이다. 특수한 고등학생 아들을 둔 아버지의 위로와 공감에 딱딱하게 굳어져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남편의 마음이 풀린 것이다. 그 이후부터 교수님은 남편의 박사과정 어드바이저 그 이상의 존재로 우리 가족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우리 가족의 진정한 첫 번째 멘토가 되어주신 것이다. 교수님 사모님도 작은 아이 문제로 한참 내 속이 썩어 들어갈 때 나에게 위로와 조언을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큰 아이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우리 아이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폐아'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일반 아이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속에 섞어 놓으면 뭔지 모를 '다름'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원인을 몰랐고, 따라서 이를 해결할 솔루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보이는 아이를 '제대로' 훈육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고, 주변의 비난과 따가운 눈초리는 우리 부부의 자존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여기에 뒤이어 찾아온 '우울'은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겼다. 이러한 상황은 장애아를 둔 가족들에게 아주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숨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비우호적인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숨어버렸다. 종교 모임조차도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아니, 자발적으로 중단당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평생 이렇게 숨어서 살 수는 없었다. 우리도 맘 편하게 우리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위로를 받고,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멘토들이 필요했다. 육아서들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의 죄책감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오죽하면 남편은 '육아서 따위는 갖다 버리라'라고 했을까. 어디에 가야 이런 멘토를 만날 수 있는지도 몰랐던 그때, 교수님이 손을 내밀어 우리의 어려움을 들어주셨고, 이해해 주셨고, 당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음 직한 학술회의도 소개해 주셨다.


우리 가족에게도 드디어 첫 번째 나의 아저씨, 아니 '나의 선생님'이 생긴 것이다!


2022년 3월 5일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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