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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BRE 윤수경 Jul 19. 2021

인도에서 22년을 살아온 이야기

[인물 탐방] 인도에서 공부하기 강연아 선생님

인도 부동산 회사에 취업한 후 영업 전략으로 목표한 것이 있었다. <상생 : 서로 협력 하자! > 우리 회사는 인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입사 당시 나는 회사를 알리기 위해 대사관,  은행, 대형 로펌, 회계법인, 한국 기업들, 한인회까지 안 찾아간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한인회 회장님께서 <델리 NCR 원스탑 솔루션 컨설팅 그룹>을 만드시는데 거기에 함께 하자 제안해 주셔서 합류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컨설팅, 법인 설립 등을 위한 법륜 자문, 부동산, 건설사, 인력,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주재원 자녀분을 위한 교육상담까지가 한 팀이었다.


지금 사라진지 오래...

원스탑 솔루션 멤버들이 모이는 날 처음으로 강연아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은백의 단발머리에 선량함과 지식으로 가득 찬 모습에 후광도 살짝 보였다.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나는 평소에도 '나이가 들어도 염색은 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강연아 선생님은 보는 순간 마음이 활짝 열렸다. 롤모델 발견!


 



선생님은 인도에 오신지 올해로 22년 차다. 이 정도면 교민 사회에서 농담 삼아 산 조상님이라 불리는 레벨이다. 주재원 오시는 분들이 짧게는 한두 달에서 길게는 3~5년을 지내다 가시기에 강연아 선생님은 교민들에게 등불과도 같은 분이셨다.


2020년 3월 코로나고 터지고 인도 국가 봉쇄령으로 3개월씩 집 밖에 나가지 못했을 적에 정보는 생명줄이었다. 그때 내가 감동받았던 것이 교민 밴드를 통해 선생님께서 발 빠르게 코로나 상황을 알려주셨고 인도 현지인들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를 공유해 주셨다.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레시피를 공유해 주셔서 선생님의 글을 보고 압력밥솥으로 카스테라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왼쪽이 선생님의 작품 / 오른쪽은 나의 작품

생생하게 인도 코로나 소식을 전해주고 계신 선생님 부부

https://band.us/n/a9a25dj38462K




인터뷰 Q&A


1)    인도 오신 계기와 22년간 이곳에서 지내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22년 전 우리나라가 IMF라는 크나큰 충격에 휘청거릴 때 벵갈루루의 L사 지사장으로 오게 된 남편 따라 가족이 함께 왔습니다. 저는 인도에 오면서 인도의 유구한 역사와 철학을 직접 접하게 된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고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새로운 언어도 배우고 우리 아들에게 국제학교를 보내게 되다니!
 
 2년 뒤 남편이 델리 지사 설립 임무를 받아서 델리로 오게 되었지요. 저의 30대 중반은 벵갈루루의 멋진 사람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CSB(COMMUNITY SERVICE OF BANGALORE)라고 영국인이신 메이 여사가 주축이 되어 벨기에의 제 절친 크리스틴과 다른 서너 분의 인도인들과 유럽 사람들과 함께 창립멤버로 활동했습니다. 대외적으로 당시 IT도시로 부상하는 벵갈루루를 알리고(전화서비스) 크리스마스 바자회를 통해서 회원들이 만든 실용 잡화품을 판매해서 가난한 인도인들을 도왔습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저의 30대와 40대는 또 다른 인도의 선물인 둘째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로운 인도 생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벵갈루루의 캐나디안 국제학교에 큰아들을 보내었는데 2년간 학교를 다녀도 영어가 안되더라고요... 하교하면 옆집 인도 아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같이 하며 저도 함께 뛰어다녔습니다. 한국 학생들이 같은 반에 있다 보니 영어를 안 해도 형과 누나가 다들 도와주는 상황이었지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과외보다는 또래 아이들과 놀면서 영어에 익숙해지도록 도왔습니다.
 
 델리로 오게 되면서 델리 쪽 마하라자 출신의 절친과 상의해서 몇몇 학교를 알게 되었고 남편이 델리 출장 때 하루 날 잡아서 추천받은 후보 다섯 학교들을 모두 방문했습니다. L회사의 훌륭한 점이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자녀 학비는 전액 지원해 주었기에 주재원 자녀 모두 아메리칸 앰버시 학교(AES)를 다니고 있었으나 당시 2만불(2200만원)이 넘는 큰돈을 초등 3학년밖에 안 되는 어린이에게 쓴다는 것은 외화유출이라고 생각되었고 한 여름에 건물 안은 에어컨으로 추울 지경인데 밖은 40도를 넘나드는 온도차가 너무나는 환경이 건강에 안 좋다고 생각되어 아메리칸 앰버시와 브리티쉬 스쿨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학생 먼저 만나 보고 결정하자"는 인도 제일의 교육자이신 카푸르 선생님께서 디렉터로 계신 바산트 밸리 스쿨에 3년간 학비를 미리 납부한다는 조건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리해도 아메리칸 앰버시 1년 등록금보다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었습니다.
 
 외국인이라서 힌디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도서관에 가도 된다는 말을 들었으나 저희는 최대한 과외를 통해 따라잡겠으니 수업 참여를 하겠다고 하여 힌디 수업을 듣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10학년 수능시험에는 산스크리트로 시험을 보아 당시 타임즈업 인디아에 우리 큰아들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학교에는 에어컨이 없습니다. 더위에 푹 젖어서 안쓰러웠던 경험을 제외하고는 이 학교를 통하여 큰아들의 장래를 빨리 결정할 수가 있었고 대외적으로 수많은 경시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인도 상류계층의 생활을 경험했고 학부모와 선생님들을 지인으로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육을 항시 중요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 아이들은 인도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를 보내게 되었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나름 인도 교육환경을 이해하였고 더 나아가 한국 학생들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인도의 최상류 층 사람들에게 한국인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저희 큰 아들은 바산트 밸리 스쿨, 학부는 CMI(첸나이 수학 단과대학), 석사 과정은 세인트 스테판 칼리지를 나왔습니다. 막내아들은 매직 이얼즈(유치원), 바산트 밸리 스쿨 12학년을 졸업하고 해외에서 학부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모두 인도 전역에서 최고로 꼽는 유치원, 학교, 대학들입니다.
 
 남편이 사업한다고 회사를 그만두었는데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인도 생활을 계속하게 된 것이고 여전히 인도를 좋아합니다. 다양하면서도 한국과 다른 정중동(고요함 속의 움직임)의 나라, 배울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
 
 
 (2)  20년 전 인도는 어떤 분위기였나요?
 
 벵갈루루에서는  최상류 층 생활을 했습니다. 일례로 당시 망고는 꼭 비싼 알퐁소 망고만 먹었고 모임도 호텔에서, 외식도 호텔에서 했습니다.  2년 남짓 벵갈루루에 살았기에 벵갈루루를 속속들이 알기엔 시간이 모자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거기 사람들은 좀 착하고 순합니다. 날씨 덕분인 듯합니다. 델리가 각박한 것은 어느 나라도 수도는 터프하다고 하지요? 거기에 날씨가 너무 혹독해서인 듯합니다.
 
 20여 년 전에는 물건들의 질이 안 좋았어요. 라코스테 티셔츠를 사서 첫해에 아버지와 동생에게 선물했는데 다음 해에 보니 물이 빠져서 영 비싸게 산 티가 안 나더라고요... 백화점에서 브랜드 쇼핑을 했으나 올이 빠져있거나 팔 길이가 약간 차이나는 등 퀄리티가 한참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부자나 상류계층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하라자 출신 친구 집에 가보면 골동품이 즐비합니다. 벽마다 뭘 주렁주렁 달아놓았는데 품위가 있었습니다. 케시미르 카펫은 귀한 것이라서 벽에 걸었나? 했더니 몇 년 밟고 다니다가 걸어 놓는 것이라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1년 넘게 통역으로 일하던 의류회사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한국분을 도와준 인연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고칼다스라고 인도 의류 수출 넘버 1 회사였습니다. 세분의 형제가 운영하였는데 한 아들이 벵갈루루 궁전에서 결혼을 초호화스럽게 하더군요. 또한 사장님의 집들이에도 초대받았는데 커다란 집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해 놓아서 과연 부잣집은 다르다고 느낀 적도 있습니다.
 
 재미있던 일화가 있는데요... 한국에서 오신 기술자 분에게 (둘째를 낳으러) 병원 가서 당분간 못 도와드린다고 했더니 "와, 예?... 어디 아프십니꺼?" 저더러 어디 아픈지 물어봐서 배꼽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인도 사람들이 사리를 많이 입는데, 거의 모두 뚱뚱한 배를 내밀고 다녀서 저도 그런 줄 알았다고...ㅎ 만삭이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았었지요.
 
 산부인과, 소아과 의사가 참 친절하고 좋았던 기억. 볼보사의 중역 부부와 아주 절친으로 지냈던 기억들. 일본 친구가 두바이 다녀오면서 제 생각난다고 제게 갖다 준 다이아 박힌 작은 K자 금 펜던트, 부모님이 둘째 산후조리해 주신다고 오셔서 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북 델리를 11일간 여행했던 일... 부모에게 효도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당신 친구들은 모두 장관과 도지사를 해도 자식들이 비행기표를 보내서 외국 갔다 온 사람은 저희 아버지가 처음이라고 무척 자랑하셨어요. 더 잘해드려야 했었는데... 지금 후회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 당시만 해도 부자들이 살만한 물건들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쇼핑은 주로 유럽이나 두바이, 혹은 미국 등에서 한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로 예로 들면, 큰 부자들도 마루티 80, 앰베세더 등을 탔었지요. 일본차 구입은 저희가 싫어했고 타타 회사의 스모나 사파리는 문열림이 제각각이어서 신뢰가 안 서서 포드사의 에스코트를 탔습니다.
 
 일 년쯤 지나서 현대의 산트로가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쿠치쿠치호타해'로 영화계의 돌풍을 일으킨 샤루칸을 기용해서 빨간 산트로가 인도 부자들에게도 호기심을 많이 불러일으켰고 저희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현대차 구입을 권하곤 했습니다. sedond나 third차로요.
 
 (3)    인도 생활의 장단점
 
 학교와 교육 수준이 전체적으로 우수합니다. 기본 물가가 저렴해서 인도음식 위주로 먹는다면 상대적으로 적은 돈으로 풍족한 식단을 차릴 수 있습니다. 맛살라 문화여서 냄새나는 음식에 대한 혐오가 덜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의 심성이 착합니다.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한 州(state)가 한 나라 같아서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와 예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회가 허락한다면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살면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날씨와 음식이 다르기에, 오래 살다 보니 저희도 큰 병치레를 한 번씩 했습니다.
 
 아야(maid)나 운전기사, 죠끼다(경비원), 말리(정원사), 행상인들 거의가 외국인들을 봉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정보를 잘 모르면 속아 넘어갑니다. 물론 금전적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위로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들은 남을 속이고 우월감을 느끼는 듯해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야채나 우유를 살 때도 꼭 돈을 잘 챙겨주고 잘못 계산한 것은 나중에 얘기하여 돈을 갖다 줍니다.
 
 구르가온에서 8년 살다가 델리로 다시 돌아와 살다 보니 주변에 공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집은 매년 보수해야 하고 페인트칠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참 힘이 들더라고요.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식수, 전기 그리고 안전관리 등 기본 인프라가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돈에 관한 한 엮이지 않으면 좋은 인간관계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매사가 그러하지만 내가 손해 본다는 입장으로 양보하며 살아간다면 다들 좋아합니다.
 
 (4)    인도에 살면서 주의해야 할 점.
 
 뭐든지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야 합니다. 순식간에 뭔가가 없어지고 보는데도 가져갑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므로 네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처음엔 상대방 자존심도 생각해서 직접적으로 말을 못 했는데 이제는 교육차원에서 당당히 얘기합니다. 차 고치거나 바퀴 갈 때도 기사 맡기지 말고 직접 잘 확인하도록 합니다. 정품과 가품을 적당히 섞습니다. 인도인들도 당하는데... 잘 모르는 듯합니다. 이렇게 신용사회가 아니다 보니 조그만 일에도 신경 써야 돼서 피곤합니다.
 
 돈거래는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돈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래 살다 보니 한국 교민 중에도 과거에 나쁜 짓을 하고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기만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조심해야 하는데 노골적으로 알려줄 수도 없고 참 답답합니다.


 ((윤수경 의견 : 사업이나 돈거래 절대 하지 마세요. / 주의해야 할 분들이 콕 집어 누구누구인지 궁금하시면 강연아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여쭈어보셔도 됩니다. 제에게도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남동생과도 돈거래는 안 합니다. 일단 제 통장의 잔고는 보통 두 자릿수라 거래할 돈이 없습니다.))


 
 (5)    인도 교민 잡지인 ‘나마스떼’의 시초가 강연아 작가님의 글 모임이라고 들은 듯합니다. 어떻게 교민 잡지를 발행하게 되셨는지 어떤 소식지를 만드셨는지 말씀해주세요.
 
 벌써 19-20년 전 이야기인 듯합니다. L회사의 사모님과 당시 한글학교 교장선생님 등 인도 생활에 잔뼈가 굵은 분들이 첫 교민 소식지를 만들었는데 제가 2회부터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A4용지를 복사해서 찍개(스테이플러)로 철해서 배포했었지요. 옛날이야기입니다. 몇 분들과 열심히 몇 년간 봉사활동 재미있게 하며 잘 만들었는데, 한인회 부흥을 원하시던 당시 한인회장님이 광고비 받아서 재정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며 소식지를 한인회에서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당초 교민을 위해서 만든 소식지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기에 자연스레 한인회로 넘겼습니다. 다른 분들은 심정상 더 이상 활동 안 하셨지만 저는 제가 잘하는 분야가 교정, 편집 쪽이어서 계속 맡아서 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서 식사나 다과를 하면서 교정 보고했던 일들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다 편집부장 위에 편집위원장 직을 만들어서 영구 세력(?)을 휘두르려고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제가 반발해서 자발적으로 그만두게 되었지요. 그동안 교육과 학교 칼럼들을 많이 기고했고 건강이나 생활정보 등 정보들도 꾸준히 소개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몇 분들과 모여서 '델리 생활의 벗'이라고 소식지 비슷하게 월간 정보지를 만들었는데, 가정주부들이 주가 되어하다 보니 각자 사정들이 있어서 원활하지가 못했습니다. 저는 편집과 교정분야였는데 광고비를 받아오거나 배포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제가 만들자고 시작했던 정보지였으나 제가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교민들을 위한 소식 정보지로 취지를 살려 나가고자 했으나, 다른 분들은 광고 비중을 넓히는 등 상업성을 중시하는 바람에 저와 마찰이 생긴 것이지요.
 
 그러면서 몇 년이 흐르고 다음번 한인회장님께서 같이 해보자고 하셔서 몇 년간 글을 올리곤 했습니다. 요즘은 다른 분들이 좋은 글 많이 기고하기에 쉬고 있습니다.ㅎ 사실 블로그니 브런치니 밴드니 청문알(청소년 한국 문화 알리미) 등으로 신경 써야 할 데가 많아져서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락다운전에 교민 밴드의 운영자가 횡포를 저지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해서 이를 지적하다가 미운털이 박혔습니다. 락다운이 올 것이라는 인도지인들의 정보를 미리 올렸다가 가짜 뉴스를 올려서 교민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핑계로 제가 올린 모든 정보를 일방적으로 지우더군요... 학교나 교육 관련 학부모들과의 메시지들도 다 없어져버려서 한동안 곤란을 겪었습니다.
 
 이번에도 교민 밴드를 제가 먼저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공부하기》라는 밴드를 만들어서 20년 인도 생활 경험을 올리고 있습니다. 도움되는 정보를 올리고자 애쓰고 있으니 인도 생활에 많이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6)    자녀교육 입학 진학 상담일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시는 일에 대한 설명과 비용 안내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들이 인도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인도 교육분야에 개인적인 관심이 매우 컸습니다. 인도에 처음 오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학교와 인도 교육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주고자 봉사활동 측면에서 교육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델리 NCR지역의 10여 개 국제학교의 공식 한국인 카운슬러 및 어드바이저입니다.
 
 교육 박람회에 갔다가 신설 제네시스 글로벌 학교의 교장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던 중 공식 카운슬러 자리를 말씀하시면서 인연을 갖고 가자고 하셨는데, 그분이 샤마 교장선생님이십니다. 11년 전 일이고 샤먀 선생님은 지금 정년 퇴임하셨으나 유명한 파드마쉬리(민간부분최고상) 수상자이시고 제네시스 초기 셋업을 공고히 하고자 많은 일을 하신 훌륭한 교육자십니다.
 
 그러던 중 평소에 학교 입학 관계로 알고 있던 패스웨이즈의 입학담당 처장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3곳의 패스웨이즈와 유치원 얼리 이얼즈의 입학 담당자들과 교장선생님 등 20여분들 앞에서 인터뷰를 거친 후 공식 카운슬러가 되었습니다. 9년째 패스웨이즈 학교와 지금껏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제 힘만으로 된 건  아닙니다. 현재 패스웨이즈의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는 한국 선생님의 도움과 조언이 매우 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다년간 정직하고 성실하게 입학담당자들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는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인도 생활의 여러 사례 등을 들어서 소프트 랜딩을 가능하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현재 쿤스캅스콜란 인터내셔널과 스코티쉬하이, 엑셀시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등과도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벵갈루루의 쿤스캅도 부탁을 받아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ㅎ
 
 여러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나 교육담당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다 보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옵니다만, 제 기준에 합당치 못한 학교는 제가 사양합니다. 또한 학교에 따라서 말을 바꾸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학교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알기에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어떤 상황에 놓일지 안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특정 학부모 분들과 호불호는 있지만 제 기준으로 볼 때, 아디스쿨, MDIS, 랭서스, 썬시티, 비디야 산스카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비용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분야는 제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고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것이기에  공식 카운슬러인 경우에는 학부모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최근 들어 이를 악용하고 저의 선한 의도를 존중하지 않는 몇몇 학부모들을 보아왔기에 학교 방문 등 교통비가 들어가는 상황에서는 약간의 사례금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외 학교 제반서류의 학사 증명 및 아포스티유 확인 등에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비용은 형편에 따라 받습니다. 무료로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졸업장이나 최종 성적증명서는 몇 달이 걸리고 신경을 많이 써야 되는 분야라서 비용을 좀 받아야 합니다. 제게 위임하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문화원에서 코로나 위기가 오기 전까지 회화반 강사로 봉사 활동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고학년 학생들의 국제 학제 하의 CAS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청소년 한국문화 알리미 홍보대사》선생님으로도 봉사 활동하고 있습니다.


 
 (7)    작가님에게 행복이란?
 몸 건강하고 가족들 무탈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행복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소개합니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한알의 모래에서 온 세상을,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당신의 손안에 무한을,
 한 시간에서 영원을 잡아라...
 
 
 (8)    삶의 목표 / 앞으로의 계획
 
 나이가 들다 보니 행복관도 소박해지고 꿈도 소박해짐을 느낍니다. 계속 이웃들을 도우면서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은 제발 꼰대 짓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의 보잘것없는 지식이나 지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알리며 살겠습니다.
 
 저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법 없이 산다는 말을 들으신 훌륭한 분이신데요. 그분이 평생 좌우명인지 품 안에 넣고 다니시던 글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상처는 물에 새겨라
 
 흙처럼 진실하게
 꽃처럼 아름답게
 별처럼 성실하게
 
 넓게 알고
 깊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자
 
 
 수학을 좋아하는 큰 아들이 박사과정 마치고 인도에 오고자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학계에 지인들도 많기에 자식의 장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인도에 살면서 아들들에게도 우리 한국 교민분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제가 일을 하는데 무한한 응원을 해주는 저희 남편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선생님네 가족사진 : 교회 오빠들처럼 두 아드님을 잘 키우셨다,.




강연아 작가님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kaychang1


《인도에서 공부하기》밴드 : https://band.us/n/a9a25dj38462K



나마스떼 잡지 7월호 2021년 : band.us/@korea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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