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콩트 (32)

흰색의 향연

by 최병석

설화 씨는 아직도 눈 속에서 쏟아지는 기다림과 머물고 싶다는 시간들의 붙잡힘에 저당 잡혀 멍하니 앉아있다.


엊저녁부터 무지막지하게 쏟아졌던 눈발이 잠깐 소강상태를 거치는가 싶더니 퇴근을 알리는 알람소리에 맞추어 다시 눈발이 날린다. 기상예보를 보니 지금부터 시작된 이 눈은 밤을 새우고 내일 아침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눈이 오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해도 너무하다. 내리는 정도가 다르니 말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이니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방향을 틀었니 뭐니 이유는 분명 있겠지만 확실히 근래 들어 내리는 눈은 예전과 다르다.


왜일까? 혹시 보기 싫어 덮고 싶은 사람들의 숫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났기 때문일까? 아님 겨울은 오직 한 가지 흰색뿐이라는 독특한 취향의 실현이라서 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거만한 사람들이 저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이기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미끄러지고 허둥대는 상황들을 연출해 놓은 것일까?


무지막지하게 눈이 쏟아진다. 더불어 차 안에 앉아 꼼짝없이 그 내리는 눈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7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대로 이렇게 도로 위에서 온 밤을 지새워야 하는지 걱정에 걱정을 얹어 염려를 더하는데 한술 더 떠 자동차도 이제 기다림의 한계점에 달했는지 빨간색 경고등을 켜고 제 상태를 알려준다. 큰일이다. 이런 곳에서 차가 멈춰버린다면 저 차갑고 하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한다. 이런 생각이 머리끝에까지 오르자 설화 씨의 속사정에 변화가 감지된다. 더욱 큰일이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제발 간절히 바라건대 집까지 무사히 잘 들어가게 해 주세요'


설화 씨는 차를 어떻게 몰았는지 빨간 경고등은 언제 또 지웠으며 눈 내리는 밖을 반드시 제 눈으로 구경해야겠다는 속사정의 주인공들은 무슨 수로 달랬는지 하얗게 모른 채

침대 속에서 남아있는 잠시의 짬을 하얀 밤이 아닌 까만 밤의 속에서 코를 골면서 즐기고 있었다.


"따릉 따릉 따르릉"


다시 흰색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알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밖을 보니 더욱 찐 흰색이 불거져 들어온다.


'헉, 출근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해'


빗자루와 스크레퍼를 장착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막막했다. 하도 눈이 많이 내려 설화 씨의 차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설화 씨는 비몽사몽 한 간밤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차의 위치를 기어코 찾아내었고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차위에 올라탄 흰색들을 지워내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결국 차의 온전함이 드러났다.


"아뿔싸! 이게 뭐람?"


오설화 씨의 차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집에 놔두고 나와 다시 들어가 가지고 나왔어야 할 삑삑이의 소지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정확한 기억도 아닌데 섣부른 자신감으로 설마 했던 우려가 헛고생을 낳았다. 오직 하얀 눈의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지각이다. 헛심으로 시작되는 하루다.


"누군지 모를 저 차주인은 정말 좋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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