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산'우후루 피크'에서

여행의 한순간 쓰기(정윤 작가의 과제물)

by 영 Young

“You are now at Uhuru Peak…”

한쪽 면이 떨어져 나간 낡은 팻말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 글씨를 읽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슴 깊숙이 응어리져 있던 패배감이 한순간에 뚫려 버렸다. 여기는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산 정상 우후루 피크(Uhuru Peak, 5,895m)였다.

수 겹의 두꺼운 방한복 속으로 영하 20도의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냉기는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고산병으로 정신은 몽롱했다. 비몽사몽,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세계 7 대륙 최고봉 중 하나인 이곳은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만년설 빙하 위였다. 정상은 의외로 넓어 수십 명이 동시에 설 수 있었다. 지난번 끝내 넘지 못했던 정상 관문, 길만스 포인트에 먼저 올라섰다. 맞은편 마웬지산(Mawenzi, 5,149m)을 뚫고 솟아오르는 석양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화산 폭발로 형성된 분화구 위에 서 있었다.


길게 이어진 눈길을 따라 정상 포인트를 향해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화산석이 널브러진 자갈 눈길, 등산로 좌우로는 까마득한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오금이 얼어붙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더 걸어,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우후루 피크에 닿았다.

이년 전, 나는 다른 나라 외국인들로 구성된 킬리만자로 원정 등반팀에 합류했었다. 마지막 구간을 눈앞에 두고 정상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정상으로 가는 관문인 길만스 포인트(Gillman’s Point)조차 밟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눈물을 삼키며 내려왔던, 한이 맺힌 그 길을 오늘은 끝내 지나왔다.

90도에 가까운 경사, 고산병, 그리고 혹독한 추위.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었다. 닷새간 고산병에 시달리다 마지막 캠프인 키보 산장(Kibo Hut, 4,700m)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널브러져 쓰러졌다. 새벽 한 시, 다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사투 끝에 여섯 시간 만에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지점에 우뚝 섰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서른여 명의 등반객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포효하는 중년의 독일 신사, 서로 얼싸안고 깡충깡충 뛰는 삼십 대 미국인 커플, 캐나다 국기를 펼쳐 들고 카메라에 순간을 담는 캐나다 등반팀. 그들의 환호가 킬리만자로산을 깨웠다.


눈 덮인 빙하와 커피색 화산 자갈길이 어우러진 정상은 수천 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이곳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카메라를 꺼내 들고 감동의 순간을 붙잡느라 바빴다.


이 한순간을 위해 지난 이년을 기다렸다. 정상에 도착하는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이년 전의 실패는 가슴속에 패배감으로 남아 나를 짓눌러왔다. 그러나 정상에 서는 순간,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는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뒤로하고, 우리는 서둘러 하산해야 했다. 다시 내려올 산을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떠올랐다.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

그 말은, 오늘의 내가 비로소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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