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34

by 김치호

계속 뭔가 심고 있습니다

2023년 3월 24일


고즈넉한 산촌의 봄날, 아침입니다.


백수 촌부는 녹차 한 잔 앞에 놓고 밀린 숙제 하듯 노트북 자판을 두드립니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랑비가 되었다가 이슬비로 내리고 잠시 그쳤다가 내립니다. 형세로 보아 오랜 가뭄 해갈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지난 가을 이후 비다운 비 한번 내리지 않아 한 방울의 비도 아쉬운 때라 참으로 반가운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봄비는 만물을 깨우고 소생시킵니다.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Dull roots with spring rain.)”는 T.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 구절 그대로입니다. 비를 머금은 초목은 연록색 기운이 완연하고 땅도 그런대로 젖었습니다. 무엇보다 가뭄과 혹한으로 허옇게 말라가던 대나무 숲이 얼마간 생기를 찾는듯하여 그나마 마음이 좀 놓입니다.


요즘은 꽃나무 심기에 좋은 때라 계속 뭔가 심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더 몸이 근질거립니다. 그저께도 꽃나무 몇 종을 심었습니다. 멀리 파주에서 온 능소화와 강원도 지인이 챙겨 보낸 수국 작약 등입니다. 능소화는 지난해 가평 설악에서 시집온 녀석이 있지만, 조금은 외로워 보이던 차에 키우는 능소화 꽃색이 이쁘다고 자랑하는 또 다른 지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받은 것이고요.


수국은 지난해에 포트에 삽목된 15그루와 나무수국 5그루를 심었는데요. 며칠 전 고맙게도 꽃나무 키우는 데 지극정성인 지인이 꼭 심고 싶었던 나무수국을 어렵게 구했다면서, 아스틸베 작약 뿌리와 함께 한 주를 보내왔습니다. 그 이름은 Living Pinky Promise. 시간이 지나면서 꽃색이 연두에서 흰색으로, 다시 연분홍으로 바뀌는 꽃송이 사진을 보며 많은 기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동장에서 사 온 노란꽃 모란 1그루, 구봉화 5그루도 심었습니다. 구봉화는 꽃이 9개의 봉우리로 모여 핀다고 하여 이름이 구봉화인데, 황철쭉 또는 ‘엑스칼리버’라고도 부른답니다.


이처럼 뭔가 심을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의 역할은 심고 물주는 일이니 저의 역할도 대충 여기까지일 것입니다. 이제는 저 어린 생명들이 땅기운을 받아 뿌리내리고 태양을 향해 팔을 벌리겠지요. 거기에 시간이 더해져 빛나는 생명체로 커가기를 빌어봅니다.


또 관심을 갖고 가꾸고 있는 것이 곤달비입니다. 남원 산내면에서 우리 토종 꽃과 산나물을 재배하고 있는 지인이 지난 12월에 곤달비 뿌리를 한 상자 보내주어 심었는데요. 며칠 전에 필요하면 좀 더 가져다 심으라고 해서 바로 먼 길을 달려가서 가져와 심었습니다. 지난번에 심었던 것에서 벌써 새순이 올라왔기에 한 줌 꺾어 맛을 보니 식감과 향이 일품입니다.


봄은 역시 나물의 계절입니다. 집 주변에 지천으로 자라는 냉이 쑥에다 머위 달래 씀바귀 등등.... 이름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땅심이 좋은지 달래 뿌리가 양파는 좀 과장이고 작은 마늘만 한 것도 더러 보입니다. 올해는 곤달비까지 더해졌으니 이래저래 식탁이 한층 향기롭고 건강해질 듯합니다.


비 오는 바깥 풍경이 좋아 자꾸 눈이 가는 바람에 글 진도가 더딥니다. 주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돌이가 현관문을 긁어대며 같이 놀자고 재촉하기에 잠깐 비 그친 틈타서 함께 산책에 나섭니다. 앞서가는 선돌이는 비 맞으며 어디를 계속 돌아다녔는지 꼴이 가관입니다. '자유'의 또 다른 모습일까요?


산책길, 촉촉이 젖은 흙을 밟으며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비 온 하루 이틀이 바꾸어놓은 초목과 대지의 변화가 경이롭습니다. 계곡 옆의 개복숭아 꽃몽오리가 많이 부풀었고 지난해 심은 자두 살구 묘목도 셀 수 있을 정도의 꽃송이를 피우고 있습니다. 형제봉 계곡의 매서운 골바람을 견디어낸 동백도 조만간 꽃망울을 터뜨릴 모양새고, 설중매도 꽃몽오리가 터지기 직전입니다. 설중매는 그 이름처럼 겨울 눈 속에 피어야 제격일 텐데요. 아마도 그 양태와 분홍빛 꽃색이 눈을 살짝 뒤집어쓴 듯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요?


주변이 다시 짙은 비안개로 어둑어둑해지는군요. 그 안갯속으로 대나무들은 축 늘어져 미동도 없고, 묵묵히 지고 있는 매화의 자태가 의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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