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33

by 김치호

유박(油粕)을 아십니까?


외진 산자락으로의 귀촌과, 전원생활의 일상이 여유롭고 평온한 듯 보여도 때로는 예기치 못한 일로 당황스러운 순간을 맞기도 하고 일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자연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다 보니, 굳이 비유하자면 루틴(routine)에 절은 도회지 일상에 비해 변주(variation)가 있는 삶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멧돼지나 독뱀 소동이 대표적이고 일전에 있었던 ‘유박(油粕) 소동’도 그런 변주 가운데 하나가 될 듯싶습니다.


‘유박’은 농사짓거나 꽃나무 기르는 분들은 익숙하지만, 일반에게는 다소 생소한 말일 듯한데요. 한자를 아시는 분들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粕)은 지게미, 깻묵을 뜻하지요. 그러니 유박이란 참깨 들깨 콩 등으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말합니다.


이 찌꺼기가 이전에는 동물 사료로 많이 쓰였지만, 요즘은 대부분 유기질비료로 만들어집니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는 식용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요즘 세대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유박은 역한 냄새가 없고 약간은 구수하기까지 한 데다 뿌리기도 편해 과수 농가는 물론이고 가정집에서 꽃나무 키우는 데도 많이 쓰입니다. 며칠 전 저도 지난해 심은 대봉감 묘목들의 성장을 북돋우기 위해 20kg 유박 두 포대 사다 놓고 어제 그 일부를 묘목 주위에 뿌렸습니다.


일은 유박을 뿌린 날 저녁 무렵에 시작되었습니다. 선돌이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며 물도 사료도 일절 먹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소에는 가리지 않는 왕성한 식욕에다 부르기만 해도 달려와 난리를 치던 녀석이 몇 번 불러서야 겨우 나와 꼬리만 살짝 흔들 뿐 다시 자기 집에 들어가 눕는 것이었습니다. 걱정이 되었지만 하루 자고 나면 괜찮겠지 하고 그냥 두고 보기로 합니다.


다음날은 더 힘이 없고 축 늘어지길래 아껴둔 대봉감 홍시와 그렇게 좋아하는 호박 찐 것을 줘도 냄새만 한두 번 맡을 뿐 입을 대지도 않더군요.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하면서도, 별 다른 것을 먹이지도 않았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혹시 독성이 있는 풀을 뜯어먹었나....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지는 중에 언뜻 어제 유박비료를 뿌릴 때 옆에서 선돌이가 장난치며 유박을 주워 먹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약간 고소한 냄새에다 형태도 색깔도 꼭 사료 같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적극적으로 못 먹게 하진 않았습니다.


마침 만발한 매화도 보고 선돌이도 볼 겸해서 악양에 내려온 큰애 내외가 옆에 있어 선돌이가 유박 먹던 얘기를 했습니다.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유박에 독성이 강한 물질이 들어있고, 실제로 많은 반려견들이 유박을 먹고 심한 통증에다 피를 토하거나 죽음에 이르렀다는 글이 여럿 떠 있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중에 팔리는 유박비료는 대부분 비용을 낮추기 위해 인도산 아주까리(피마자) 부산물을 수입하여 만드는데, 아주까리 유박에는 ‘리신’이라는 독성물질이 함유되어 있어 유통과 사용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자료까지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선돌이가 유박을 주워 먹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무심함이 한탄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수의사가 아니니 선돌이의 증상이 꼭 유박에서 비롯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심중은 유박에 가 있습니다. 다행히 선돌이는 사흘째부터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고 지금은 입맛도 거의 회복하였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로 많이 당황스러웠던 상황이 무사히 마무리되는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한편으로 녀석의 강한 회복력이 고맙고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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