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는 악마가 산다

생존과 권력을 위한 몸부림

by 구민성

장편동화--천국에는 악마가 산다 <1부>


1. 초식이들의 천국

이른 아침의 숲 속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어린 사슴 찌루는 옹달샘으로 갔습니다. 옹달샘은 마치 거울처럼 잔잔하고 깨끗했습니다. 찌루는 물 먹으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퐁당!”

찌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슬방울이 옹달샘에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너무나 조용하기 때문에 그 소리도 크게 들리는 겁니다.

혼자 멀리 다니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떠올린 찌루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가는 길에 뽕나무 밑에서 까맣게 잘 익은 오디를 따먹었습니다.

새콤달콤한 맛에 반해서 꽤 많이 따먹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오디로 해결하고 집 쪽으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습니다. 좀 더 있으면 머루, 다래, 보리수도 따 먹을 수 있습니다.

개암, 돌배, 으름 넝쿨도 봐두었습니다. 밤, 도토리까지 탐스럽게 영글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맛있는 풀도 들판에 가득합니다.

숲 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찬란한 태양이 하루를 열면 마치 무대의 커튼이 올라갈 때와 같은 설렘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햇살은 숲 속의 구석구석을 쓰다듬어 줍니다.

숲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동물도 다투지 않고 살갑게 지냅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합니다.

숲 속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새싹이 나오고 잎과 가지에 살이 오릅니다. 열매를 맺고 떨어지면 또 새싹이 올라옵니다.

동물들이 풀을 뜯어먹고 열매를 따 먹어도 계속 생명이 이어집니다. 풀과 나무들이 건강하니까 숲 속 동물들도 모두 건강합니다. 그래서 엄마 사슴이 말했습니다.

“이곳은 우리 초식이들의 천국이야.”


2. 첫 번째 악마

“얘, 너 거기서 뭐 해?”

“응, 나 지금… 응가하는데……. 왜 그래?”

아기토끼 볼따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야! 저쪽으로 가서 싸지, 길가에 왜 싸냐?”

찌루가 눈을 흘기면서 볼따구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아니야. 똥은 여기저기 골고루 싸라고 했어.”

“누가?”

“우리 엄마가 그랬어.”

“왜?”

찌루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합니다.

“넌 그것도 모르니? 똥을 골고루 싸야 풀이 골고루 잘 자라지.”

볼따구가 이번에는 크게 말하고 계속 똥을 누었습니다.

“그래, 열심히 싸라.”

찌루는 한마디 톡 쏘아주고 계속 또박또박 걸었습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요.

하지만 몇 발자국 가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꺅! 살려주세요.”

아, 저 소리는 방금 헤어진 볼따구의 목소린데……. 찌루는 오동나무 뒤에 숨어서 볼따구 쪽으로 살짝 보았습니다.

“안 돼! 나는 어제부터 굶었거든.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널 잡아먹어야겠어.”

여우가 쪽 찢어진 눈으로 볼따구를 노려보며 다가왔습니다. 그 여우는 코가 뾰족하여 친구들 사이에 창코라고 불립니다.

볼따구는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발 못 가서 창코에게 잡혔습니다. 본래 토끼는 뒷다리가 길어서 오르막으로는 잘 달려도 내리막에서는 잘 못 달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래쪽으로 달리다가 그만 잡힌 것입니다. 똥 누다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찌루는 오동나무 뒤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볼따구의 최후를 지켜보았습니다. 창코는 볼따구를 절반 정도 먹고 나머지는 물고 갔습니다. 피 묻은 입과 날카로운 눈빛은 바로 악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찌루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방금 내 친구 볼따구가 여우에게 죽었어요.”

“뭐? 볼따구가 죽었다고?”

“네, 불쌍해요. 그리고 여우가 진짜 미워요.”

“그렇지. 여우는 악마란다. 너도 조심해. 혼자서는 멀리 가지 말고…….”

“엄만, 또 잔소리예요?”

“얘는, 잔소리가 뭐니? 아무튼, 엄마 말 잘 기억해 둬.”

찌루가 싫어해도 엄마는 잔소리를 계속합니다. 그건 다른 엄마들도 다 그래요.


3. 더 무서운 악마

창코는 모처럼 토끼고기를 먹어서 흐뭇했습니다.

“흐흐흐, 고기는 역시 토끼고기가 좋아. 연하고 맛있거든.”

창코는 절반 정도 남겨온 고기를 새끼들에게 나눠주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군침을 흘리는 다른 여우들에게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야, 오늘 내가 토끼 한 마리를 잡았거든. 근데 그 토끼 녀석이 진짜 빠르더라고. 내 평생에 그렇게 빠른 녀석은 처음 봤어.”

“뭐? 토끼가 그만큼 빨라?”

“응, 진짜 빨랐어.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놓쳤을 거야.”

“뭐라고? 그럼 결국 네가 더 빨랐다는 말이네.”

“그렇지. 내가 좀 더 빨랐다는 말이지, 헤헤.”

창코가 제 자랑을 하고 있을 때, 새끼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토끼고기를 먹었습니다. 창코는 새끼들에게 맛있는 고기를 먹이니까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빙긋이 미소 짓던 창코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습니다.

“얘들아, 조용히 해봐!”

창코가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 나는 쪽으로 쳐다봤습니다. 아, 그 소리는 다른 동물이 접근하는 소리였습니다. 창코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습니다.

“얘들아, 뛰어! 늑대야!”

창코는 급히 뛰었습니다. 친구 여우들과 새끼들도 뛰었습니다. 늑대는 끈질기게 한 마리의 여우만 쫓았습니다. 그것은 막내 여우였습니다. 막내 여우는 열심히 도망쳤지만, 얼마 못 가서 잡히고 말았습니다.

창코는 수풀 속에 숨어서 막내의 죽는 모습을 보며 치를 떨었습니다.

“흑흑, 우리 막내가 이렇게 죽다니…….”

입가에 묻은 빨간 피까지 맛있게 핥아먹는 늑대를 노려보았습니다. 창코는 불같은 복수심을 느끼며 그 늑대의 특징을 기억했습니다. 늑대는 왼쪽 눈을 다친 애꾸였습니다.

“이 애꾸 자식! 내 언젠가는 막내의 복수를 하고야 말 테다. 두고 보자, 이놈!”

창코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으드득 이를 갈았습니다.

그날부터 창코는 몰래 애꾸의 움직임을 살폈습니다. 애꾸는 항상 새끼 동물만 잡아먹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 큰 동물을 쫓다가 몇 번이나 놓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꾸는 한쪽 눈이 안 보여서 거리 감각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걸음이 느린 새끼들만 계속 노리는 것입니다. 창코는 그런 애꾸가 더 미웠습니다.

“저놈은 진짜 악마야. 내 저놈을 반드시 죽일 거야.”

창코는 복수심이 불타올랐지만, 아직은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저놈에게 힘으로는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4. 숲 속의 서열 싸움

애꾸는 어린 동물이 있는 곳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거나 보드라운 털이 나뭇가지에 묻어있으면 틀림없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 주변에 숨었다가 덮치는 것입니다.

그날도 애꾸는 어린 산양 양까를 잡았습니다. 양까는 살려달라고 눈물로 애원했습니다.

“늑대 아저씨,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엉엉…….”

“크크, 네가 잘못한 게 뭐야? 넌 잘못이 없어.”

“그럼… 잘못이 없으면 좀 보내주세요. 저는 살고 싶어요. 아직 어려요.”

“크크크, 그래 맞아. 네 잘못은 바로 어리다는 거야. 어리니까 잘 잡히고 맛도 좋지.”

애꾸가 양가의 목을 물고 서너 번 흔드니까 금방 숨이 끊어졌습니다. 애꾸가 막 양가를 먹으려고 할 때였습니다.

“크앙! 크르릉!”

산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습니다. 애꾸가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털빛이 희고 엄청나게 큰 호랑이가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애꾸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줌을 질질 싸면서 그 자리에서 떨기만 했습니다.

“아이고, 호랑이님.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네 이놈 애꾸야! 너도 약한 동물을 죽이지 않았느냐? 근데 너는 살고 싶어?”

“호랑이님, 이 산양 다 드릴게요. 이거 방금 잡아서 아주 싱싱합니다.”

애꾸는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래? 그 산양을 내게 준다고?”

“네네, 기꺼이 드리지요. 호랑이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아니지. 너를 죽이면 그 산양도 당연히 내가 차지할 텐데 뭐.”

호랑이 말이 옳지만, 애꾸는 얼른 꾀를 냈습니다.

“호랑이님, 지금 이거 한 마리뿐이 아니고 매일 잡아 드리겠습니다.”

“매일 잡아 온다고?”

“네네, 호랑이님. 매일 잡아 드리겠습니다.”

“어험! 애꾸 너 보기보다 의리가 있구나.”

호랑이는 으쓱한 기분에 애꾸를 칭찬했습니다.

“그럼요, 호랑이님. 앞으로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호 대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백호 대왕님이라고? 그거 듣기 좋네.”

“그렇습니다. 그냥 호랑이님보다 백호 대왕님이 좋습니다.”

애꾸는 넙죽 절하면서 아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산양의 껍질을 다 벗기고 먹기 좋게 만들어서 호랑이의 앞에 공손히 바쳤습니다.

“어, 좋다. 그럼 어디 맛이나 볼까?”

호랑이는, 아니 백호 대왕은 천천히 산양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껍질도 벗겼으니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백호는 먹이를 잡기 위해 먼지 마시며 뛰지 않아도 됩니다. 충성스러운 애꾸가 먹이를 잡아 오니까요. 애꾸는 먹이를 사냥해서 백호에게 바치고 자신의 생명을 이어갑니다. 비록 백호가 먹다가 남기는 것을 얻어먹지만, 그래도 목숨이 보장되니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애꾸는 백호의 힘에 의지하여 산에서 두 번째의 권력을 잡았습니다. 다른 늑대들은 모두 애꾸의 눈치를 보면서 슬슬 피했습니다. 애꾸는 다른 늑대들에게 명령하고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애꾸를 위협하는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들개무리입니다. 들개는 1:1로 싸우면 늑대의 상대가 안 됩니다. 하지만 워낙 무리가 많아서 떼로 덤비면 아주 강합니다. 더구나 애꾸는 한쪽 눈으로 거리조절이 어려워서 더 불리합니다.

애꾸는 혼자서 들개무리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늑대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훈련했습니다. 애꾸는 늑대들의 계급까지 정했습니다.

맨 위에 백호 대왕이 있습니다. 그다음은 애꾸가 스스로 직책을 정한 경호 대장으로 서열 2번입니다. 서열 3번은 칸이라는 늑대입니다. 물론 애꾸가 추천하여 백호 대왕이 임명했습니다.

칸은 대부분의 늑대와 달리 검은 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강하게 보이고, 특히 달밤에는 눈빛만 보이기 때문에 섬뜩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덩치도 크고 힘도 셉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꾸는 칸에게 꼼짝을 못 했습니다.

하지만 애꾸는 백호에게 아부를 잘해서 서열 2번이 된 것입니다. 애꾸는 힘센 칸을 자신의 아래에 두기 위해서 과감하게 3번으로 추천했습니다. 훈련 부장이라는 직책을 주면서 속으로 말했습니다.

‘흐흐흐, 서열 3번이라……. 그래, 저놈만 잡으면 모든 늑대를 다 잡는 것이지.’

애꾸가 이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칸도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좋아, 일단은 애꾸에게 복종하는 척하자. 부하들을 강하게 단련하여 백호만 죽이면 돼.’


5. 창코의 치밀한 움직임

창코는 막내의 복수를 위해 계속 머리를 짜냈습니다. 하지만 애꾸가 더 확고하게 2인자가 되었으니 기회가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창코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어차피 힘으로는 내가 안 돼. 머리를 써야 해. 두뇌 싸움을!’

창코는 자신의 강점을 꼽아봤습니다. 우선 상황판단이 빠르고 집념이 강합니다. 또 기억력이 좋아서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완벽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연설에 자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말할 시간만 조금 준다면, 상대가 누구든지 설득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창코는 자기만 아는 문자 표시가 있습니다. 나무줄기에 발톱으로 직직 긁으면서 기억할 내용을 머리에 입력합니다. 며칠 후에 그 발톱 표시를 보면 처음의 생각이 되살아납니다. 심지어 1년이 지나도 그 표시만 보면 다 기억이 납니다.

창코는 큰 상수리나무 둥치에 발자국 표시를 내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애꾸! 네놈은 반드시 내가 죽인다! 나는 너의 힘보다 센 지혜를 기른다.’

창코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애꾸에게 충성하는 척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다행히 창코는 아직 한 번도 애꾸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막내가 애꾸에게 불쌍하게 먹힐 때도 창코는 숨어서 지켜보기만 했거든요.

창코는 애꾸가 잘 다니는 길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애꾸가 가까이 올 때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이고, 애꾸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넌 누구냐? 여우 아닌가?”

애꾸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창코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녀석 보게. 겁도 없이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놈을 그냥 콱!’

애꾸는 은근히 불쾌했습니다. 모두 자기에게 굽실거리는데 조그만 여우 녀석이 겁도 없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오니까 가소롭고 기가 찼습니다.

“네, 대장님. 저는 창코라고 합니다. 대장님께서 저를 부하로 거두어주시면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창코는 비굴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으래? 어떻게 충성할 거야?”

“네. 저는 머리가 영리하고 글도 읽고 쓰니까…….”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애꾸는 한쪽 눈만 껌뻑거리면서, 머리와 글이 충성과 무슨 관계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네네. 대장님께서는 힘이 세고 부하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나는 힘이 세지. 또 내 밑에 있는 칸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지.”

애꾸는 어깨를 뒤로 젖히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장님의 힘에 저의 지혜를 보태면 천하대장군이 됩니다.”

“천하… 대장군이라고? 그게 뭐냐?”

애꾸는 한쪽 눈을 씰룩거리며 물었습니다.

“대장님. 말이란 동물은 빨리 달리지 않습니까?”

“말? 그렇지. 빠르지.”

“네. 그 빠른 말에 날개까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창코가 야금야금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상대의 애를 태우는 작전입니다.

“날개까지 있다고? 그럼 아주 좋겠구먼.”

“맞습니다. 바로 옥황상제가 타고 다니는 천마입니다.”

“옥황상제? 천마?”

“대장님.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대장님께 날개를 달아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네가 날개를 달아준다고?”

“네, 대장님. 꼭 달아드리겠습니다.”

창코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네놈도 날개가 없으면서 나에게 무슨 날개를 줘? 너, 뻥이지?”

“아닙니다, 대장님. 일단 저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그래? ……음, 까짓것 밑져야 본전이니 너에게 맡겨보마.”

그날부터 창코는 애꾸의 참모 부장이 되었습니다. 참모 부장은 훈련 부장 칸보다 위의 서열이라고 애꾸가 정해버렸습니다. 애꾸가 정하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니 칸은 졸지에 4번으로 밀렸습니다.

이제 창코는 애꾸가 남겨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서열 3번이 되었습니다. 애꾸의 연설문을 짜고, 저녁에는 웅변식 연설을 개인지도 했습니다.

실제로 며칠 후에는 애꾸가 늑대 훈련소를 찾아서 거창하게 연설했습니다.

“에.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위로는 백호 대왕님께 충성하고 아래로는 초식이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초식이들은 우리의 식량이므로 다른 경쟁자에게 뺏기면 안 됩니다. 그 과업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힘을 길러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처음에는 애꾸가 무식한 고함이나 험한 욕설로 부하들을 눌렀지만, 이제는 꽤 세련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부드럽게 설득하거나 감동적인 연설도 곧잘 했습니다.

한 번은 초식이들을 모아 놓고 이런 연설도 했습니다.

“초식이 여러분! 이 숲에는 우리가 버티고 있으니까 다른 초식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즉, 이렇게 풍성한 풀과 열매를 여러분들이 독점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여러분들은 우리 육식이들의 식량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나도 마음 아플 때가 있지만, 이것은 신이 내린 운명입니다. 처지가 바뀌어서 여러분이 육식이가 되고 내가 초식이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여러분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언제 죽어도 한 번은 죽는 목숨입니다. 그냥 죽어서 썩는 것보다는 여러분을 지켜준 우리에게 보답하며 죽는 것이 값진 죽음 아닐까요?

대신에 우리는 여러분을 한꺼번에 잡아먹지 않고 안전하게 번식하도록 배려할 것입니다. 부디 좋은 풀을 많이 먹고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끼도 많이 낳으세요. 아무쪼록 사는 동안이라도 배부르게 살기 바랍니다.”

애꾸의 연설은 초식이들의 운명을 이해하는 척해서 공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많은 초식이들이 손뼉을 치기도 했습니다. 애꾸는 멋진 연설과 박수 때문에 늘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애꾸의 이러한 변화는 창코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창코의 머리에 따라서 애꾸가 움직이는 셈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창코가 애꾸의 정신세계를 조금씩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루는 애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물었습니다.

“야, 참모 부장! 날개는 도대체 언제 달아줄 거야?”

창코는 애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약간 당황했습니다.

“네, 대장님. 날개란 진짜로 펄럭이는 날개가 아니고요…….”

“뭐? 진짜가 아니면 가짜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가짜가 아니고요… 지금처럼 남을 설득하고 이끄는 능력을 말합니다.”

“설득? 능력? 그런 게 무슨 날개야?”

“네, 대장님. 그것은 날개의 가치입니다. 날이 갈수록 대장님의 연설 실력이 좋아져서 앞으로는 지도자의 역량을 훌륭하게 갖출 것입니다.”

애꾸는 약간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연설할 때 부하와 초식이들의 박수 소리가 많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날개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코는 애꾸에게 날개의 가치를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힘센 권력자의 정신을 조종한다는 점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무식한 애꾸가 까딱 마음이라도 변하면 창코의 운명은 끝장입니다. 창코는 단풍나무줄기에 발톱으로 긁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애꾸에게 목숨을 의지해도 너무 믿으면 위험하다. 꼭 기억하자.”



6. 먹이의 분배와 관리

늑대들은 부지런히 사냥하여 일단 훈련 부장 칸에게 모두 바칩니다. 칸은 그 사냥감 중에서 절반을 애꾸에게 올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부하들과 나누어 먹습니다.

애꾸는 받은 고기 중에서 싱싱하고 질 좋은 것을 골라서 백호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자신과 창코가 먹고 남는 것은 잘 보관합니다.

먹이 보관소는 짝귀가 관리합니다. 짝귀는 본래 애꾸의 비서 겸 경호원이었는데 사소한 실수로 한쪽 귀를 물어 뜯겼습니다. 그래서 짝귀가 된 것입니다.

“이놈의 돌대가리야! 머리 나쁘면 손발이라도 부지런해야지. 넌 머리도 나쁜 놈이 손발까지 게을러터졌잖아!”

짝귀는 애꾸에게 밉보여서 걸핏하면 쥐어 박힙니다. 머리 나쁘고 힘 약해서 천대받는 신세가 한스럽지만, 먹고살자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말은 못 하고 속만 답답합니다.

짝귀의 이런 마음을 눈치 빠른 창코가 놓칠 리 없습니다. 사실 애꾸에 대한 원한과 분노라면 짝귀보다 몇 배나 더 큰 창코입니다. 한쪽 귀 물어뜯긴 고통보다 자식 잃은 고통이 훨씬 더 크니까요. 어쨌거나 창코는 짝귀에게 살갑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고기 빼돌리는 짝귀를 창코가 알아차린 것입니다. 창코의 눈치 하나는 귀신과 동급이니까요.

“어이, 짝귀. 어제 보니까 네가 뭘 가지고 가던데 그게 뭐였지?”

“네? 뭐… 뭐 말인가요?”

짝귀가 당황스러운 낯빛으로 되물었습니다.

“어젯밤에 말이야. 네가 뭘 물고 열심히 옮기던데……?”

“아, 그거요? 그게 뭐냐면… 그냥… 상한 음식이라서… 버린다고…….”

짝귀는 시원한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습니다.

“됐어. 말 안 해도 알아. 나 혼자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저기… 참모 부장님, 제발 비밀 좀… 지켜줘요.”

짝귀는 창코가 자기편이라 믿고 부탁했습니다.

“그래, 그 고기를 어디로 옮겼어?”

창코가 눈을 지그시 감고 물었습니다. 마치 개구쟁이가 재미 좋은 장난감이라도 얻은 표정입니다.

“저… 그건 묻지 마시고… 그냥 비밀만 좀…….”

“비밀 좋아하시네. 네가 자꾸 이러면 애꾸 대장에게 보고할 수도 있어.”

“아이고, 부장님. 안 됩니다. 애꾸 대장은 안 됩니다.”

짝귀는 애꾸 대장이라면 악마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럼, 이제 말해. 정직하게 고백하면 비밀을 지켜주마.”

“네. 사실은… 훈련 부장님께 갖다 주었어요. 비밀은 꼭…….”

“훈련 부장? 칸 말이냐? 그럼 너는 칸의 편이냐?”

“편이라기보다는… 충성스러운 부하라고 할 수 있죠.”

창코는 또 머리를 굴렸습니다.

‘흐흐흐. 이제 짝귀를 잡았어. 이렇게 되면 먹이 보관소를 내가 접수하는 거다. 이제 이놈을 잘 구슬리면 나에게 큰 힘이 되겠지. 흐흐’

창코는 자작나무 줄기에 발톱 자국을 남기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군량미 창고를 접수했다.”

이때 찌루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저 여우는 왜 나무를 긁으면서 구시렁거리는가?”


7. 점점 커지는 창코의 힘

자신감이 더 많아진 창코는 늑대들의 훈련소에 갔습니다. 훈련 부장 칸은 그늘에 앉아서 부하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늑대들은 둘씩 짝을 지어 나무토막의 양쪽 끝을 물고 서로 당기고 있었습니다. 이빨과 턱 근육을 강화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어, 훈련 부장. 수고가 많소.”

창코가 거만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면서 칸의 옆에 앉았습니다.

“아, 창코. 자네 왔는가?”

칸은 명색이 늑대라서 여우 따위에게 존댓말을 쓰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창코는 서열 3번인 자기 위치를 생각하니 배알이 틀렸습니다. 참모 부장이 훈련 부장보다 한 단계 높다고 애꾸 대장이 말했으니까요.

“아니, 훈련 부장. 지금 나에게 반말했소?”

“왜, 반말하면 안 되나?”

“아니, 나도 지위가 있고… 나이도 있는데…….”

“그래서? 기분 나쁜가?”

노려보는 칸의 눈빛에 창코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대의 약점을 잡고 있으니 없던 배짱도 생겼습니다. 전에는 감히 못 하던 불평을 주절거렸습니다.

“뭐, 기분 나쁘다기보다… 내 나이와 지위에 맞게 대우해 달라는…….”

“그래. 용건은 뭔가?”

아직 당당한 칸은 눈을 부릅뜨고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뭐, 가만 보니 훈련 부장 당신과 짝귀가 무척 친해 보이던데…….”

“왜, 친하면 안 되는가?”

“그냥 친한 게 아니라 짝귀가 훈련 부장에게 충성심이 너무 강해서…….”

“그 친구가 나를 존경하는 모양이지.”

칸은 심드렁하게 말하고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창코의 말을 무시하면서 적당히 끝내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심이 물건으로 표시되니까 문제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짝귀가 먹이 보관소에서 고기를 빼내어 훈련 부장에게 충성하더군요.”

“…….”

순간 칸은 입을 꾹 다물고 숨소리도 낮추었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긴장했습니다.

“아니, 짝귀가 훈련 부장을 잘 모시니까 보기 좋아서요. 참 부럽습니다 그려.”

창코는 밀고 당기며 빈정거리는데 칸은 속이 답답해졌습니다.

‘끄응, 이 여우 놈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잠시 정신을 수습한 칸이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말이 아닙니다.

“저… 참모 부장님. 그건 짝귀가 저에게 주는 선물인데… 제 생일을 축하한다면서요.”

“아하, 그래요? 훈련 부장 생일은 사흘에 한 번씩 오는가요?”

창코가 빈정거리며 물었습니다.

“사흘에 한 번…이라고요? 그게… 저… 그러니까…….”

칸은 입이 바싹 말랐습니다. 조금 전의 당당함이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훈련 부장. 당신 혹시 선물과 뇌물의 차이는 알고 있소?”

창코의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습니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라고요? 글쎄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면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는 이만 가보겠소.”

“아니, 벌써 가시게요? 좀 더 노시다가 맛있는 닭 간이라도 좀 드시고 가시지요? 아니면 싱싱한 꿩고기를 준비할까요?”

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니오. 이제 나는 가보겠소. 애꾸 대장님이 언제 찾으실지 모르니까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잖소.”

창코는 ‘애꾸 대장님’을 내세우면서 참모 부장의 지위를 은근히 과시했습니다.

“네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자주 놀러 오십시오. 네네.”

칸은 약점이 잡혔기 때문에 창코에게 쩔쩔맬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자세를 낮추고 훈련소 출입문까지 배웅했습니다.

창코는 칸의 배웅을 받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흐흐. 역시 나는 천재야. 칸 자네는 완전히 낚였어!’

창코는 짝귀를 구슬려 칸마저 눌러버린 것에 대만족이었습니다. 칸과 잘 훈련된 부하들과 그들을 먹일 수 있는 막대한 군량미까지 잡았다고 생각하니 주먹이 꽉 쥐어졌습니다.

창코는 쪽동백나무에 발톱으로 지익 긁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제 칸도 확실히 잡았다.”

창코가 제자리로 돌아오니 마침 애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봐, 참모 부장! 어디 갔다 오는가?”

“네, 대장님. 훈련소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훈련소? 자네가 거긴 왜 갔는가?”

“네, 훈련소를 자주 찾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훈련 부장과 간부들의 질서를 잡아야 하며 또한…….”

“됐어. 그런 건 자네가 알아서 해.”

창코는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려고 했지만, 애꾸는 복잡한 절차나 보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도 창코에게는 유리한 부분입니다. 미주알고주알 자꾸 따지기보다 모든 걸 믿고 맡겨버리는 상관이 편하니까요.

창코는 감태나무를 앞발로 긁으면서 생각했습니다.

‘흐흐, 애꾸 네놈도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있어 봐.’

창코는 속으로 칼을 갈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럽게 웃었습니다.


8. 우리도 살아야지요

칸은 부하들에게 먹이를 잡아오도록 매일같이 들볶았습니다. 열두 마리의 부하들은 각각 한 마리씩의 먹이를 잡아서 매일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백호와 애꾸에게 바칠 수 있고, 창코와 칸을 포함한 모든 늑대들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초식이들의 숫자가 많아야 가능합니다. 초식이들은 매일 늑대의 수만큼 줄어드니까 새끼들의 번식률마저 자꾸만 낮아졌습니다.

불안감에 억눌렸던 초식이들이 비상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나이 많은 산양이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에, 여러분! 우리의 생존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늑대들이 워낙 잔인하게 공격하니까요. 우리가 죽어야 그놈들이 사는 이 운명적인 현실이 원망스럽고…….”

“산양 어른! 그따위 신세타령은 때려치우고 빨리 대책을 세워야지요.”

멧돼지는 앞발로 땅을 툭툭 차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그래요, 대책을 세웁시다.”

“맞아요. 이대로 있으면 우린 다 죽어요.”

사슴, 토끼, 다람쥐를 비롯한 참석자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웅성거렸습니다.

“자, 자! 여러분. 조용히 좀 하세요. 이렇게 무질서하면 회의를 할 수 없잖아요. 발언권 얻어서 의견을 말하세요.”

분위기가 좀 누그러들자 고라니가 발언권을 신청했습니다.

“저요, 저요!”

“좋아요. 고라니 군, 발언해요.”

“저… 우리가 열심히 새끼를… 많이 낳아서… 계속 상납을 하면…….”

“야, 고라니! 계속 상납하면 모두 죽는 거지 그게 사는 거야?”

들소가 굵은 목소리로 고함질렀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가 멸종되지 않고…….”

“그래! 너 잘 났어. 그걸 누가 몰라? 문제는 멸종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그거야.”

조랑말도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고라니를 윽박질렀습니다. 고라니는 들소와 조랑말의 합동 공격을 받고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다람쥐가 고라니를 달래는 동안에 산양이 회의 분위기를 가라앉혔습니다.

“여러분, 모두 발언권을 얻어서 말하세요. 그리고 남의 발언을 막지 말고 잘 들어주세요.”

산양이 발언 질서에 대해서 말하니까 분위기가 조금 나아지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멧돼지와 들소는 특공대를 만들어 늑대들과 맞짱 뜨자고 주장했습니다. 한밤이나 비 오는 날 공격하면 숫자가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이상한 근거를 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부지런히 짝짓기 하여 새끼를 많이 낳자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사슴과 고라니는 나이 순서대로 자진하여 늑대들의 먹이가 되자고 했습니다. 본래 삶이란 허무한 것이니 기운 빼지 말고 운명에 따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염소 가족의 주장은 달랐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늙은이도 오래 살 권리가 있으니 공평하게 추첨으로 죽을 순서를 정하자고 했습니다.

토끼는 열심히 이빨을 갈아서 늑대에게 떼거리로 달려들어 끝까지 싸우자고 했습니다. 토끼 열 마리가 늑대 한 마리의 목에 한꺼번에 매달려 흔들어 재끼자고 핏대 세웠습니다. 이른바 10:1 전법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는데, 참석자들은 대부분 킬킬 웃었습니다.

다람쥐가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대표단을 구성하여 백호 대왕에게 직접 찾아가서 담판을 지읍시다.”

“어떤 담판?”

구석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던 너구리가 반쯤 뜬 눈으로 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당신들 먹이가 보장된다, 그런데 지금처럼 무리하게 요구하면 확!…….”

“잠깐… ‘확!’ 이라니?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이야?”

너구리가 이번에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 … 확! 자살해 버릴 거라고 선포합시다.”

다람쥐가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말했습니다.

“자살? 선포? 에라, 미친놈아! 너나 하세요. 별 띨띨한 놈 다 봤네.”

들쥐까지 비난을 퍼붓자, 그때부터 다람쥐의 닉네임은 ‘띨띨이’가 되었습니다.

가장 빠르고 힘센 검정말이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습니다.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딱 한 번만 기회를…….”

하지만 아무도 검정말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찌루도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때까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맥 빠진 분위기도 보였지만, 분노의 파도가 몰려오는 의견도 더러 있었습니다.

계속 말이 없던 찌루가 처음으로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다른 먹을거리를 활용하면 어떨까 싶네요.”

“다른 먹을거리? 그게 뭐요?”

산양이 점잖게 물었고 다른 참석자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네. 가령 벌꿀이나 로열젤리를 주면서 우리를 좀 적게 잡아먹으라고 해요.”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좀 더 커졌습니다.

“벌꿀? 로열젤리?”

“그래요. 꽃만 많으면 꿀과 로열젤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요. 꿀벌들이 고생하겠지만, 우리의 장기적인 생존과 평화를 위해서…….”

갑자기 박수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꿀과 로열젤리는 매우 귀한 것이니까 백호 대왕에게 직접 주는 게 좋겠어요.”

늦게 말문이 터진 찌루의 눈빛은 총명하게 빛났습니다.

“백호 대왕에게 직접 준다고요?”

산양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네. 백호 대왕에게 직접 주면서 약속을 받는 거지요.”

“어떤 약속을 받아요?”

“꿀과 로열젤리를 계속 바칠 테니 늑대의 번식을 줄여달라는 것이지요.”

찌루의 의견은 매우 창의적입니다. 줄 것은 주되 받을 것은 받자는 조건부 협상입니다. 이 의견에 참석자 모두가 찬성하고 회의는 끝났습니다.

마침내 산양과 찌루가 대표로 백호 대왕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경호 대장 애꾸에게 막히고 말았습니다.

“애꾸 대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 뭘 가져왔어?”

산양의 면담 요청에 애꾸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뭘… 가져오다니요?”

“하, 참! 네놈이 나를 만나는데, 그럼 맨입에 되겠어?”

애꾸는 뇌물을 원하는 것입니다. 대왕에게 가기도 전에 막히니까 산양과 찌루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되돌아와서 한참 동안의 궁리 끝에 애꾸에게 뇌물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칡즙이 건강에 좋다면서 너구리, 들쥐, 두더지들에게 칡뿌리를 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꿀벌들은 꿀을 모았습니다. 또 종달새, 꿩, 비둘기 가족들이 새알을 서른 개나 모았습니다.

산양은 찌루와 함께 뇌물을 싸들고 다시 애꾸에게 갔습니다.

“애꾸 대장님. 이건 별거 아니지만 저희가 성의껏 준비해서…….”

“됐어. 다음에는 별거 아닌 것 말고 좋은 걸로 준비해. 오늘은 첫 부탁이니 이 정도로 하지. 그래 뭔가?”

애꾸는 선물 보따리를 넌지시 보면서 어깨에 힘주고 물었습니다.

“네. 칡즙과 꿀입니다. 새알도 있고…….”

“아니, 선물 말고… 용건이 뭐냐고!”

애꾸가 하나뿐인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사납게 물었습니다. 산양은 가슴이 콩닥거리고 찌루는 온몸이 발발 떨렸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요 쪼그만 새끼 사슴은 왜 왔어? 야들야들하고 맛은 좋겠네.”

“아이고, 대장님. 맛이라뇨? 사실은 우리 찌루가 좋은 의견이 있다고 해서 같이 왔는데요.”

“뭐? 얘가 좋은 의견이 있다고?”

“네네. 직접 한 번 들어보시지요, 대장님.”

애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찌루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대장님, 저희가 직접 백호 대왕님께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뭐라? 대왕님께 직접? 그럼, 난 뭐지?”

“…….”

“요런 돌콩 만한 녀석이 감히 경호 대장을 무시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놈이!”

애꾸는 침을 튀기면서 고함질렀습니다. 마치 잡아먹을 기세였습니다.

“아이고, 대장님. 그게 아닙니다. 찌루가 아직 철이 없어서 실수를…….”

“이런 건방진 놈! 감히 나를 뛰어넘고 대왕님께 바로 간다고? 썩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길길이 날뛰는 애꾸의 고함에 산양과 찌루는 슬금슬금 물러났습니다.

이때 멀리서 창코가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아니, 저것들이 왜 애꾸의 집에서 나오지? 저것들은 애꾸를 만날 서열이 아닌데……. 저놈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창코는 재빠르게 달려가서 길을 막았습니다.

“야! 너희들, 잠깐 멈춰!”

산양이 깜짝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 찌루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네? 왜요?”

“너희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야?”

창코가 눈에 힘을 주고 산양과 찌루를 번갈아 보면서 물었습니다.

“저… 우린 그냥…….”

산양이 우물거리며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우린 요, 애꾸 대장님 만나고 오는 길인데요.”

찌루가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어, 그래? 애꾸 대장님을 왜 만났어?”

창코가 고개를 꼬면서 물었습니다.

“그건요… 음… 말할 수 없어요.”

“뭐? 말할 수 없다고? 이런 고얀 놈! 빨리 말 안 해?”

창코가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쳤습니다.

“말 못 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누가?”

“애꾸 대장님이 그랬어요.”

“어, 그래?”

창코는 더 캐묻지 못하고 노간주나무에 발자국을 남기며 중얼거렸습니다.

“이것들이 숨기는 비밀이 도대체 뭐지?”

창코가 꼬리 내리는 걸 본 찌루는 새삼스레 애꾸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음, 일단 애꾸를 꼬셔야 하겠군.’

그날부터 찌루는 애꾸에게 점수 따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초식이들은 모두 깊은 고민에 잠겨서 우울했습니다. 하늘빛이 흐릿하고 매미 소리마저 기운이 빠져 있었습니다.


9. 애꾸의 마음이 바뀌다

애꾸는 며칠 동안 칡즙을 마시면서 몸에 기운이 생기는 걸 느꼈습니다. 쌉싸름한 게 맛은 별로 없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솟았습니다. 꿀과 새알을 먹으니 속이 든든했습니다.

“어? 이것 봐라. 이상하게 힘이 펄펄 나네. 그 참, 신기하구먼.”

애꾸는 괜히 주먹을 불끈 쥐어보고 제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칸과 붙어도 이길 것 같았습니다.

그때 백호의 연락병 다람쥐가 쪼르르 왔습니다.

“경호 대장님. 지금 대왕님께서 찾으시는데요. 얼른 가 보세요.”

“어, 그래? 알았어.”

애꾸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습니다. 며칠 전처럼 조금이라도 늦으면 또 혼날 테니까요.

“대왕님, 찾으셨습니까?”

“오냐. 내 잠시 자네에게 할 말이…….”

백호는 갑자기 말을 뚝 끊고 애꾸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야, 애꾸! 너 잠깐 일어서봐.”

“왜 그러십니까, 대왕님?”

“아, 글쎄. 일어서봐! ……. 그렇지, 좋아. 이제 뒤로 돌아봐. ……. 옳지, 이제 앉아봐.”

백호는 애꾸에게 여러 가지의 동작을 시키면서 꼼꼼하게 관찰했습니다.

“저… 대왕님. 무슨 일이신지… 평소와 다른 지시를…….”

“그래! 너 이놈. 바른대로 말해. 요즘 뭘 먹고 있어?”

“뭘… 먹다뇨? 그냥, 대왕님께서 드시고 남은… 뼈다귀를 갉아먹는데요.”

애꾸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정신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야. 분명히 뭔가 있어. 네놈의 털빛이 달라. 내 눈은 못 속여. 얼른 바른말해!”

백호는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애꾸를 쏘아보며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그 눈빛만 보고도 애꾸는 오줌을 지렸습니다.

“네. 대왕님, 사실은 칡즙을 며칠 먹었습니다만…….”

애꾸는 칡즙만 말했습니다. 벌꿀과 새알까지 뺏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으래? 칡즙이 뭔데 털빛이 그렇게 좋아? 눈빛도 확실히 힘이 있구먼.”

“네네, 대왕님. 칡즙이란 피로와 기력 회복에 좋다는…….”

“야, 이놈아! 그런 게 있으면 내게 먼저 가져와야지, 그걸 너부터 먹어? 너 죽고 싶어?”

백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산이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아이고, 대왕님.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윽!”

백호가 주먹으로 슬쩍 쥐어박았습니다. 그러나 애꾸는 이마가 깨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만약 백호가 힘껏 때렸다면 애꾸의 머리통은 진짜로 깨어졌을 겁니다.

“그래, 이놈아. 안 죽일 테니 똑바로 대답해!”

“네네, 대왕님. 저도 처음 보는 것이고, 또 쓴맛이라 혹시 부작용이 없는지 먼저 실험 삼아 먹어봤습니다. 만약 독이 있으면 대왕님께 아주 위험하니까 제가 먼저…….”

“그러냐? 음, 좋아. 네 말을 믿어주지.”

“아이고, 대왕님. 정말 고맙습니다. 대왕님은 역시 현명하십니다.”

애꾸는 아부를 하면서도 자신의 재치에 내심 감탄했습니다.

“그래, 먹어봐도 죽지 않고, 오히려 털빛이 반질반질하니까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네, 대왕님. 맛이 약간 쓰긴 해도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냉큼 갖고 와.”

애꾸는 꽁지가 빠지도록 되돌아와서 칡즙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꿀과 새알은 더 깊이 숨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흐흐흐. 이것만 주면 나는 또 점수가 올라갈 거야.’

애꾸는 벙글벙글 웃으면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지켜보는 짝귀의 눈빛을 알아채지는 못했습니다. 짝귀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애꾸가 산양으로부터 뇌물 받은 걸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 모르는 척할 뿐입니다. 이런 고급 정보는 꼭꼭 숨겨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왕님. 여기 칡즙을 대령했습니다.”

“오, 그래? 빨리도 왔구먼.”

“그럼요. 저의 충성심은 걸음까지도 빠르게 만든답니다.”

“껄껄껄, 좋아. 그런데 아까 쥐어박아서 미안해. 아팠어?”

“네. 대왕님의 핵주먹에는 살짝 맞아도 엄청나게 아프지요.”

애꾸는 최대한 아부하고 백호는 은근히 미안한 표정이었습니다. 애꾸는 굽실거리며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래. 나는 백호의 힘이 필요해. 나를 지켜줄 튼튼한 방패로 잘 활용하자.’


10. 찌루, 술을 만들다

“캑캑! 아이고, 목 막혀.”

찌루는 알밤을 급히 먹던 중에 목이 막혔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움푹 팬 바위에 고여 있는 검붉은 물을 보았습니다. 급해서 몇 모금 먹었는데 약간 신맛이 있어도 달착지근했습니다. 조금 더 먹어보니 알딸딸한 게 기분도 좋았습니다.

“어? 이게 뭐지? 맛이 좋네. 기분도 괜찮고.”

고개 들어보니 머루 열매가 달려있고 바위 구멍에도 머루 열매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찌루는 이튿날에도 고여 있는 물을 핥아먹었습니다.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찌루는 산양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산양도 그걸 맛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부터 산양은 다른 초식이들에게 알려서 머루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에 산양과 찌루는 애꾸를 찾아갔습니다.

“애꾸 대장님, 이거 맛 좀 보세요.”

“그거 뭐냐? 시커먼 게 못 보던 것인데.”

그러면서 조금 먹어보니 맛이 참 좋았습니다. 몇 모금 더 마시니까 하늘을 붕붕 나는 것처럼 기분도 좋았습니다.

“어? 이거 뭐지? 맛도 좋고 기분도 좋은데…….”

“네, 대장님. 그건 머루주라고 하는 음료예요.”

찌루가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음료라고?”

“네. 술이라고도 하지요.”

“그래, 이거 어디서 났어? 아니,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또 가져올 수 있지?”

애꾸의 눈빛이 갑자기 부드러워지니까 산양이 대답했습니다.

“네. 더 가져올 수는 있는데…….”

“있는데, 왜?”

“저희도 부탁이 있거든요.”

“무슨 부탁?”

“저… 대왕님을 좀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면…….”

“뭐라? 대왕님을 만난다고? 왜?”

애꾸의 외박이 눈에 의심의 빛이 스쳤습니다.

“저희도… 살기 위해서… 뭔가 대책을…….”

산양이 벌벌 떨면서 겨우 대답을 이어가는데 찌루가 냉큼 나섰습니다.

“애꾸 대장님,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생존권도 지켜주세요.”

“뭐, 생존권?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를 좀 적게 잡아먹으라고요.”

“적게 잡아먹어? … 야! 우린 먹어야 살고 너희는 우리 먹이잖아. 몰랐어?”

애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늑대의 수를 좀 줄이면 되잖아요?”

“늑대를 줄이라고? 얼마나? 아니, 어떻게?”

애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습니다.

“저, 대장님… 늑대가 새끼를… 절반만 낳으면…….”

산양은 여전히 말을 더듬으며 조심했습니다. 혹시 애꾸의 기분이 상할까 싶어 마치 살얼음을 밟듯이 긴장했습니다.

“좋아. 내 한 번 생각해 보마. 그건 그렇고 며칠 전에 가져왔던, 그… 이름이 뭐랬지?”

“칡즙과 꿀 말인가요?”

“그래, 맞아. 그거 좀 더 갖고 와. 먹는 걸로 쩨쩨하게 굴지 말고 새알도 더 가져와.”

이제 애꾸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다음날 좀 더 가져온 뇌물을 칸과 창코와 짝귀에게도 조금씩 나눠 줬습니다. 물론 입단속을 단단히 하면서 말입니다. 애꾸는 이렇게 귀한 것을 나누어주면 부하들의 충성심이 더 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뇌물을 숨기기에는 짝귀가 담당하는 먹이 보관소가 안전하니까요. 자기 집에 두었다가 들키면 피할 방법이 없거든요.


11. 백호 대왕의 생일

풍성한 가을입니다. 백호는 생일을 며칠 앞두고 애꾸를 불렀습니다.

“어이, 애꾸 대장. 며칠 후면 내 생일인데 말이야…….”

“네네, 대왕님. 저는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실 애꾸는 백호의 생일을 모르고 있었지만 아는 척했습니다. 그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 아부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뭐 좀 신나는 일이 없을까?”

“당연히 있어야지요. 대왕님의 거룩한 생신을 맞이하여 성대한 잔치를 열겠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고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 자리로 돌아온 애꾸는 창코를 불렀습니다. 창코는 전략적으로 유능한 참모니까 이럴 때는 꼭 필요합니다. 창코의 제안으로 ‘백호 대왕님 생신 축하잔치 대책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애꾸는 스스로 대책위원장을 맡아 어깨에 힘만 주고, 모든 준비는 창코가 맡았습니다.

창코는 칸을 불러서 늑대들의 무술 경연을 준비시켰습니다. 또 산양에게는 초식이들의 춤과 노래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찌루에게 술을 만들라 했고, 짝귀에게는 음식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고라니에게는 넓은 연잎으로 부채를 만들게 했습니다.


드디어 백호 대왕의 생일이 밝았습니다. 숲 속의 모든 동물이 다 모였지만, 어떤 늑대도 초식이를 사냥할 수는 없었습니다. 초식이들은 전부 백호 대왕의 소유이므로 함부로 잡으면 안 됩니다.

“크하하!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 오늘은 모두 많이 먹고 즐기도록 하라.”

백호는 흡족한 기분으로 호탕하게 웃고 거침없이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초식이들에게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애꾸의 건의에 따른 것이고, 애꾸는 창코의 의견을 들었던 것입니다.

백호는 대책위원장인 애꾸를 불러서 꿩고기를 권했습니다. 먹다가 남긴 고기가 아니라 통째로 주는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애꾸 대장, 자네가 고생이 많았구먼. 자, 많이 먹도록 하게.”

“네네, 대왕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에 개발한 술인데 한 번 맛을 보십시오.”

백호는 애꾸가 부어주는 머루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새콤달콤한 게 아주 맛있구먼.”

백호는 처음 보는 맛에 반해서 꽤 많이 마셨습니다. 조금 후에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기분까지 무척 좋아졌습니다. 애꾸와 창코에게도 두어 잔씩 권했습니다. 나중에는 기분이 거나해져서 칸과 짝귀에게도 마시라고 했습니다.

앞마당에는 늑대들의 무술경연이 펼쳐졌습니다. 마지막 결선에서는 피를 많이 흘린 늑돌이가 다리뼈 부러진 늑찬이를 꺾었습니다.

백호는 늑돌이를 불러서 우승 축하주를 하사했습니다. 늑돌이는 머루주를 아끼듯이 홀짝거리며, 이 영광을 평생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이번에는 결선에서 아깝게 패한 늑찬이를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위로주를 기대한 늑찬이는 절룩이며 기어갔습니다. 백호는 앞발을 들어 늑찬이의 허리를 퍽 쳤습니다. 단 한 방에 늑찬이는 허리가 뚝 부러지면서 쓰러졌습니다. 생똥을 싸고 눈을 허옇게 뜬 채 죽어버렸습니다.

“이 등신 같은 놈! 어디서 똥을 싸? 크앙!”

백호가 고함을 지르자 애꾸는 창코와 칸에게 시체를 치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짝귀에게는 똥을 치우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백호의 앞발 위력에 벌벌 떨었습니다.

잠시 후에 초식이들의 댄스 공연 순서가 되었습니다. 연습도 부족했지만 바짝 겁까지 먹어서 춤사위가 이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옆 친구의 발을 밟거나 휘청거리며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노래 공연도 벌벌 떨면서 엉망이었습니다.

백호는 공연 책임자인 산양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야, 이놈아! 넌 도대체 어떻게 연습시켰어? 춤이고 노래고 엉망이잖아?”

“대왕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그럼 죽어야지. 이리 나와!”

“아이고, 대왕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다면서 살고는 싶어?”

“네, 그저 목숨만…….”

산양은 방금 늑찬이가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온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백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취한 탓인지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습니다. 산양은 큰 위험에 빠졌습니다.

바로 그때 찌루가 나섰습니다. 겁은 났지만 여기에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산양이 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왕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요.”

“누구냐? 꼬마 넌… 사슴 새끼 아니냐?”

“네, 저는 찌루라고 하는데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찌루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섰습니다.

“그래.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이구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울지 말고.”

“사실 산양 할아버지는 춤과 노래를 열심히 연습시키려고 했어요. 하지만 다른 일이 워낙 많아서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다른 일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네, 칡즙과 머루주 만들기만 해도 엄청 바쁜데, 새알을 거두고 꿀까지 생산하려니 시간이…….”

“잠깐! 새알은 무엇이며 꿀은 또 어떤 거냐?”

순간 애꾸는 간이 철렁했습니다. 새알과 꿀의 비밀이 밝혀질 위기입니다. 백호는 우렁찬 목소리로 애꾸를 불렀습니다.

“여봐라, 애꾸야! 이게 무슨 말이냐? 새알과 꿀이란 어떤 거냐?”

애꾸는 술이 확 깼습니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겨우 정신을 차려 둘러댔습니다.

“아이고, 대왕님. 더운 날씨라서 새알은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꿀은… 저… 부패할지도 모르니까 제가 관찰하느라… 지금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부패? 관찰? 이거 도대체 무슨 소리야?”

백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애꾸는 핑계를 찾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그럼, 꿀이란 것도 먹는 것이냐?”

“네. 하지만 부패와 독성이 걱정되어서… 아직 보관하며 관찰을…….”

“보관이라고? 그래, 어디에 보관했느냐?”

“저… 먹이 보관소에 보관했는데요. 그곳은 짝귀가 담당이라서…….”

“좋아, 짝귀 이리 나와 봐.”

짝귀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왔습니다.

“여봐라, 짝귀! 먹이 보관소에 꿀이 얼마나 있느냐?”

백호가 근엄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이럴 때는 수염이 빳빳해지고 눈빛은 불이 튈 듯합니다.

“네, 대왕님. 본래 다섯 개의… 통에 꿀이 들어있었는데… 두 통은 벌써… 애꾸 대장이 다 퍼먹었습니다.”

짝귀는 사실대로 말해버렸습니다. 물론 술에 취한 탓도 있지만, 이참에 애꾸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도 퍼뜩 들었습니다.

“뭐라고? 애꾸가 두 통을? 나에겐 한 통도 가져오지 않고… 이런 죽일 놈!”

“아이고, 대왕님. 그게 아니고요, 제가 위험성을 관찰하느라 그랬습니다.”

애꾸는 벌벌 떨면서 계속 핑계를 댔습니다.

“닥쳐라, 이놈! 그게 위험하다면 넌 어떻게 두 통이나 처먹었어?”

백호의 추궁에 애꾸는 온몸이 떨렸지만, 정신을 모아서 급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대답이 늦으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닙니다. 저 혼자만 먹은 게 아니고… 창코와 칸도 먹고, 짝귀도…….”

“뭐라고? 이런 쳐 죽일 놈들! 나만 쏙 빼고 너희끼리? 여봐라! 칸과 창코도 끌어내라.”

근위병들이 칸과 창코를 끌어냈습니다. 짝귀는 이미 꿇어앉아 있으니까 모두 잡힌 것입니다.

바로 그때, 유능한 전략가 창코가 나섰습니다.

“위대하신 대왕님. 노여움은 옥체에 해로우니 고정하시고 제 말씀을 좀…….”

“그래, 할 말이 뭐냐? 창코!”

“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목이 타서…….”

창코는 정말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개울에 엎드려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겨우 갈증을 해결하는 그 짧은 순간에 창코는 빨리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래. 이 기회에 애꾸를 없애버리자. 아니면 내가 죽어.’

창코는 속마음과는 달리 아주 불쌍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대왕님. 저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애꾸 대장의 명령으로 위험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것이 꿀이라는 사실도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이름조차 모르는 위험한 것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목숨 걸고 먹었습니다. 저희는 애꾸 대장의 실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대왕님 몰래 빼먹은 것처럼 오해받으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살펴주십시오, 자비로우신 대왕님!”

참모 부장인 창코가 화려한 언변으로 애꾸를 배신하는 순간입니다.

“으음, 과연 그렇구나. 너희는 애꾸의 실험 도구였으니 죄가 없어. 애꾸 저놈이 죽일 놈이지. 애꾸 너, 이리 와!”

애꾸는 덜덜 떨면서 백호 앞으로 기어갔습니다. 백호가 오른쪽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습니다. 그 앞발에 한 방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애꾸는 납작 엎드려 싹싹 빌었습니다. 오줌을 질금질금 싸면서 애원했습니다.

“대왕님, 살려주십시오. 한 번만 살려주시면 이 목숨 다 바쳐서 충성하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그래? 목숨 다 바쳐 충성한다고? 좋아, 어떻게 충성하는지 한 번 지켜보겠어.”

백호는 근위병들에게 명령하여 애꾸를 지하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조금 전에 죽은 늑찬이처럼 생똥이라도 싸면 잔치 분위기를 망치니까요.

이것으로 백호의 생일잔치는 끝났습니다. 애꾸만 갇히고 창코와 칸과 짝귀는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찌루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용기 있는 발언으로 산양과 공연 팀들을 모두 살렸기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나중에 창코는 박달나무를 긁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찌루 덕분에 모두 살았어. 똑똑한 사슴이야.’


12. 백호 대왕의 죽음

애꾸는 감옥에 갇혀 날마다 이를 갈았습니다.

‘짝귀 네놈이 나를 배신해?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네놈부터 요절내겠어. 창코 이놈도 감히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여우 놈 주제에 은혜도 모르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한편, 소심한 짝귀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아, 큰일이야. 그날 백호 대왕이 애꾸를 죽였으면 딱 좋았는데…….’

창코도 역시 짝귀처럼 숨통이 막히도록 답답했습니다.

‘애꾸가 이번에 끝장났어야 했는데……. 뒷일이 정말 걱정이야.’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도 백호는 아주 편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꾸 대신에 창코를 경호 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여우를 2인자로 올렸지만 아무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창코는 경호 대장의 첫출발로 가장 힘센 검정말을 한 마리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검정말을 ‘1호 흑마’라고 이름 붙여 백호에게 바쳤습니다.

백호는 걷는 것보다 말을 타고 다니니까 훨씬 편하고 좋았습니다. 흰 호랑이가 검은색 말을 타고 다니니까 아주 멋지게 보였습니다. 더운 낮에는 고라니에게 연잎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게 하고 낮잠을 즐겼습니다. 샤워도 스스로 하지 않고 수달에게 시켰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명령만 내리면 다 해결되니까요. 아니, 명령하기 전에 창코가 먼저 알아서 척척 해주니까요.

시간이 흐르자 백호의 몸은 자꾸만 무거워졌습니다. 비만 체형이 되더니 나중엔 당뇨병까지 걸렸습니다. 술과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사냥이나 운동을 하지 않으니까 당연하지요. 백호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졌습니다. 너무 피곤하여 움직이기 싫었습니다. 또 안 움직이니까 더 피곤했습니다. 이런 식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창코는 충성을 가장하여 백호에게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대왕님. 지금 대왕님께는 운동이 꼭 필요합니다. 몸을 너무 적게 움직이시면 건강이 자꾸 나빠집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왜? 내가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게야?”

백호는 입이 찢어질 듯이 하품하더니 눈을 껌뻑이며 물었습니다.

“저… 당뇨병이라고 하는데, 자꾸만 피로를 느낍니다. 꼭 운동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피곤하니 잔소리 그만해.”

그런데 사실은 백호가 창코의 계략에 걸려든 것입니다. 창코는 백호를 위한답시고 기름진 음식을 자꾸 차렸습니다. 사슴고기에 꿀을 발라서 올렸습니다. 맛이 최고였습니다. 백호는 요리사를 쫓아내고 창코에게 요리까지 맡겼습니다.

연한 영계로 삼계탕을 만들어 먹이니까 백호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메추리알을 삶아서 꿀에 버무려 주었더니 백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동했습니다.

“창코는 정말 대단한 충신이야. 비록 여우지만 늑대 열 마리보다 낫군.”

이제 백호는 창코가 요리하는 음식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창코는 무서운 계략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흐흐. 만약에 백호 대왕이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애꾸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끝장난 운명이고… 칸은? 그 녀석은 머리가 나쁘니까… 가만있자. 칸은 나중에 내가 왕이 되면 경호 대장으로 쓰자. 멍청해도 힘 하나는 좋으니까.’

창코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혼자서 실실 웃었습니다. 그때 짝귀가 왔습니다.

“경호 대장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짝귀는 요즘 부쩍 창코에게 굽실거리며 고분고분합니다. 권력의 이동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자네는 앞으로 나랑 마음 맞추어 잘해보자고.”

“그럼요. 저는 처음부터 경호 대장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몇 마디 더 아부하던 짝귀가 돌아가자 창코는 상상을 계속했습니다.

‘흐흐. 백호만 죽이면 누가 있는가? 나밖에 없구먼. 그래, 내가 대왕이 되는 거지.’

창코는 사흘이나 고민한 끝에 백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창코는 독초를 캐서 삼계탕에 넣었습니다. 백호가 삼계탕을 제일 좋아하니까요.

“위대하신 대왕님. 옥체를 위하여 삼계탕에 최고의 약초를 넣었습니다.”

“그래? 무슨 약초냐?”

“예, 부자라고 하는 귀한 것인데 이걸 드시면 회춘하시게 됩니다.”

“회춘이라고? 다시 젊어진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대왕님. 따뜻할 때 얼른 드십시오.”

“그래, 알았네. 자넨 역시 충신이야. 가만… 그러지 말고 자네도 같이 좀 먹지.”

백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이키! 이게 무슨 말이지?’

창코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냉정함을 회복했습니다. 역시 상황 판단이 빠르니까요.

“대왕님, 신하로서 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왕님께서 먼저 드시고 혹시 남으면 제가 조금 먹겠습니다.”

“음, 그래? 그럼 나부터 먼저 먹고 조금 남겨주겠네.”

백호는 흐뭇하게 웃더니 삼계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반 그릇도 먹지 못하고 심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속이 뒤틀리고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피를 토했습니다.

“대왕님, 어떻습니까? 속이 뜨끈뜨끈하지요?”

창코는 느물 느물 웃으면서 백호를 조롱했습니다.

“네 이놈! 음식에… 무엇을…….”

백호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짓말처럼 죽어버렸습니다. 축 늘어진 주검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창코는 백호를 올라타고 앉아 뺨을 철썩 때리고 코를 할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호의 불알을 물어뜯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백호를 꺾은 통쾌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창코는 후박나무를 긁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대권을 잡았노라. 이제 창코 대왕의 시대가 시작되노라.”

그때 이 모든 상황을 멀찍이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영리하지만 언제나 조용히 움직이는 찌루입니다.

----1부 끝----원고지 167매


제2부


1. 창코 대왕의 시대가 열리다

창코는 죽은 백호의 머리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며 소리쳤습니다.

“여봐라! 모두 모여라. 이제 나 창코가 대왕이 되었노라. 캐해행!”

목소리가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크게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짝귀는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습니다. 백호 대왕은 길게 뻗어 있고, 창코가 그 머리를 깔고 앉아서 술을 마시다니! 더구나 백호의 코와 입은 피범벅이 되어 있고, 사타구니에도 피가 질펀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니, 경호 대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적군이 쳐들어왔습니까?”

짝귀는 한쪽뿐인 귀를 파르르 떨면서 물었습니다.

“적군? 아니야.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셨지.”

“정의의 용사라니요? 그게 무슨…….”

“흠! 백호의 공포 정치를 끝장내기 위해 나 창코가 하늘의 명령을 따랐지.”

창코의 말에 짝귀는 머리가 띵했습니다.

“그럼, 경호 대장님이 백호 대왕을 이렇게…….”

“맞아. 내가 백호를 지옥으로 보내버렸지.”

“어떻게 여우가… 호랑이를…….”

“내가 말이야. 백호의 불알을 번개처럼 물어뜯었지. 단 한 방에 끝냈어!”

창코는 자신의 날쌘 전투력으로 백호를 꺾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짝귀는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리며 말했습니다.

“창코 대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맙군, 짝귀. 이제 곧 내가 대왕이 될 거니까 자넨 나에게 충성하게.”

창코는 짝귀를 ‘창코 대왕 즉위식 준비위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창코는 치밀한 셀프 전략을 짜서 짝귀에게 지시했습니다. 짝귀 위원장은 젊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모아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부하들로 하여금 이 역사적인 사실을 숲의 구석구석에 널리 알리게 했습니다.

<백호 대왕이 술에 취하여 창코 경호 대장을 불렀다. 백호 대왕은 요즘 늑대들의 충성심이 약하다고 화를 내면서 다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면 경호 대장부터 죽이겠다고 치사하게 협박했다.

경호 대장이 목숨까지 걸고 말렸으나 백호 대왕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경호 대장의 충정을 의심하고 모욕까지 주었다. 경호 대장은 숲 속 나라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용감하게 선제공격을 했다. 경호 대장은 자신만의 공격 비법으로 폭군의 불알을 물어뜯고 나라를 구했다. 이것은 난세에 영웅이 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숲 속 나라를 밝힐 태양이 될 것이다.>

소문을 듣고 늑대들이 모두 몰려왔습니다. 창코는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술기운을 빌려서 태연한 척했습니다. 늑돌이가 먼저 물었습니다.

“경호 대장님이 정말 백호 대왕을 죽였나요?”

“그렇다네. 내가 여러분과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 걸고 백호를 공격했다네.”

늑돌이는 백호의 시신을 보았습니다. 정말 백호의 사타구니는 피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늑돌이는 얼른 머리를 굴렸습니다.

‘창코는 보통 여우가 아니다. 호랑이 잡는 여우라면 하늘이 내린 존재가 틀림없다. 나도 살기 위해서 여기에 줄을 서야겠다.’

마음을 굳힌 늑돌이는 창코에게 절하면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다른 늑대들도 모두 엎드려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창코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술을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흐흐, 됐어. 모든 늑대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구나. 이제 즉위식만 올리면… 가만있자. 칸은? 그놈은 왜 여기에 안 왔지?’

바로 그때, 낮잠이라도 자고 오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칸이 나타났습니다.

“어? 왜 모두 여기에 모여 있나… 요?”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으로 부하들을 둘러보지만 질문은 창코에게 했습니다. 창코가 입맛만 다시면서 대답을 안 하니까, 그제야 칸이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백호 대왕을 보고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흰색 털에 묻어있는 뻘건 피는 더욱 끔찍해 보였습니다.

“아니, 대왕님이 왜 저렇게…….”

깜짝 놀라는 칸에게 짝귀가 빠르고도 낮게 말했습니다.

“훈련 부장님, 어서 고개 숙이고 엎드리세요.”

“왜? 누구에게 숙이라고?”

세상에서 백호만 무서워하던 칸이 지금은 누구에게 고개 숙여야 하는지 얼른 판단을 못 했습니다. 짝귀는 좀 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창코 경호 대장님이 백호 대왕을 꺾었습니다.”

“뭐라고? 경호 대장이 대왕님을? 아니, 여우가 호랑이를 잡았다고? … 하, 참!”

칸이 어이없어하자 창코가 눈에 힘을 주면서 헛기침을 했습니다.

“어험! 험!”

“이거야, 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

칸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엉거주춤하게 앉았습니다. 마지못해 고개까지 숙이면서 나중에 좀 더 알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창코는 입술을 비틀면서 빙긋 웃었습니다. 목소리를 착 깔아서 한껏 무게도 잡으면서 천천히 말했습니다.

“짝귀 준비 위원장은 들으시오. 지금부터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대왕즉위식을 거행토록 준비해 주시오. 나는 급히 서두를 마음이 없지만,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대왕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겠소. 내 뜻을 알겠지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뭐요? 무슨 말을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소?”

창코는 말과는 달리 즉위식이 급한데 짝귀가 꾸물거리니 답답했습니다.

“저… 그럼. 백호 대왕님의 장례식은…….”

“이것 보시오, 준비 위원장! 죽은 대왕이 뭐 그리 중요하오? 죽은 대왕에게 얽매이다 보면 자꾸 과거로 돌아가지 않소? 우리는 미래를 향해 빠르고 힘차게 전진해야만 하오!”

창코의 말에는 미래지향성이라는 설득력도 있습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 그래도 장례식이라도 성대하게…….”

“장례식은… 짝귀 부장은 즉위식 준비로 바쁠 테니까 칸 부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으시오. 그리고 장례식은… 에, 오늘 중으로 끝내시오.”

창코의 일방적이고 빠른 지시에 칸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내가 장례위원장을 맡아요? … 그것도 오늘 중으로 끝내요?”

“그렇소. 오늘 중으로 끝을 내시오. 오래 끌면 기분 잡치니까 썩기 전에 치우시오”

그렇게 강한 어조로 지시하던 창코가 갑자기 말을 바꾸었습니다.

“에~ 저 하늘의 구름을 보시오. 위에 있는 작은 구름은 나를 닮았지요? 또 그 아래에 있는 큰 구름 덩이는 국민 모두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잖소? 저건 세상을 이끌아 갈 나에게 여러분의 충성을 촉구하는 하늘의 명령이란 말이오.”

하늘을 올려다보니 딴에는 그렇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머리 빠른 연설가에게 어리석은 대중들이 집단 최면에 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서서히 움직였습니다. 잠시 후에 작은 구름이 큰 구름에게 붙어버리자 칸이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저건 어찌 된 것입니까?”

“아, 저거요? 저건… 대왕이 백성들을 껴안아주는 모습이지요. 모두가 한 덩어리로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오. 물론 하늘의 명령이 틀림없소.”

과연 창코의 재치와 표현력은 대단합니다. 홀린 듯이 듣고 있던 짝귀가 갑자기 외쳤습니다.

“창코 대왕님의 성은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성은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모든 늑대와 여우들이 짝귀를 따라서 일제히 복창했습니다. 칸도 비록 입술만 달싹거릴 정도였지만 복창하는 모양새를 보였습니다.

창코는 짝귀가 고마웠습니다. 처음으로 자기에게 ‘창코 대왕님’이라고 불렀으니까요. 그것도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창코는 즉위식을 마치면 짝귀를 경호 대장으로 승진시키려고 생각했습니다. 정상적으로 하면 칸을 경호 대장으로 올려야 하겠지만, 힘만 세고 머리 나쁜 칸이 미덥지 않았습니다.

백호 대왕의 장례식은 칸의 책임으로 해지기 전에 끝이 났습니다. 왕의 장례식이라 해도 땅 파고 묻어버리는 초라한 작업이었습니다. 울거나 우는 척이라도 하는 동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짝귀는 창코의 급한 속내를 짐작하여 바로 다음 날에 대왕 즉위식을 열었습니다. 숲 속 나라의 육식이들과 초식이들을 다 참석하게 했습니다.

짝귀는 생각했습니다.

‘흐흐. 돌대가리 칸은 죽은 호랑이나 치우지만, 나는 떠오르는 태양의 즉위식을 하지.’

짝귀는 칸을 능가하는 자기의 정치력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성대한 즉위식을 진행했습니다. 술과 맛있는 음식을 모든 참석자에게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늑대들의 무술 경연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같은 거룩한 축제에 피 흘리는 싸움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에 춤과 노래 공연을 시켰습니다. 지난번처럼 살벌한 분위기가 아니고 흥겨운 축제라서 공연은 무척 훌륭했습니다. 모두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창코는 즉위식이 끝난 후에 산뽕나무를 발톱으로 긁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나 창코 대왕은 새로운 세상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노라.”

이때도 찌루는 멀찍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고 있었습니다.

2. 칸의 능력

창코는 즉위식 바로 다음 날에 육식이 총회를 열었습니다.

“에, 사랑하는 육식이 여러분! 우리는 한배를 탄 동지로서 초식이들을 잘 지켜야 하오. 초식이들은 우리의 식량이므로 그들의 수가 많아져야 우리의 생존과 행복이 가능하지 않겠소? 그래서 나는 중대한 정책을 발표하겠소.

첫째, 초식이들이 잘 번식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하오. 예를 들면 초식이들이 잘 먹는 풀의 주변에 집중적으로 똥오줌을 싸야 하겠소. 그것은 최고의 거름이 되니까요.

둘째, 우리의 식량을 노리고 있는 들개들을 물리쳐야 하오. 이 임무를 위해서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훈련하여 강력한 전투력을 키워야 할 것이오.

결론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나 창코 대왕이 앞장설 테니 동지 여러분도 힘을 모아서 도와주기 바라는 바이오. “

창코가 능숙하게 연설을 마치자 모든 육식이들이 기립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창코 대왕님 만세! 만세!”

모두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뜬 분위기였지만, 칸의 눈빛은 달랐습니다.

‘이거 참! 어쩌다가 우리가 저따위 여우 놈에게 충성하게 됐나? 내가 그냥 콱 물어 죽일까? 아니야, 저놈은 보통 여우가 아니야. 단 한 방에 백호를 물어 죽였다니까…….’

칸의 갈등은 좀 복잡했습니다. 창코에게 충성하면서 서열 2번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창코와 한 판 붙을 것인가로 고민했습니다.

이윽고 창코가 대왕으로서 간부들의 직책과 역할을 발표했습니다.

“에,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역할 분담이 필요할 것이오. 맨 먼저 칸 부장을 경호 대장으로 승진합니다. 짝귀는 훈련 부장이 되어서 군사들의 훈련을 담당하시오. 늑돌이는 징세 부장으로 임명하니까 매일 먹이를 잘 거두어 오시오. 산양은 관리 부장을 맡아서 초식이들의 번식과 성장을 잘 챙겨 주시오. 마지막으로 찌루는 나의 비서실장이 되어서 좋은 역할을 해주기 바라오.”

이 역할 분담은 창코가 어젯밤에 깊이 고민한 결과물입니다.

회의 마치고 모두 돌아가자 창코는 산수유나무에 발톱으로 긁으면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됐어. 칸을 서열 2번으로 올려서 불만을 줄였어. 그리고 다른 부장들에게 힘을 나누어 준 것은 정말 좋은 방법이야.”

오후에 초식이들이 모였습니다. 맨 앞에서 멧돼지가 괄괄한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는 언제까지나 저 육식이들의 먹이가 되어야 합니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육식이들과 한 판 붙어버립시다.”

“옳소! 후손을 위해서 온몸을 던져 싸웁시다.”

동조하는 동물은 덩치가 큰 들소입니다. 하지만 산양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초식이라서 육식이에게 이길 수가 없어요. 우선 이빨 구조부터 달라서…….”

“그만두시오. 영감! 이빨이 그렇다면 발로 차면 되잖소?”

성미 급한 백마의 고함입니다. 맞습니다. 말의 뒷발차기는 파괴력이 아주 셉니다. 다만 전략이나 훈련이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용기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찌루가 나셨습니다.

“말은 발로 차고 멧돼지와 들소는 뿔로 싸울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요?”

찌루의 말에 고라니, 너구리, 다람쥐, 토끼와 같이 작은 초식이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오랜 시간의 토론 끝에 산양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관리 부장으로서 토론을 정리하겠습니다. 대표단이 창코 대왕을 방문하여 우리의 뜻을 밝히고 강력히 항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표단? 그게 누구지?”

모두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명분이 아무리 확실해도 용기가 없으면 허사입니다. 산양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에, 대표단은 나와 찌루 비서실장이 당연히 앞장섭니다. 그리고 멧돼지와 들소가 포함됩니다. 나머지는 아무도 빠지지 말고 모두 대표단의 뒤에 줄 맞추어 섭니다. 여러분이 모두 뒷받침이 되어주어야 대표단도 힘을 얻습니다.”

회의를 마칠 때의 분위기는 바람이 빵빵한 풍성처럼 부풀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오전에 항의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목소리가 제일 큰 멧돼지의 선창에 따라서 모두 복창을 했습니다.

“창코 대왕은 우리의 생존권을 지켜 달라!”

“지켜 달라! 지켜 달라! 지켜 달라!”

“우리의 생명도 당신들만큼 소중하다!”

“소중하다! 소중하다! 소중하다!”

모두 목청껏 외칠 때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뒷줄에서 복창하고 있던 백마가 느닷없이 앞으로 뛰쳐나오면서 외쳤습니다. 대표단이 아니라서 뒤에 밀려있던 백마가 울분을 못 참고 나섰습니다.

“창코 대왕은 나와라! 이리 나와서 한판 붙자!”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들소까지 크게 외쳤습니다.

“창코 대왕은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

들소와 백마는 시위 분위기에 휩쓸려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경호 대장 칸이 나오고 짝귀와 늑돌이도 달려왔습니다.

“야! 내가 들소를 맡을 테니 너희 둘은 백마를 죽여라.”

칸은 명령을 마치자 들소의 목줄을 물고 매달렸습니다. 짝귀와 늑돌이도 백마를 물고 흔들었습니다. 들소와 백마는 약간 저항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버렸습니다.

초식이들은 벌벌 떨면서 흩어졌습니다. 모든 사태가 수습된 후에 창코가 나타났습니다.

“경호 대장, 수고 많았소. 저 들소와 말은 부하들과 나누어 먹고, 남으면 햇볕에 잘 말려서 육포를 만드시오. 캐앵~!”

창코는 백호 대왕보다 더 크게 ‘크앙’이라고 소리쳤지만 역시 ‘캐앵’이 되고 말았습니다.

“네, 대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칸은 창코의 지시에 순응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찜찜했습니다.

‘내가 왜 저 여우 놈의 지시를 받지? 나와 부하들이 이렇게 용감한데 말이야.’

칸과 달리 창코는 은사시나무에 발톱으로 생각을 입력했습니다.

‘역시 칸은 힘이 강해. 머리는 나쁘지만.’

아까부터 떨고 있던 찌루가 산양에게 살짝 말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안 돼요. 우리는 힘보다 머리를 써야 해요.”

이튿날에는 들개 무리가 쳐들어왔습니다. 큰 전쟁이 아니고 슬쩍 쳐들어온 도둑질인데, 칸과 부하들에게 당했습니다. 잠깐의 전투로 들개 다섯 마리가 죽고 두 마리는 도망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칸은 기세가 더 올랐습니다.

하지만 칸은 짝귀의 행동이 못마땅했습니다. 녀석은 늑돌이와 다른 부하들에게 명령만 내릴 뿐이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이놈을 그냥 놔두면 간덩이만 커져서 통솔이 안 되겠어. 잘라야겠구먼.’

칸은 독하게 마음먹고 짝귀를 불렀습니다.

“야! 훈련 부장. 너 이리 와봐.”

칸이 무섭게 노려보며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짝귀는 요즘 창코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태도가 예전과는 다릅니다.

“왜 그러쇼? 경호 대장이 날 찾다니, 무슨 일이오?”

“이놈 보게. 태도가 왜 이리 뻣뻣해? 좀 컸다, 이거지?”

칸은 짝귀의 한쪽 남은 귀를 콱 물었습니다. 짝귀는 죽는다고 소리치면서도 그 와중에 재빨리 생각했습니다. 창코가 백호의 불알을 공격했듯이 자기도 불알만 먼저 물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으윽, 내가 먼저 불알만 물면 이긴다.’

짝귀는 물려있는 귀가 떨어지도록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칸의 아래로 파고들었습니다. 하지만 칸은 역시 최고의 싸움꾼입니다. 칸은 파고드는 짝귀의 목덜미를 물고 힘차게 흔들었습니다. 칸의 눈에서는 불이 튀었고 잠시 후에 짝귀는 부들부들 떨면서 숨이 끊어졌습니다.

칸은 일을 먼저 저질러 놓고 창코에게 보고했습니다.

“대왕님. 방금 훈련 부장 짝귀를 처형했습니다.”

“짝귀를… 처형했다고요? 왜요?”

“네. 녀석은 들개들과의 싸움에서 비겁했고, 또 나에게 반항했습니다. 그런 놈을 살려두면 전체의 질서를 잡을 수 없습니다.”

칸은 무척 당당했고 그 눈빛은 오싹할 정도로 번쩍였습니다.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그래요? 경호 대장이 그렇게 처형했다면……, 됐습니다.”

창코는 말을 줄였습니다. 칸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칸이 돌아간 후에 창코는 낙엽송 나무를 긁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칸의 힘이 너무 커지면 안 되는데…….”

3. 창코의 위기감

짝귀가 죽자 창코는 슬그머니 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칸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숨이 답답했습니다. 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자기의 주위에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래서 영웅은 고독하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온종일 혼자서 끙끙대고 있을 때 찌루가 왔습니다. 창코는 찌루가 무척 반가웠습니다.

“대왕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오, 비서실장. 어서 오게.”

창코는 반가운 얼굴로 찌루를 맞았습니다. 창코는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하고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충성스럽던 짝귀는 이미 죽었고, 늑돌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왕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으응, 그게… 칸 경호 대장이… 너무 억세고 거칠게 행동하니까… 신경이 쓰여서…….”

“경호 대장이 싫으세요?”

“으응. 싫다기보다… 그, 뭐랄까…….”

“그럼, 무서우세요?

찌루는 핵심을 짚어서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어? 무섭긴… 내가 대왕인데 뭐가 무서워?”

“대왕님. 경호 대장은 힘만 셀 뿐이지 머리가 둔합니다. 대왕님은 지혜가 많으시니 머리로 문제를 해결하셔야 해요.”

찌루의 말에 창코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 지혜롭게 대처해야지. 그래서 자넬 비서실장으로 임명했으니 날 많이 도와주게.”

“네, 제가 충성을 다 할게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여우 또랑이가 후다닥 들어왔습니다.

“대, 대왕님! 크, 큰일 났습니다. 경호 대장이…….”

“야!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그래, 경호 대장이 왜?”

“경, 경호 대장이 여우 친구들을… 몽땅 물어 죽였습니다.”

“뭐라고? 여우 친구들을 모두 죽여? 경호 대장이?”

창코가 공포에 사로잡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칸이 씩씩대며 들이닥쳤습니다.

“대왕님, 거기 피투성이 여우 놈을 이리 보내주시오.”

“아니… 왜요? 뭣 때문에…….”

“그 녀석도 다른 여우들처럼 죽여야겠소.”

“왜요? 얘가 뭘 잘못했소?”

“요즘 여우 놈들이 모두 건방지고 버릇이 없어요. 나를 보고 인사도 안 하고 말대꾸나 또박또박하면서, 도무지 위아래를 몰라요.”

“아, 그거요? 알았소. 얘는 내 친한 친구인데 이번 한 번만 경호 대장이 용서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 아주 버릇을 고쳐야 해요. 대왕의 친구라고 그놈까지 건방지게 설칠 필요가 있습니까?”

“…….”

창코가 대답 거리를 못 찾고 있는데, 칸이 오더니 또랑이를 물고 흔들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찌루가 창코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대왕님, 겁먹지 말고 눈에 힘을 넣으세요. 그리고 칸의 불알만 노려보세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창코는 찌루의 말대로 했습니다. 턱을 가슴 쪽으로 당기면서 눈에 힘을 딱 주고 칸의 불알 쪽만 노려보았습니다.

또랑이를 물어 죽인 칸은 그 상황에서도 창코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백호의 불알을 단번에 물어뜯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칸은 갑자기 불알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고 슬금슬금 나가버렸습니다.

“휴~.”

창코는 칸에게서 느껴왔던 공포감을 처음으로 극복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창코는 밤늦도록 찌루와 작전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칸을 불렀습니다.

“대왕님, 불렀습니까?”

고개를 크게 끄덕인 창코는 칸의 불알을 노려보았습니다. 칸은 창코의 시선을 의식하니까 불알이 졸아들면서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자꾸만 덜덜 떨렸습니다.

“경호 대장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지금까지 나를 위해 고생한 것은 인정하오. 그런데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혼자서 벌을 내리지 마시오. 벌이나 상은 내가 결정할 것이니 경호 대장은 내 결정에 따라서 처리만 하시오.”

“…….”

칸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자꾸만 떨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소. 앞으로 경호 대장은 서열 2번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라고요?”

칸이 겨우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서열 2번이 싫소?”

창코는 칸의 사타구니를 노려보며 물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창코는 굵은 오동나무에 발톱으로 직직 긁더니 칸에게 사인하라고 했습니다.

“대왕님, 이게 뭡니까?”

“이건 방금 약속한 걸 잘 지키겠다는 각서라고 하오. 거기에 사인하고 앞으로는 꼭 지켜야만 하오.”

“사인은 어떻게 합니까?”

“그냥 여기에 발톱으로 긁으면서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맹세하시오.”

칸은 창코가 시키는 대로 오동나무에 사인했습니다. 또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라고 소리 내어 맹세까지 하고는 물러갔습니다. 졸아든 불알을 가리면서 급하게 나갔습니다.

“자, 이제 칸은 각서에 사인까지 했으니 꼼짝없이 내 명령을 따르겠지.”

창코가 모처럼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찌루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습니다.

“아니에요, 대왕님. 칸을 완전히 믿으시면 곤란해요. 본래 무식하면 용감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지?”

창코와 찌루는 또 오랫동안 회의를 했습니다.


이틀 후에 창코는 지하 감옥으로 애꾸를 찾아갔습니다. 애꾸는 창코를 보더니 배신당했던 순간이 되살아나서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이놈, 창코! 내가 나가면 널 죽일 거야.”

창코는 가만히 있고 찌루가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애꾸 양반!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소. 위대하신 우리 창코 대왕님께서 백호를 한 방에 끝장내고 새로운 대왕으로 오르셨소.”

“뭐, 뭐라고? 저 여우 놈이 대왕이라고?”

“말을 삼가시오. 여우 놈이 아니고 창코 대왕님이오. 지금 칸도 경호 대장을 맡아 대왕님께 충성을 다 하고 있소.”

“칸이 여우에게… 창코에게 충성을 해? 어떻게 그런 일이…….”

최고의 싸움꾼인 칸이 조그만 여우에게 충성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오. 내 말을 잘 들어보시오.”

찌루가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히 설명하자 애꾸는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백호 대왕이 그렇게 허약했소?”

애꾸는 아무래도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그건 우리 창코 대왕님의 필살 비법이 센 것이지 백호가 허약한 게 아니오. 단 한 방이면 끝나는 비법이오.”

찌루가 불알 공격에 대해 다시 강조했습니다. 애꾸는 갑자기 불알을 가리면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애꾸는 순식간에 순한 양처럼 변했고, 창코는 어깨에 힘주며 말했습니다.

“에, 그러니까 내가 대왕으로 등극한 기념으로 그대를 석방할까 하오.”

“네? 아이고! 창코… 아니 대왕님! 고맙습니다. 석방만 해주시면 최고의 충신이 되겠습니다. 그럼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애꾸는 세 번이나 넙죽 절을 했습니다.

“좋소. 그럼 며칠만 더 기다리시오. 내 곧 좋은 소식을 전하리다.”

거만스러운 몸짓으로 나가는 창코의 뒤에서 애꾸는 계속 큰절을 했습니다.

창코는 돌아와서 졸참나무에 발톱 자국을 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애꾸와 칸에게 충성 경쟁을 시키라고 했지? 역시 찌루는 현명해.”

4. 숲 속 공화국 건설

창코는 찌루를 불렀습니다.

“비서실장,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네. 이젠 숲 속 나라의 법을 만들어야 해요. 법을 잘 만들어야 합법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거든요.”

“법을 만들어? 무슨 법을 어떻게 만들지?”

“그 법은 제가 초안을 잡아오겠어요.”

그날부터 찌루가 법의 초안을 만들었는데 기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1조: 이 나라는 숲 속 공화국이라 부르며 권력 구조는 대왕 중심제로 한다.

제2조: 소왕을 비롯한 간부와 국민은 대왕에게 무조건 충성한다.

제3조: 소왕의 임기는 4년이며 모든 국민이 선거에서 뽑는다.

제4조: 세부적인 규칙은 공화국 의원 총회에서 정한다.

제5조: 공화국 의원은 대왕이 임명하되 육식이와 초식이를 9:1의 비율로 한다.

제6조: 그 밖의 급한 사항은 대왕의 명령으로 정한다.

하지만 이 초안은 큰 틀만 잡은 것이고 상세한 규칙은 의원 총회에서 정하기로 했습니다. 또 달라진 것은, ‘백성’을 ‘국민’으로 바꾼 것입니다. 창코는 현재의 간부를 모두 공화국 의원으로 임명했습니다.

공화국 의원들은 회의를 거듭하여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챙겼습니다. 특히 보수 규정과 연금 제도, 불체포 특권 등을 교묘하게 만들어서 자신들은 모두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의원을 하루라도 하면 평생 먹이를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반대가 없는 회의에서 의원들은 탐욕적인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초식이의 대표로 산양이 참석했지만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규칙에 반대하는 초식이를 먼저 잡아먹거나 지하 감옥에 가둔다는 규칙도 만들었습니다. 초식이들은 모두 농장에 출근하여 작업을 하는데 육식이들의 감시와 감독이 지독합니다. 잠깐만 꾸물거리면 다리를 물립니다. 초식이들은 나날이 고생이 더 심해졌습니다.

평생 말없이 조용하던 찌루의 엄마가 어느 날 말했습니다.

“여긴 우리의 천국이었는데 이제는 악마의 규칙으로 지배되는구나. 너무 무서워.”

“엄마. 조금만 더 참아 봐요. 제가 곧 해결책을 찾을 거니까요.”

찌루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며칠 후에 찌루는 소왕 선거 규정을 만들어서 창코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소왕 선거를 열흘 앞두고 창코와 찌루는 지하 감옥의 애꾸에게 갔습니다.

“아이고, 대왕님. 이런 누추한 곳에 또 오셨습니까?”

애꾸는 다정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렇소. 이제 이 누추한 곳에서 그대를 석방할 때가 되었소.”

“네? 석방이요? 언제입니까?”

“우선 내 말부터 잘 들으시오.”

창코는 목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석방되면 즉시 소왕 선거에 나가서 칸을 이겨야 하오. 소왕은 법으로 보장하는 공화국의 2인자가 되지만, 혹시 선거에서 패하면 경호 대장이 되어 나를 경호하시오. 어쨌거나 나에게 충성한다는 각서에 서명하시오.”

돌배나무를 발톱으로 긁어서 만든 충성 각서에 애꾸가 역시 발톱으로 서명했습니다. 창코가 마지막으로 주의를 시켰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배신하면 불알 물어뜯기고 죽는다는 걸 명심하시오.”

“아이고, 배신이라뇨?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네네, 그럼요.”

애꾸도 칸처럼 불알 공격을 무서워했습니다. 백호까지 죽여 버린 공격의 비법이라는데 왜 안 무섭겠습니까?

드디어 애꾸가 석방되었습니다. 애꾸는 자신을 배신했던 3인방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창코는 지금 자신이 충성해야 할 대왕이 되어있고, 칸에게는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압니다. 백호 대왕의 배경이 없어진 지금은 칸이 엄청나게 두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짝귀가 남았습니다. 그놈이 다 폭로해 버린 악몽의 순간을 떠올리니 화딱지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짝귀는 어디 있느냐? 배신자 짝귀는 이리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애꾸가 고함을 지르자 찌루가 말했습니다.

“하하하. 짝귀는 이미 죽었어요.”

“죽다니? 어떻게?”

“칸 경호 대장이 물어 죽였지요.”

“뭐라고? 칸이 죽였다고? 제가 뭔데 내 원수를 물어 죽여?”

애꾸는 짝귀에게 직접 복수하고 싶었는데 칸에게 선수를 뺏겨서 분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좋아, 칸은 소왕 선거에서 당당하게 이겨주겠어.’

사실 힘으로 싸운다면 겁나지만 선거 제도가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창코 대왕도 자기편이라는 믿음이 있으니 이길 것 같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 이긴다면 그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다음 날부터 애꾸는 선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창코의 지시에 따라서 찌루가 선거 공약과 연설문도 몰래 만들어 주었습니다.

선거일 닷새 전에 후보자 합동 연설회가 열렸습니다. 창코의 명령으로 연설회에는 모든 국민이 다 모였습니다. 추첨 순서에 따라서 칸 후보가 먼저 연설대에 올랐습니다.

“에, 나는 여러분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힘이 세기 때문에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적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있는 나를 찍어주십시오.”

대충 이런 식의 연설인데 너무 짧아서인지 박수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꾸의 연설은 세련되고 유창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초식이들의 생존권을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먼저 육식이들의 번식률을 낮추도록 법을 만들겠습니다.”

초식이들은 모두 환영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반면에 육식이들의 표정은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육식이 여러분! 계곡을 쉽게 건너 다니도록 다리를 놓겠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계곡 건너는 일이 얼마나 불편했습니까? 또한, 육식이들의 세금을 대폭 줄이겠습니다.”

이 공약을 듣고 육식이들도 모두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날을 정해서, 그날은 칡즙과 꿀을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식이 여러분들의 풍성한 먹이를 위해서 텃밭을 더 많이 개간하고 좋은 씨앗을 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업에는 육식이들도 지원하여 힘을 보탤 것입니다.”

또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초식이들은 육식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밭을 더 만들면 식량이 많이 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육식이들은 텃밭이 잘 되어야 초식이들이 통통하게 잘 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먹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계산이 빠른 법입니다.

선거 운동 기간에 애꾸는 협동과 번영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칸은 힘을 내세우며 주먹을 흔들어댔습니다.

드디어 선거 당일, 모두 넓은 공터로 모였습니다. 선거의 방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동쪽 끝에 애꾸 후보가 서고 서쪽 끝에 칸 후보가 섰습니다. 창코 대왕의 신호에 따라서 지지하는 후보의 앞에 줄을 서는 방식입니다.

창코가 크게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순간이오. 자, 투표 시작!”

초식이들과 육식이들은 모두 애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칸 후보의 앞에는 늑대 네 마리만 달랑 섰습니다. 그나마 그들도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다가 애꾸 후보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누구든지 가라앉는 배는 타지 않으니까요.

선거는 득표수를 셀 필요조차 없이 확실한 승리와 완벽한 패배로 결판이 났습니다.

창코가 연설대에 올랐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공화국 대왕으로서 방금 소왕으로 당선된 애꾸 후보에게 축하의 박수를 제안하는 바이오.”

참석자들의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습니다. 선거란 자기가 찍은 후보가 승리하면 무조건 신나거든요.

“에, 이제 소왕으로 당선된 애꾸 후보에게 당선의 선물을 주겠소. 그것은 백호 대왕이 아끼던 1호 흑마요. 물론 나도 이 흑마를 타고 싶소. 그러나 소왕이 이 흑마를 타고 다니면서 더 열심히 일할 것으로 믿고 기꺼이 양보하겠소.”

창코는 역시 계략에 능했습니다. 겉으로는 축하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양보의 미덕을 가장하여 애꾸의 기분도 좋게 만듭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애꾸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질 것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애꾸는 선거 승리와 1호 흑마에 도취하여 공중에 붕 뜬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창코는 계속 말했습니다.

“에,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공화국의 대왕으로서 통 크게 잔치를 베풀겠소. 많이 먹고 즐겨주기 바라오.”

창코는 술과 음식을 화끈하게 풀었습니다. 모두 맛있게 먹고 즐겼습니다. 하지만 칸은 이빨을 갈며 애꾸를 노려보았습니다.

‘으. 내 이 치욕을 반드시 갚으리라. 언젠가는 내가 소왕이 되리라.’

칸은 소왕이 되겠다는 다짐을 할 뿐이지, 대왕이 되겠다는 야망은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오동나무 각서가 떠오르고 불알이 오그라들면서 추워지니까요.


5. 애꾸의 탐욕

창코는 대왕의 권력을 확실히 잡았고, 애꾸를 소왕으로 만들었으니 든든했습니다. 특히 영리한 찌루가 비서실장의 역할을 잘하니까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애꾸와 칸을 아래에 두는 것도 찌루의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꾸에게 유혹의 손길이 뻗쳐 왔습니다. 아침 일찍 탐탐이가 찾아온 것입니다.

“소왕님,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는데요.”

“어? 자넨 탐탐이 아닌가? 그래, 무슨 부탁이지?”

“저도 의원 자리 하나 만들어 주세요. 좋은 선물드릴게요.”

“좋은 선물이라? 그게 뭐지?”

“로열젤리 다섯 통을 드릴게요.”

“다섯 통? … 좋아, 의원 자리는 곧 만들어 줄 테니 선물부터 갖고 와.”

애꾸는 부정으로 지하 감옥에 갇혔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비밀이 잘 지켜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탐탐이가 물러간 후에 애꾸는 꼬리똥 의원을 불렀습니다.

“꼬리똥 의원. 자넨 말이야, 항상 꼬리에 똥이 묻어있어서 냄새나고 지저분해.”

“아이고, 소왕님. 그건 지난번 들개와의 전투에서 뒷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끌고 다니다 보니 똥이 묻었어요.”

“어쨌거나 자넨 비위생적이고 또 의원의 품위도 떨어지니 의원직을 사퇴하게.”

애꾸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네? 그래도 그렇지, 용감한 늑대라고 대왕님이 칭찬하시며 임명하셨는데…….”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말로 하잖아? 아니면 물어뜯고 쫓아낼 건데 말이야.”

꼬리똥은 대응할 힘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애꾸는 그 일을 창코에게 보고했습니다.

“대왕님. 꼬리똥 의원이 몇 가지 문제가 있어 의원직에서 잘랐습니다.”

“아, 그래요? 소왕이 그렇게 했다면 됐어요.”

창코는 의원직 하나 정도라면 소왕에게 통 크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꼬리똥의 후임으로는 탐탐이가 좋을 것 같습니다.”

“탐탐이요? 아니, 걔는 탐욕이 많아서 남의 것을 잘 훔친다고 했잖소?”

“그래도 걔가 낫습니다. 예절이 바르고 머리도 잘 돌아갑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아니고, 조금 빌리거나 나눠 먹는 것입니다. 워낙 입이 무거워서 말을 안 하니까 도둑질로 오해받는 겁니다.”

“그게 바로 도둑질 아니오?”

“네. 도둑질과 비슷하지만… 고의성이나 대가성이 없는 본능적 행위입니다. 하여간 그것도 좋은 버릇은 아니니까 제가 주의를 시키겠습니다.”

창코가 찌루를 보며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찌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그렇다면 소왕의 생각대로 하시오.”

창코는 애꾸를 깊이 신뢰한다는 투로 말하고, 느릅나무를 긁으며 중얼거렸습니다.

“말단 의원 자리 하나까지 간섭하면 치사한 대왕으로 보이겠지.”


뇌물에 맛 들인 애꾸는 몇 개의 자리를 더 만들었습니다.

청소 반장, 환경 본부장, 미화 위원장처럼 비슷한 직책을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뇌물을 가져오면 임명했습니다.

‘흐흐, 이제 내 위에는 대왕만 있어. 아래에는 졸개들이 충성하고 국민들이 굽실거리니 정말 권력이 좋긴 좋네. 참 재미있고 멋진 세상이야.’

애꾸는 부하들의 뇌물을 받으며 권력의 맛을 한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꼬리똥이 찾아왔습니다. 어디서 마셨는지 술도 제법 취했습니다.

“소왕님. 저도 자리 하나만 주세요.”

“자리를 달라고? 안 돼!”

애꾸는 냉정하게 잘랐습니다.

“왜 저는 안 됩니까?”

꼬리똥의 목소리에는 울분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습니다.

“자넨… 꼬리에 똥이 묻어서 지저분하고 또…….”

“좋습니다. 그럼 꼬리를 좀 자르겠습니다. 똥 묻은 부분만 자르면…….”

꼬리똥은 눈물을 글썽이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도 안 돼!”

“왜 안 됩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야! 꼬리 짧은 늑대를 상상해 봐. 얼마나 멋대가리 없겠어? 늑대 꼬리가 사슴 꼬리처럼 짧으면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어?”

애꾸가 픽 웃으며 말하자 꼬리똥은 오기가 차올랐습니다. 꼬리똥은 어금니를 한 번 꽉 깨물더니 드디어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좋소! 그럼 애꾸 당신의 비리를 고발해 버리겠소.”

“뭐, 애꾸 당신? 고발? 이런 건방진 놈… 너, 말 다 했어?”

애꾸는 약이 바짝 올라서 낯빛이 험악해졌습니다.

“그렇소. 이 판에 내가 못할 말이 뭐 있겠소? 로열젤리 받고 자리 팔아먹은 것, 다리 공사 준다면서 웅담 받고 사기 친 것, 의원복지법 만든다면서 뇌물 받은 것까지 다 고발하겠소.”

“잠깐!… 너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았어?”

“흥! 내 눈은 못 속이지.”

술기운 탓인지 꼬리똥의 말투도 바뀌었습니다.

“네놈 눈이 어떻기에 그래?”

“난 당신처럼 애꾸가 아니고 밝은 눈이 두 개나 있거든!”

“뭐, 뭐라고? 이런 죽일 놈이…….”

애꾸는 화를 벌컥 내며 날뛰고 꼬리똥은 부리나케 도망쳤습니다. 애꾸는 꼬리똥을 조금 쫓아가다가 생각을 바꾸어 늑돌이를 불렀습니다.

“훈련 부장은 지금 당장 꼬리똥을 잡아 오게.”

“네? 꼬리똥 의원을 잡아요? 불체포 특권이 있는데…….”

늑돌이가 뚱한 눈으로 물었습니다.

“그놈은 이제 의원도 아니야. 그놈은 방금 소왕 모독죄와 공갈죄를 저질렀어. 그러니까 잡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여도 괜찮아.”

애꾸는 흥분을 못 참고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늑돌이는 부하 셋을 데리고 나가서 금방 꼬리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꼬리똥은 빌지도 않고 오히려 큰소리쳤습니다.

“너희들, 날 건드리면 재미없어. 애꾸는 뇌물 받아먹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어. 내가 대왕님께 신고하면 불알 물려 죽을 거야. 너희도 불알 물리기 싫으면 날 건드리지 말고 비켜!”

하지만 늑돌이는 눈을 부릅뜨고 외쳤습니다.

“야, 이놈아! 네놈이 대왕을 만나는 것은 죽은 이후에 가능해. 용서를 빌어도 시원찮을 놈이 어디서 공갈이야. 얘들아! 저놈을 물어 죽여!”

늑돌이의 명령 한 마디에 꼬리똥은 현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6. 찌루의 지혜

꼬리똥 처형 사건은 경호원들의 입을 통해서 서서히 알려졌습니다. 누구보다도 정보에 빠른 찌루가 먼저 알고 산양에게 살짝 알렸습니다. 산양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지도부가 부패하면 권력의 종말이 가깝다고 했어. 이 권력도 오래가지 못하고 곧 무너질 거야.”

산양의 말을 듣고 찌루는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고 싶어 졌습니다. 비록 지금은 창코에게 충성하고 있지만, 장차 초식이들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그것은 엄마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구걸하는 생존이며 갇혀있는 자유입니다. 본래는 초식이들의 천국이었지만, 악마들이 쳐들어오면서 자유와 평화를 잃은 것입니다.

찌루는 육식이들끼리 싸움 붙이는 방법을 오랫동안 궁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기회를 노렸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초식이들의 생활만 더 어려워졌습니다. 육식이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초식이들만 들볶았습니다. 초식이들은 꿀과 새알을 바치면서 과실주 만들기와 텃밭 노역으로 시달렸습니다. 좀 더 살고 싶은 초식이는 먹이를 보고도 참아야 했습니다. 살이 통통한 초식이는 순서대로 먹이가 되기 때문에 살을 빼야 합니다.

찌루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기왕에 천국을 건설하려면 하루라도 서두르자고 생각했습니다.

달빛이 어두운 밤에 찌루는 아무도 모르게 칸을 찾아갔습니다. 칸은 속이 상해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권력은 창코 대왕과 애꾸 소왕에게 전부 몰려있고, 자신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니 쓸쓸하고 울화만 쌓였습니다.

“경호 대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니, 비서실장이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소?”

칸은 찌루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물었습니다.

“저… 창코 대왕의 비밀을 말씀드릴게요.”

“대왕의 비밀? 그게 뭐요?”

칸은 눈을 번쩍 뜨면서 찌루 앞으로 당겨 앉았습니다.

“쉿! 목소리를 낮추세요. 특급 비밀이니까요.”

“아, 알겠소. 그래 비밀이 도대체 뭐요?”

“사실 창코는 백호 대왕의 불알을 물어뜯어 죽이지 않았어요.”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죽였소?”

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습니다.

“창코는 백호 대왕의 삼계탕에 독초를 넣어서 독살했어요.”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네, 분명해요. 백호 대왕을 독살한 후에 코를 물어뜯고 뺨도 때리고… 그러니까 불알을 물어뜯은 것은 숨이 끊어진 이후의 일이지요. 제가 본 역사의 진실이에요.”

찌루가 아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럼, 창코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소? 한 방에 물어뜯는 필살 비법이라고…….”

칸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습니다.

‘참, 나!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여우 밑에서 쩔쩔매고 있지.’

찌루는 속으로 칸을 비웃으면서도 차근차근 대답했습니다.

“그건요, 자기의 공격력을 과시하려고 꾸민 것이지요. 저만 빼고 모두가 속고 있어요.”

“이런 제기랄! 그것도 모르고 불알 조심만 하면서 겁먹었잖아.”

칸이 벌컥 화를 내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찌루는 내친김에 계속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요.”

“또 있어요?”

“창코는 온 숲의 나무에 발톱 자국을 내면서 일기를 쓰고 있어요.”

“일기를요?”

“네, 그것은 일기도 있고 작전 계획 같은 것도 있는데, 그 내용은 자기 혼자만 알고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요? 그게 어쨌다고요?”

칸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경호 대장님이 그 나무껍질을 모두 벗겨버리면 창코 대왕은 우선 화를 내겠지요.”

“화를 낸다고요?”

“그렇죠. 또 중요한 것은 창코의 기억이 사라지고 힘을 잃을 거예요.”

“음… 나무껍질을… 벗긴다, 그 말이지요?”

“네,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좋소! 내가 나무껍질을 벗겨버리지요. 몽땅!”

드디어 칸이 결심을 굳혔습니다. 불알 걱정이 없어지니까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됐어! 이제 내란이 일어나겠구나.’

찌루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목표가 반쯤 달성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비서실장은 어째서 이런 정보를 나에게 알려주시오?”

칸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습니다.

“네. 창코가 전에 제 친구를 잡아먹었거든요. 볼따구라는 착한 토끼였어요. 그래서 저는 늘 창코가 무섭고 미웠어요.”

찌루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갑자기 볼따구가 그리웠습니다. 볼이 통통한 볼따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음. 그런 사연이 있었구먼요. 정말 마음 아픈 일이네요.”

“칸 대장님이 창코를 물리칠 수 있어요?”

“알았소. 내가 당장 그 여우 놈을… 아니, 나무껍질부터 벗겨야지.”

찌루가 가고 난 후에 칸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분노가 환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7. 반역자 칸의 죽음

이튿날 새벽에 칸은 숲 속에서 나무껍질을 벗겼습니다. 모두 백 그루가 넘었지만, 발톱 자국이 있는 부분만 벗기니까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해 뜰 무렵에 일을 마친 칸은 땀을 식히며 멀찍이서 지켜보았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누가 내 일기장을 이렇게 했어?”

늦잠 자고 나온 창코가 펄쩍 뛰었습니다. 창코는 껍질 벗겨진 나무를 붙들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어떤 놈이 내 승리의 기록을… 위대한 역사의 도서관을 이렇게 망쳐놓았어?”

창코는 찌루와 애꾸를 급히 불렀습니다. 그런데 찌루는 금방 왔지만 애꾸는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야! 애꾸 소왕은 어디 갔어? 왜 이리 늦는 거야?”

창코는 안 그래도 미칠 지경인데 애꾸까지 느릿하니까 폭발 직전입니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방방 뛰고 있는데 애꾸가 1호 흑마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어이, 소왕! 내가 찾는데 왜 이렇게 늦었소? 말을 타고도 늦은 이유가 뭐요?”

“아이고, 대왕님. 저는 건강을 위해 새벽에 승마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창코가 계속 신경질만 부리니까 옆에 있던 찌루가 조분조분 설명했습니다. 그제야 사정을 파악한 애꾸는 나무 주변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칸의 냄새가 무척 많이 났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냄새를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증거가 있다고 해도 상대가 칸이라면 말하기 어렵습니다.

“대왕님.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했을까요?”

애꾸가 눈을 끔뻑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소왕이 모르면 어떡하오? 소왕은 당연히 나의 역사 기록물을 지켜야 하잖소?”

창코는 불같이 화를 내며 애꾸의 사타구니를 노려보았습니다. 창코의 시선을 의식한 애꾸가 벌벌 떨면서 말했습니다.

“대왕님.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범인을 당장 잡아 오겠습니다.”

창코는 성질을 부리면서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애꾸는 부하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늑돌이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소왕님. 본래 나무껍질은 염소들이 잘 먹습니다. 그러니까 염소들을 잡아들여서 조사하면 아마도 법인이 잡힐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애꾸는 염소들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한 고문으로 애먼 염소들만 죽을 지경입니다.

찌루는 아차 싶었습니다. 본래 계획에 없던 염소들의 희생을 보고 침묵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왕님. 새벽에 칸 경호 대장이 숲에서 나오던데요.”

“뭐라고? 경호 대장이?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증거 없이 남을 의심하면 안 되니까…….”

딴에는 그 말도 맞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경호 대장이니까요.

애꾸는 입장이 곤란했습니다. 칸이라면 확실히 무서운 상대입니다. 위압적인 검은 털과 무서운 눈빛이 떠올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완전히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다릅니다. 자신은 막강한 소왕이고 아래에는 부하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대왕의 필살 비법도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칸을 제거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애꾸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늑돌이 부장은 빨리 칸을 잡아오너라! 반항하면 현장에서 죽여도 좋다.”

늑돌이는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칸의 숙소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칸이 먼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늑돌이는 깜짝 놀라서 떠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칸 경호 대장은… 지금 당장… 애꾸 소왕님께 오라는… 명령을 따르시오.”

힘없이 말하는 늑돌이에게 칸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습니다.

“흥! 날 보고 싶으면 애꾸 녀석이 직접 오라고 해. 등신 같은 놈아!”

칸의 거침없는 태도에 부하들의 분위기가 흔들렸습니다. 늑돌이가 큰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야! 모두 달려들어 칸을 죽여라!”

그러나 부하들은 멈칫거리면서 서로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야! 빨리 덤벼! 대왕님께 불알 물려 죽기 전에!”

늑돌이가 고함지르니 부하들이 공격할 것처럼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선뜻 덤비지는 못했습니다.

칸이 크게 소리쳤습니다.

“크르르. 이놈들아! 창코 그 여우 놈이 백호의 불알을 물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야. 순 사기라고! 창코와 애꾸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어. 너희도 살고 싶으면 내 밑으로 와!”

그 말에 두 마리의 늑대가 슬금슬금 칸 쪽으로 갔습니다. 이제 늑돌이 쪽은 열두 마리가 되고 상대는 칸을 포함해서 세 마리입니다. 12:3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요하던 숲 속은 처절한 혈투장이 되었습니다.

한나절 동안 물고 물린 싸움은 지옥처럼 끔찍했습니다. 나중엔 칸과 늑돌이만 살아남았습니다. 늑돌이는 겨우 숨만 붙어있고 칸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둘 다 살짝 밀기만 해도 넘어질 정도로 기운이 다 빠졌습니다. 다리가 흔들려서 억지로 서 있을 뿐입니다.

칸이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애꾸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애꾸는 싸우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으니 털 하나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칸, 이 역적 놈! 그 자리에 당장 꿇어앉아!”

애꾸는 근엄한 목소리로 칸에게 명령했습니다. 칸은 부상이 심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꾸는 칸의 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생겨서 큰소리 땅땅 치는 겁니다. 평생에 이렇게 칸에게 호통 치는 일은 처음이라서 신났습니다.

“칸, 네 이놈! 대왕님의 경호 대장으로서 부귀영화를 그만큼 누렸는데 또 뭐가 아쉬워서 반란을 일으켰느냐?”

“…….”

“그래. 네놈의 바보 같은 짓으로 부하들이 다 죽고 너 자신도 죽기 직전인데,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

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쉴 뿐입니다.

애꾸가 우쭐대며 칸에게 마구 호통치고 있을 때 창코가 나타났습니다. 싸움이 한창 심할 때는 집에 숨어있었지만, 지금은 위엄을 보이려고 점잖게 물었습니다.

“소왕. 칸을 잡았소?”

“네, 대왕님. 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놈을 잡았습니다.”

애꾸는 자기가 잡았다고 능청스럽게 거짓말했습니다.

“그래요? 소왕이 아침부터 고생했구먼.”

“아닙니다. 이건 당연히 저의 임무입니다.”

“그래, 칸 저놈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네, 대역 반란의 죄를 물어 공개 처형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애꾸는 한쪽 눈을 씰룩거리며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공개 처형? 그래, 그게 좋겠네.”

창코는 초식이들을 모두 불러놓고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반역자 칸의 미치광이 행동으로 동지들이 너무 많이 죽었소. 그래도 나는 대왕으로서 자비심을 베풀어 칸을 죽이지는 않으려고 생각했는데, 충성스러운 애꾸 소왕이 건의했소. 법과 질서를 위해 공개 처형이 마땅하다고 말이오. 나는 그 건의를 존중하여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집행하겠소. 집행은 충성스러운 애꾸 소왕에게 맡기겠소.”

창코의 긴 연설이 끝나자 숲 속은 조용해졌습니다. 다만 칸의 거친 숨소리와 늑돌이의 신음만 들렸습니다. 애꾸가 칸을 처형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습니다.

“크르르, 애꾸 이놈! 여우 새끼에게 빌붙지 말고 저리 꺼져!”

칸은 강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비록 부상이 심해 다리가 흔들려도 그 눈빛만큼은 날카로웠습니다. 검은 털에 붉은 피가 온통 묻어있으니까 악마처럼 섬뜩하게 보였습니다.

겁먹은 애꾸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창코에게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대왕님. 대역 죄인은 대왕님의 필살 비법으로 처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애꾸는 힘든 일을 창코에게 떠넘겼고, 창코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습니다.

‘지금 칸은 초주검 상태다. 내가 여기서 저놈의 불알을 물어뜯으면 끝장이지. 그러면 모두 나의 힘과 지혜를 존경할 거야. 좋아! 내가 하자. 까짓것!’

마음을 다잡은 창코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크게 말했습니다.

“자, 국민 여러분! 충성스러운 애꾸 소왕의 건의에 따라 내가 직접 공개 처형을 집행하겠소. 반역자의 최후를 똑똑히 보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창코는 칸의 사타구니를 향해서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 지금까지 호흡을 조절한 칸이 아래로 파고드는 창코의 목을 먼저 물었습니다. 칸이 스스로 뛰어가서 물기는 어렵지만, 방심하고 달려드는 여우 정도는 물 수 있었습니다. 칸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창코를 흔들었습니다. 창코의 비명이 온 숲을 덮었지만, 애꾸는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창코는 축 늘어졌습니다. 숨이 끊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칸도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도 남지 않을 정도로 끈질기게 싸웠으니까 더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부르르 떨고 있는 칸에게 애꾸가 달려들었습니다. 애꾸는 이미 쓰러져있는, 죽음 직전인 칸의 목을 물고 두어 번 흔들었습니다. 이윽고 칸도 숨이 끊어졌습니다.

8. 애꾸, 대왕이 되다

애꾸는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 창코는 칸에게 당했지만, 칸은 내가 잡았어. 반역자를 내가 처단한 거야. 내가 바야흐로 대왕으로 올라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야.’

애꾸는 초식이들에게 연설했습니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나 애꾸 소왕이 이제 대왕이 되었소. 이것은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 것이오. 사실 늑대가 여우 밑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그것은 하늘의 뜻과 맞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것이오.

에, 그 모순을 바로 잡는다고 칸이 덤볐지만, 워낙 무식했던 탓에 동지들의 희생이 컸소. 그것은 참으로 무모하고 멍청한 반란이었소. 지금 이 피의 현장이 얼마나 끔찍하오? 정말 가슴 아파서 할 말이 없소.

나는 우리 공화국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반역자를 공개 처형했소. 또한, 공화국의 법에 따라 선출되었던 소왕이 대왕으로 자동 승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오.

나 애꾸 소왕… 아니 애꾸 대왕은 지난 선거에서 공약했던 과업을 성실하게 실천하겠소. 그러니까 국민 여러분도 나에게 충성하여 주기 바라오.”

“박수, 박수!”

찌루가 갑자기 큰소리로 박수를 유도했습니다. 초식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뼉을 쳤습니다.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애꾸마저도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모두가 했습니다.

하지만 찌루는 손뼉을 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단은 유리해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애꾸는 끝까지 손뼉 치는 찌루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에, 나 애꾸 대왕이 보기에 찌루는 진정한 충신이오. 나는 찌루와 함께 우리 공화국을 잘 이끌어 갈 것이오. 그래서 찌루 비서실장을 소왕으로 승진시키고자 하니까 모두 찬성하기 바라오. 반대 의견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시오.”

그러나 감히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다음 날, 애꾸 대왕과 찌루 소왕의 즉위식을 동시에 열었습니다. 애꾸가 복잡한 절차를 싫어하니까 간단히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다였습니다. 애꾸는 국민을 잘 다스리기는커녕 힘으로 군림했습니다. 선거 공약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노력조차 하지 않고 미루기만 했습니다. 골치 아픈 일을 하지 않아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은 눈만 흘겨도 착착 돌아갔습니다.

늑돌이는 부상에서 제법 회복되어 다리만 약간 절룩거렸습니다. 그 정도라도 되니까 경호 대장과 징세 부장의 역할을 겸할 수 있습니다. 늑돌이는 애꾸가 좋아하는 어린 새끼들을 주로 잡았습니다. 혹시 독약이라도 들지 않았는지 애꾸가 보는 앞에서 시식해야만 합니다. 창코가 백호를 독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 애꾸는 음식에 유별나게 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어린 새끼들만 잡으니까 초식이들의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산양이 용기를 내어 애꾸에게 찾아갔습니다.

“대왕님. 지금 징세 부장이 너무 심하게 합니다.”

“심하다니? 뭐가요?”

애꾸가 거만한 목소리로 산양에게 물었습니다.

“자꾸 어린 새끼들만 잡아가니까 모두 불만이 많습니다.”

“아, 그건 내가 부드러운 고기를 좋아해서 그러니까 좀 이해하고 협조해 주세요.”

“또 지금은 대왕님과 징세 부장만 육식이인데 우리 초식이를 너무 많이 잡지 않습니까?”

애꾸는 귀찮다는 듯이 느릿느릿 대답했습니다.

“아, 그거요? 그건… 미래를 대비해서 저장까지 하려면…….”

“미래라니요? 우린 오늘 하루가 불안해서 죽을 지경인데… 징세 부장은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잡아갑니다.”

산양은 위험을 각오하고 따졌습니다.

“그럼 좋소. 하루에 한 마리를 줄여서 다섯 마리만 잡도록 하지요.”

마치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로 애꾸가 대답했고, 산양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산양은 나오자마자 초식이들의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티격태격 말만 많았지 특별한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창의적인 의견보다 찌루에 대한 비판만 쏟아냈습니다.

“야. 찌루는 벼슬이 높아서 좋겠네.”

“소왕이니까 절대로 죽을 염려가 없지.”

“맞아, 그래서 애꾸가 연설할 때 혼자 끝까지 손뼉 쳤잖아.”

“저 혼자 잘 살면 뭐 해? 내일 당장 자기 엄마가 잡혀갈지도 모르는데.”

“아니야. 소왕의 엄마를 늑돌이가 감히 잡아가겠어?”

온갖 비난과 빈정거림이 이어졌지만 찌루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생각에 잠겼다가 슬며시 빠져나와서 애꾸에게 갔습니다.

“대왕님. 이제 대왕님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좀 하세요.”

“운동? 어떤 운동을 하지?”

“전에 하듯이 1호 흑마를 타고 새벽 산책을 하시면 좋겠네요.”

“그래? … 그럼 내일부터 그렇게 하지 뭐.”

애꾸는 건강을 걱정해 주는 찌루가 진정한 충신으로 보였습니다.

9. 결단의 순간

찌루는 밤에 아주 은밀하게 1호 흑마를 찾아갔습니다.

“흑마 아저씨. 잠깐 상의할 일이 있어요.”

“오, 찌루 왔니? 그래 무슨 일이야?”

“저, 내일부터 애꾸 대왕을 태우고 운동을 좀 하시면 좋겠어요.”

“아, 운동? 난, 뭐 상관없지만… 내가 늙었다고 싫어하던데.”

“제가 말하면 괜찮을 거예요. 아저씬 아직도 힘이 좋으니까요.”

“그래, 알았어.”

잠시 머뭇거리던 찌루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저… 이건 아저씨와 저만의 비밀인데, 비밀을 꼭 좀…….”

“그래, 알았어. 난 입이 무거우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

1호 흑마는 찌루를 안심시키려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습니다. 찌루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자신의 계획을 말했습니다. 둘만의 대화는 그믐밤 달빛만큼이나 은밀했습니다.

1호 흑마는 긴장한 탓인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알았네. 자네의 생각을 알았으니… 나를 한 번 믿어보게.”


날이 밝자 애꾸는 평소처럼 산책을 나섰습니다.

“허허. 날씨가 무척 좋구나. 흑마야,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갈까?”

“네, 대왕님. 오늘은 경치가 제일 좋은 쪽으로 가시지요.”

“그래? 그게 어디야?”

애꾸는 들뜬 기분으로 물었습니다.

“제가 잘 모실 테니 멋진 경치를 감상하십시오.”

1호 흑마는 애꾸를 태우고 산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세 그루의 노송이 구불텅하게 휘어져서 자태를 뽐내고, 커다란 바위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멀리 건너편 산에는 안개가 부드럽게 흐르면서 고즈넉한 산수화를 그립니다. 길은 절벽 끝으로 연결되어 아주 좁고,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입니다.

“대왕님, 보십시오. 경치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 과연 좋구나. 정말 멋져!”

애꾸는 황홀한 경치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1호 흑마가 갑자기 앞발을 쳐들고 마구 날뛰었습니다.

“히히힝!”

1호 흑마는 애꾸를 절벽에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애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버티었습니다. 1호 흑마는 계속 몸을 흔들면서 어젯밤 찌루가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천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애꾸를 꼭 죽여야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죽여야 합니다.”

순간, 1호 흑마는 목덜미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애꾸가 날카로운 이빨로 물었기 때문입니다. 1호 흑마는 애꾸를 떨쳐내려고 두어 번 흔들다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래 지금이 기회다. 뛰어내리자!’

1호 흑마는 목덜미에 애꾸를 매단 채로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습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에 웃으면서 외쳤습니다.

“나에게 단 한 번의 기회가 왔어! 푸하하하!”

몇 초 후에 절벽 아래의 너덜겅에 흑마와 애꾸가 함께 떨어졌습니다. 머리가 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였습니다.

찌루가 달려와서 그들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흑마 아저씨. 죄송해요. 그리고 존경해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9. 천국에는 악마가 산다

다친 몸으로 혼자 남은 늑돌이는 힘도 제대로 못 쓰고 멧돼지와 들소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초식이들만 모인 자리에서 찌루가 말했습니다.

“이제 이곳은 우리들의 천국입니다. 저는 엄마와 여러분에게 천국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며칠 전에 찌루를 비난했던 초식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뼉을 쳤습니다. 모든 오해가 자연스럽게 풀린 것입니다.

찌루는 경륜이 풍부한 산양을 대왕으로 추대했지만 산양은 손사래를 쳤습니다.

“찌루 군의 말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나이도 많고 몸도 약해서 좀 쉬고 싶습니다. 대신에 건강하고 지혜로운 찌루 군을 대왕으로 추천합니다. 새 시대는 새 일꾼을 요구합니다.”

초식이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지자 찌루가 연설대에 올랐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원하시면 제가 봉사하겠습니다. 대신에 ‘대왕’을 ‘일꾼’이라고 바꾸어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을 살리려고 목숨까지 버리신 흑마 아저씨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저씨의 위대한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모두가 새로운 각오로 천국을 건설하십시다.”

“와! 찌루 일꾼 만세! 만세!!”

모두 기쁨과 흥분에 겨워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찌루는 잠시 멈추었다가 연설을 이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악법을 없애고 단 두 가지의 법만 만들고 싶습니다. 법은 복잡할수록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합니다. 왜냐면 강자는 법을 뚫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힘 약한 곤충은 거미줄에 걸리지만 힘센 독수리는 거미줄을 뚫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찌루의 힘찬 주장에 산양이 물었습니다.

“찌루 일꾼. 그 두 가지의 법이란 뭔가요?”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자.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며 모든 다툼의 출발점이 됩니다. 둘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자. 그러면 누구든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노력을 적게 하는 것은 게으름이고, 노력 이상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탐욕입니다.”

멧돼지가 굵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 두 가지 외에 다른 것은 없소?”

“네. 나머지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모두 손뼉 치면서 환호했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모두 돌아간 후에 찌루와 엄마만 남았습니다.

“찌루야, 수고했구나. 오늘 보니 너 참 굉장하네.”

“에이, 엄마. 비행기 그만 태우세요. 어지러워요.”

엄마에겐 여전히 아기로 남고 싶은 찌루가 쑥스러워했습니다.

“아니야. 넌 엄마 생각보다 훨씬 지혜롭고 현명해. 그런데 이건 말해주고 싶어. 누구나 자리가 높아지면 초심을 잃기 쉬워. 그건 교만과 아집이라는 악마의 유혹이란다. 엄마 말 잘 기억해서 악마의 유혹을 이겨야 해. 만약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그 천국에는 악마가 사는 거야.”

“네, 잘 알았어요, 엄마.”

찌루는 엄마의 볼에 뽀뽀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엄마에게 잔소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맑은 공기는 상큼하고 새소리도 더없이 아름다웠습니다. 포근한 한낮에 풀밭을 거닐던 산양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지켜야 해. 어떤 경우라도 그걸 포기할 수 없어.”

“그렇죠? 절대로 자유를 뺏기면 안 돼요.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해요.”

찌루는 산양에게 자신의 다짐을 말했습니다.


멀리 뭉게구름을 보며 찌루는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1호 흑마의 죽음이 가장 아프게 기억되었습니다. 남을 위해서 작은 봉사는 하기 쉬워도 목숨까지 던지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굳은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찌루는 모두 모인 저녁 시간에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1호 흑마의 높은 정신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 정신은 후손에게도 영원히 전해져야 합니다.”

“정신은 물건도 아닌데 어떻게 전합니까?”

다람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네, 정신을 다른 방법으로는 못 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1호 흑마의 집터에 돌무더기를 쌓아서 작은 위령탑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탑을 볼 때마다 흑마 아저씨를 생각합시다. 또 우리 자식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줍시다. 우리가 마음만 있다면 세월이 흘러도 계속될 것입니다.”

찌루의 제안과 설득에 모두 동의하는 뜻으로 손뼉을 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초식이들은 돌멩이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힘센 친구들이 큰 돌을 굴러왔지만, 약한 친구들도 결코 빠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기 힘에 맞도록 돌을 가져왔습니다.

큰 돌은 아래에 놓고 작은 돌을 위로 올리면서 모두 정성껏 탑을 만들었습니다.

잠시 후에는 근사한 위령탑이 완성되었습니다. 위령탑 앞에서 산양은 1호 흑마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소개했습니다.

“1호 흑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오면 뭔가를 하겠노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는 기회의 순간이 왔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지고 삶을 마쳤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를 오래 기억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평소에 좋은 풀을 저에게 양보한 적도 많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던 산양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른 참석자들도 울컥했습니다. 찌루가 마무리 발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를 잘 기억하면서 현재에 충실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서로 아끼고 협동하면서 좋은 사회를 만듭시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맑은 하늘에는 1호 흑마의 웃는 모습이 어른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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