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연 ( 21) 니들이 고추맛을 알아?

by 구민성
식욕 살리는 고추가 기운도 살려요.













환갑 진갑 다 지난 동창들의 식사 모임이었다.

눈가에 주름이 짜글짜글한 여자 동창들도 그 자리에서는 여학생이고 가시나였다.

풋고추를 좋아한다던 여학생(?)이 불쑥 말했다.

“얘, 누구 고추 남는 사람 있나?”

“자, 내 고추 니 묵어라.”

고추 접시를 건네주는 햇노인의 묘한 발언에 모두들 빵 터졌다.


나도 그 가시나(!) 못잖게 고추를 좋아한다. 한 끼라도 고추가 없으면 허전하다.

하다못해 간장병에 빠진 고추장아찌라도 있어야 입맛이 살아난다.

된장찌개에 매운 고추가 들어가지 않으면 앙꼬 없는 찐빵처럼 시시하다.

생된장에 박아 넣은 고추장아찌도 훌륭한 밥도둑이다.


얼마 전에는 지인이 고추김치를 좀 가져왔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불과 며칠 만에 한 통 다 먹고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밥 비벼 먹었다.

또 고추김치 국물에 물 조금 붓고 사리면을 끓여 먹으면 끝내준다.

부추전이나 파전에 매운 고추를 썰어 넣으면 그 칼칼한 맛에 과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큼직한 홍고추는 달큼하고 매콤한 향미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풋고추는 역시 보리밥과 먹어야 제격이다.

따뜻한 밥보다는 식은 밥이 좋은데 그것도 찬물에 말아서 먹으면 더 좋다.

물도 소독내 나는 수돗물보다 마사토를 거쳐 내려오는 샘물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흔히 마트에서 파는 쌈장에 고추를 찍어먹지만 그보다는 장독에서 금방 퍼낸 생된장이 진짜배기 맛이다.

또 외할머니가 잘 만들던 집장도 결코 잊을 수없는 맛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즐기는 비장의 소스는 생멸치젓이다.

고추 하나와 크기가 비슷한 생멸치 한 마리를 같이 먹는다.

먼저 생멸치 대가리부터 앞니로 끊어서 입안에 넣어두고 고추도 아싹 베어 먹는다.

입안에서 멸치와 고추가 환상적인 부루스를 춘다.


요즘 나는 텃밭에서 고추를 직접 키워서 먹는다.

물은 도솔암 약수터에서 떠온 석간수라서 이상한 냄새가 전혀 없다.

농약도 비료도 모르는 내 고추만 있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을 정도로 한 끼 뚝딱이다.

(잠깐! 내 고추라고 하니 좀 이상하네. 내 밭의 고추라고 하자.)


매운 고추를 먹은 후에는 트림을 많이 하게 된다.

그것은 매운맛을 줄이려고 '쓰읍 쓰읍'하면서 입으로 바람을 조금씩 마셨으니 뱃속에 공기가 차서 그렇지 않을까?

어쨌든 트림할 때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매콤한 향은 나의 혼을 빼버린다.

내 필력으로는 형언키 어려운 그 느낌......

캬아~ 그 트림의 황홀한 중독성이란!


마주 앉은 사람의 입에서 들리는 아싹거리는 소리도 '맛진' 음향인데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

식탁이 약간 헛헛했던 것은 혼자 먹는 탓이리라.

하지만 매운 고추를 먹으면서 딸꾹질과 트림을 하다 보면 혼밥의 휑한 느낌도 제법 덮을 수 있다.


역시 고추는 매워야 고추다.

지금까지 먹어 본 중에는 밀양 무안면의 '맛나향 고추'가 단연 으뜸이다.

내일은 디따 매운 고추와 홍고추도 몇 개 따먹자.

밥은 보리쌀을 좀 많이 넣고 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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