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산문집 '읽다'를 읽다

소설가 김영하의 책읽기 이야기

by 까르도

이번 산문집은 소설가 김영하가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읽어오던 책 그리고 소설가로서 읽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편이다. 고전 읽기와 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지? 책을 읽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읽기에 대한 여섯 번의 강연을 진행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이 완성되었다.


그가 소설을 읽은 이야기, 고전을 읽은 이야기 그리고 소설 읽기라는 행위는 그가 소설가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단지 책읽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의 격려를 받고, 나름 끄적이며 어느정도 재능이 있던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쓴 책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고전(일명 일급 소설)들에 대한 대답이자 반응이라고 한다.


나로 하여금 꿈틀하게 만든 책은 무엇이었는지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밑줄 친 구절

'위험한 책 읽기'에서

왜 고전을 읽는가의 서두에서 칼비노는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000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000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애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쓰기'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아이러니'와 서스펜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

저 이외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새로워 보이지만 실은 오래된' 작품을 써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우리를 미치게 하는 책들'에서

무더운 여름, 대학 입시가 불과 반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소설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어머니는 제가 방금 전까지 겪은 일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그냥 누워서 소설책을 보며 뒹굴거리는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도 어릴적 경험이 하나 떠올랐다. 때는 해리포터에 푹 빠졌던 8살 아이였다. 비디오방에서 빌려온 해리포터에 푹 빠져 읽고 있었고, 어머니는 잠깐 나가기전 미역국을 끓여놓고 잠깐 있다가 꺼달라고 시키셨다. 나는 당연히 까맣게 잊고 해리포터가 부리는 마술과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퀴디치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셨고, 미역국이 다 타 뿌연 연기를 만들며 온 거실을 채운데다, 그속에서 책에 빠져있는 나를 봤다. 화내지도 못하고 잔소리를 툴툴 하시던 어머니가 선하다. 차마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뭐라하지는 못하셨는데, 미역국을 다 태운 내 정신머리를 탓하고는 싶으셨을거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책 속에는 길이없다'에서

아직 어떤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 소설에 대한 어떤 판단을 요구받습니다. 우리는 별다른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결정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실망스러웠다면 바로 던져버리고 그 작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입을 다물었을 겁니다.

완독이라는 것은 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 읽고 싶다는 유혹을 수없이 이겨내야만 하니까요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한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이 우리에게 삶의 평범한 세부 사항, 환상, 일상의 습관과 사물을 보여줄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경탄에 사로잡혀 읽어나가게 됩니다.

저 유명한 '극 초반에 총이 나왔다면 언젠가는 발사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긴 이는 안톤 체호프입니다. 플로베르는 그것을 뒤집어 사용합니다. 극초반에 총이 나왔더라도 독자들이 그 총이 발사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면 꼭 발사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죠.

플로베르는 중심부가 아니라 독자가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제와 교훈을 강조하는 소설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클리셰로 가득한 소설은 안전한 세계입니다.

뛰어난 작가가 새로운 스타일과 참신한 표현으로 제시하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현실과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니, 때로는 현실보다 더 두렵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 '아, 왠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재미있어. 인물들은 생생하고, 사건들은 흥미롭고, 읽는 내내 정말 흥분되더군. 주인공은 지난밤 꿈에도 나왔어.'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다'에서

이몽룡과 춘향이 상상 속의 존재인데도 마치 불변의 자연법칙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소설은 흔히 꿈에 비유되어왔습니다.

액자 때문에 더 사실 같으면서도, 어쩌면 그냥 서사적 트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독자를 갈등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독자들은 소설과 작가를 연결해서 읽게 되고, 소설은 자전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소설을 읽는 행위가 끝없는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등산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해지고 강해집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고 강해지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산에서 겪은 경험을 사랑할 뿐입니다.

자연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창조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소설도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쓰이고 읽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소설은 두번째 삶입니다.'


'매력적인 괴물들의 세계'에서

끔찍한 타자를 긍정하고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 마피아 스토리가 문학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설령 작가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많은 경우 이런 '은유'는 작가 자신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회피하기 위해 쓰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독자 개개인의 양심과 내면에 조용히 호소하고 설득합니다.

소설은 우리에게 가해자의 내면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갖는 공포심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이 나에 대해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ㄷ는 두려움을 갖고 진화해왔다, 또는 그런 두려움을 잊지 않은 유전자만이 지금까지 진화해왔다고 설명합니다.

소설을 읽는 행위 역시 타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시작해서 자기 내면의 동물성과 괴물다움을 성찰하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은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


'독자, 책의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서

루슈디가 통찰했듯 책은 독립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는 물이나 바다처럼 유동적입니다.

독자가 된다는 것은 이야기의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을 받아 마실 수 있는 '계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뮈는 근대의 합리성 뒤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전근대의 비합리성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뫼르소는 연기를 할 줄 모르는 인물입니다.

사실 독자로 산다는 것에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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