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말 모음집
현재 인터뷰 콘텐츠를 주로 작성하는 콘텐츠 에디터 직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간 대화를 어떻게 글에 실으면 좋을지, 이메일과 전화로만 진행하는 인터뷰 방식을 보다 맛깔나게 서술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김영하의 ‘말하다’는 김영하가 말하고 다닌 여정을 글로 재생산한 책이다. 인터뷰, 강의, 강연대담 등 다양한 형태의 말을 글로 풀어 넣었다.
글의 주된 내용은 일명 스타 소설작가인 김영하에게 그가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회는 어떤가? 젊은 세대(후배)에게 전하고 싶은 말, 그리고 창작, 글쓰기, 예술에 대한 강연이다. 글을 쓰고 싶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려 나날이 머릿속과 손가락이 간질간질하고,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할 지 막막한 나에게 ‘말하다’는 가장 가깝게 다가온 책이였다.
밑줄 친 구절
‘비관적 현실주의와 감성 근육’에서
(과거와 달리 경제는 저성장 상황에 과거의 급속 성장에 따른 여러 부작용을 겪는 현대와 시대를 삶아가는 젊은이에게 전하는 예술의 필요성)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했지만 저는 분명하게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못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바람은 늘 그런식이기 때문입니다. 대학만 들어가라, 졸업만 해라, 결혼만 해라, 아이만 하나 낳아라, 그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지만 아무 조건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저는 입사지원서 한 장 내지 않고 습작에 매달렸지만 가끔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자꾸 흔들리기에, 어느 날 신촌에 가서 귀를 뚫고 귀걸이를 했습니다. ‘음, 이제 취직은 물거너갔군. 귀걸이 한 놈을 누가 뽑겠어? 그러니 이제 글만 쓰자.’
작가는 실패 전문가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다. 세계명작들을 보라. 성공한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비관적 현실주의다. (중략) 나는 오래지 않아 가스실로 끌려가 비누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면도부터 해야겠다. 수용소에서 누가 본다고 면도를 하냐고? 그럼 뭘 하지? 가만히 누워서 죽을 때를 기다리나?
비관적 현실주의는 인상을 쓰고 침울하게 살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에는 개인주의가 필수적입니다.
한 사람이 개인으로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일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돈이 들지 않습니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고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감을 다 표현해 다시 써보라고 합니다.
잘 느끼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자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에서
여행이 싫어지다. 어딜 가도 하얀 침대보가 깔려 있고, 어딜가도 아메리칸 스타일이죠. 여행지들은 비슷비슷해졌고, 그래서 여행이 가지고 있는 긴장과 흥분 같은 것들이 빠르게 사라졌어요.
10년 밖에 못 산다면? 답은 소설쓰기. 5년, 2년 모두 소설쓰기. Q. 그럼 10년 밖에 못 산다고 화끈하게 살았는데 계속 살아있으면? A. 그럼 다시 10년을 연장하면 되지요.
‘자기해방의 글쓰기’에서
지금도 저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글을 씁니다. 글쓰기는 누구나,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우리 자신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 [TEDXSEOUL에서 한 강연으로 전세계적으로 꽤나 큰 호응을 얻었다]
행복한 순간은 경험과 관련돼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이런 짓궃은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게 그 증거다.”
그러나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가 아니라 ‘돼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나까요.
‘책 속을 살다’에서
어느 정도 읽다보면, ‘나도 이런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있어요. 자기 안에서 쓰고 싶은 내용과 자기가 읽어온 책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작가의 권능’에서
칼 세이건이 아마 한 말?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남긴다.’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다.”
‘소설가로 살아가기’에서
결국 인간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며 발버둥치다가 마침내 운명으로 걸어들어가는 존재라는 거죠.
저는 인간들이 어리둥절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인간에게는 아주 굳건하고 경건한 허무주의가 필요하고, 그런 이들의 가장 좋은 벗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밤에 술 마시는 일도 거의 없어요. 취미도 없고, 다른 것에 탐닉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나에게 깊은 수준의 만족감을 주느냐.’ 그게 아니라면 그만두는거죠. 깊은 만족감이 없는 일들은 오래할 수 없었던 거죠.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꿈꾸지 않는 것, 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감히 생각도 못할 것들을 대신해서 겪습니다.
넓게 보면 사랑조차도 낭만적으로 포장된 부드러운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감정이 나라는 주체를 초과해 타인에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충돌들이 생기겠죠.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할머니의 벌집’에서
벼락이라는 자연 현상은 피뢰침의 발명으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문학만이 답변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의 관심사입니다.
‘글쓰기의 목적은 즐거움, 윤리는 새로움’
문학의 매력은 개방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문학사를 보면 죄수들이 글을 참 많이 썼어요. 그런 개방성이 문학이나 글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은 끊임없이 자기 주변의 비문학적인 것들을 잡아먹으면서 성장하니까요.
저는 합평이라는 것에 그런식의 가혹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시절에도 문학회 같은 데 소속되거나 이랬던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글 쓰고 책 보고. 뭐랄까, 그냥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썼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시기나 질투심 이런 것 때문에 친구 작품의 장점을 잘 볼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에 있는 어린 예술가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해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라고요. 글쓰기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얘기했죠.
글이라는 게 그것을 쓰는 인간하고 너무 밀착돼 있어서 마치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어려운 질문이 돼버립니다.
저는 글이 가진 매력은 세계와 인간 사이에 흥미로운 매개를 설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쓰면 그가 실제로 본 세계는 사라지고 동방견문록의 세계만 남게 되죠. 따라서 글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는 아니에요.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써라
정말 갑갑하고 괴로울 때 인간은 글을 쓴다는 거죠.
중요한 것은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발언하는 거에요. 저는 거기서 기본적 희열이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해방감.
책상 서랍에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을 써라.
글쓰기의 중요한 동력이고, 자기 내면의 어떤 억압들, 부모로부터의 억압, 학교로부터의 억압, 성적인 억압, 이런 것들을 토로하고 폭로하는 과정에서 글쓰기의 진정한 기쁨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현실의 역사와는 별 관련이 없다. 오직 소설 그 자신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저는 제 소설들이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다른 소설들에 대한 제 나름의 응답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기본적으로 질문을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계가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이전의 소설들이 던지는 질문을 듣고 제 방식대로 얘기해야 하니까요.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작가의 답변이 의미가 있다면 그 작가 혹은 작품은 살아남는 것이고, 반면 별 의미가 없거나 또는 너무 엉뚱한 답변이라면 수다한 작품 속으로 묻혀버린 거죠.
작가에게 독서는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길에서 싸움이 일어난 광경을 스쳐지나가며 무슨 일일지 상상하는 것이 단편이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왜 싸우느냐’ 물어보는게 장편이라고 생각해요. 잠깐 보는 강렬한 인상이 단편이 되는 거 같아요.
소설이라는 것은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게 정상이에요.
마치 우리가 인생을 겪듯이 소설이라는 것도 ‘겪는’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이상한 세계’에서
세상의 이야기들 대부분은 간단한 핵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온했던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과 맞서 싸워 결국에는 삶의 균형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온 이상, 그것은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독자의 마음속에 새롭게 생겨난 또하나의 세상일 뿐이라고요.
소설은 우리를 실패와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 실패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 아닐까요?
소설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소통은 없다’에서
작가는 제 인물들과 소통을 하고 나면, 퇴장을 하는 사람이에요. 독자는 자기가 사라진 자리에 그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죠.
제가 장편을 쓰고도 발표하지 않는 것은, 발표해서 독자들의 반응을 얻는 게 작가로서 본질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보여준다는 데 그렇게 의막 있는 게 아니에요. 쓸 때 충분히 즐거웠는데, 굳이 발표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굳이 공격하게 만들고, 실망했네, 전작보다 못하네, 퇴보했내, 이런 소리를 듣게 되잖아요. 작가에게 전작보다 못한 작품이라는 건 없어요. 이해 못할지 모르겠지만 자기 인생의 스토리이기 때문이에요.
진짜 깊은 수준의 소통은요, 대화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인간과 인간이 정말 깊은 수준의 교감과 공감을 하게 해줍니다.
소설을 써나가는 동안 작가 자신이 해체됩니다.
이 작품을 통해 뭘 말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말하려고 한 무언가가 아마 있었겠지만 쓰는 동안 잊어버렸다, 가 정답일 겁니다.
‘첫 사랑같은 책’에서
책은 일족의 정신적 애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책꽂이에 꽂혀 있지만 실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첫사랑 같은 책은 죽은 작가나 만나볼 일이 없는 외국 작가의 책이 제격입니다.
‘무엇을 왜 쓰는가’
소설을 쓸 때 스토리는 다 설정하지 않더라도 인물에 대해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시작해요. 주인공이 읽었을법한 책들을 쌓아놓고 소설 써요. 소설을 쓰다가 쉴 때는 그 책들을 읽어요. 읽다가 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소설에 넣는 거죠.
좋은 이야깃감과 나쁜 이야깃감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작가가 그걸 다룰 역량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인 거죠.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셜록 홈스나 외계인 얘기에 흥미를 갖고 유년을 보낸 작가들이 막상 글을 쓸 때 그런 얘기는 쓸 수 없다고 자기검열을 한다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앙상해지기 쉽습니다.
사전은 과거의 문학작품을 추출해서 만든 건데, 그에 따르라는 건 저보고 교과서에 있는 말만 가지고 소설을 쓰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느껴져요. 소설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거든요.
말 속에서 시적인 것을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를 작가로 만든 것들’에서
어린아이들은 과거를 잘 되돌아 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오늘 뭘 하고 놀까’ ‘소풍은 언제 갈까’같은 생각을 하지, ‘2년 전에는 참 행복했었는데’같은 회상을 잘 하지 않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그런 땅입니다. 연극적인 삶과 집단 신경증, 서로를 향한 희극적이고 원시적인 적의, 그러면서 서로를 모방하려는 미메시스적 충동이 가득한 곳입니다.
행위는 이해할 수 없었고 존재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해괴한 일들, 원시적이거나 혹은 반대로 아주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인간들이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물음표 속에 갇혀버립니다. 어쩌면 그 물음표를 문장들로 바꾸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우리는 국가라는 존재를 너무나 초역사적인 실체로,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인식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순결성에 대한 집착, 순혈주의와 같은 시대착오적 정신병리학적 증상들에 무비판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화적 돌연변이’에서
‘문화적 돌연변이’라는 메타포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 문화적 돌연변이들은 국경, 국가, 문화적 전통 등과 크게 관계없이 어떤 흐름이 만나는 곳에서 출현하는데요.
이상한 혼종문학이 전 세계 서점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의 소설은 ‘잘 써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쓴’ 덕분에 그토록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은 여러 문화의 혼종을 통해 빚어진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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