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깡패야 진짜
십이월.
한 해를 뒤돌아보며 새로운 해를 바라보는 달.
열심히 살았는데도 변한 게 너무 없다며
자책하기 바빴던 십일월이 어느새 지나고
우울한 십이월도 이렇게 지나가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생각 많은 건 여전하다.
생각이라는 병에 또 빠지고 또 빠져
깊은 우물 안에 갇혀버린 내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10년 전의 나와 똑같다.
갓 스무 살이 된 일월.
기대와 설렘보단 실패를 맛보았다.
무얼 새로 시도한 것도 아니어서 실패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내가 생각했던 스무 살이 아닌 것에 좌절했던 것이다.
무언가 많이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꿈이 배우인지라 그 나이면 벌써 기획사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고
몸무게도 내가 본 아이돌들처럼 45-47kg 일 줄 알았고
나의 콤플렉스인 춤도 그때면 참 잘 추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 아니었다.
지금 보면 이 별 것 아닌 것들이 왜 그리도 나를 괴롭혔는지
그 어리고 여렸던 마음이 참 웃겼다가도
그때의 고민들이 아직도 내 맘에 비슷하게 다가와서 불편해진다.
'난 철이 없나?'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고민들에 흔들흔들거리는 내가
그때의 모습과 별 다름없음에 답답해진다.
이제 갓 서른이 되었다.
또다시 기대와 설렘 대신
현실이라는 무서운 애가 내 앞으로 돌진했다.
'오피셜리 애매한 나이에 온 것을 축하해'
얘를 쳐다보고 있으니 처음엔 그저 당황스러웠다가
지금은 어느새 그 무시할 수 없는 당당한 기에 눌려
웅크려져 버린 나를 본다.
나이 서른.
이제 무언가 이룰 때 아닌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마자 가슴이 꽉 막힌다.
뭘 이루긴커녕 남들이 인생숙제 하는 동안
난 꿈만 좇은 것 같아
슬프기만 하다.
내가 어리숙해서 그랬는지,
인생에 대해선 로맨티시스트어서 그랬는지,
갓 스무 살의 우울함을 잊은 채 이십 대의 몇 년 동안은 앞만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고민이 생기려 하면
귀를 막은 채 내 가능성과 꿈만을 생각했다.
올인이었다.
'한 우물만 파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긍정! 을 외치며!
그리 당당했던 나도 현실을 피할 수는 없었나 보다.
서른이 되면 여자들이 바뀐다던데.
조금 몸짓 큰 현실이라는 애한테 졸아버려
이전의 의기양양한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언제 이렇게 온순한 듯
잃어버린 양이되어버린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꿈틀대며 내 마음속을 파해친다.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돈은 어떻게 벌 것이며,
결혼은 할 것인지, 출산계획은 있는지,
살은 뺄 건지 말건지, 늘어난 눈 밑 주름살은 어떻게 가릴 것이며,
이놈의 성깔은 어떻게 고쳐먹을 것인지,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의 꼬리의 꼬리를 물다 보면
눈 대신 마음에 물이 찬다.
벗어나야 해 벗어나야 해 끙끙거리다
또 여기까지 왔다.
또다시 별 것 아닌 듯 별 것인 것 같은 것에 무너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참 그대로
나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