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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Apr 04. 2021

가십걸 + 할리퀸 + 오만과 편견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을 보고 쓰다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한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시 이후 한동안 넷플릭스 순위권에 있던 브리저튼을 이제야 봤다. 이전처럼 드라마를 보기에는 시간도 없고, 한 번에 몰아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에 드라마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봤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는 기껏해야 '하우스 오브 카드'나 '지정 생존자' 정도였는데, 둘 다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으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에 본 것들이었고, 그래서 '나 진짜 드라마 뭐라도 리뷰해야겠다' 싶어서 본 것이 바로 브리저튼이었다. 드라마 내용이나 인물보다는 뒷얘기나 흠집 잡기에 관심이 많은 나는 19세기 리젠시 시대의 영국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예고편을 봤을 때도 '와, 돈 많이 들었겠다.' 나 '저때 영국에 흑인 귀족이랑 왕비가 있었다고?' 따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지만, '과연 드라마 속 장면들이 실제로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귀족들의 사교 시즌에서 혼인 상대를 구하는 드라마의 내용 탓에, 엄청나게 화려한 옷들이 몇천 벌씩 등장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영국 귀족들도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영국이 노예무역의 메카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극한의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 '가십걸'의 제작진이 만든 드라마라서 그런지 이번에도 설정도 비슷하다. 브리저튼에서는 '레이디 휘슬다운'이라는 필명을 가진 여자가 영국 귀족 사교계의 뒷이야기 들을 조사해서 글로 쓰는데, 이는 소문을 다루는 웹사이트 '가십걸'과 유사하다. 두 작품은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이나 정보원을 통한 비밀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로 글을 써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띤다. 또 가문 사이의 결혼이나 신분을 뛰어넘는 러브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과 비슷하기도 하다. 물론 상류 계급의 싸가지없는 신사와 젠트리 가문의 명랑하고 똑똑한 숙녀가 결혼하는 이 작품과 달리 브리저튼은 공작과 자작 가문 사이의 혼담이 오간다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추구하는 바는 거의 비슷하니 넘어가기로 하자. 이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가문은 물론 브리저튼이다. 사이좋은 남매들은 항상 식사도 같이 하고, 서로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약간 시스콘에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자 하지만 조금 모자란 꼰대 첫째와 미술을 좋아하는 런던 힙스터 둘째, 그리고 그냥 착한 셋째로 이루어져 있는 형제들과 약간 순진해 보이나 나중에 눈을 뜨는 장녀, 똑똑하고 책 좋아하지만 결혼은 좋게 보지 않고,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를 찾으러 다니는 둘째, 그리고 그냥 꼬맹이 둘은 모두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으며, 각자의 인생 속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는 레이디 댄버리와 사이먼 바셋(헤이스팅스 공작)이 있다. 작중에 왕비가 흑인이라 이들도 귀족이 될 수 있게 되었고, 사이먼의 아버지 역시 그렇게 공작이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이먼이 태어날 때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아내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어린 사이먼이 말을 더듬는 것을 본 이후에는 아들로 인정을 하지도 않았기에, 그는 결국 아버지에 대한 깊은 증오와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비혼 주의자가 되었다. 비록 대모였던 레이디 댄버리가 그를 훌륭하게 키우지만, 다프네와의 약속 이전까지 그는 상류 사회에서 바람둥이이자 자유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다프네와 사이먼의 만남은 사교계의 일대 사건으로, 레이디 휘슬다운의 관심까지 끌며 온갖 소문을 더 부채질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처음에는 다른 남자들의 이목을 끌고자 하는 다프네와 다른 여자들의 관심을 차단하고자 하는 사이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시작된 만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은 각자 서로에 대한 사랑 비스무리한 것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간에 왕자의 등장으로 다프네는 공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지만, 한 순간 젊음의 혈기 앞에서 맹세는 생각보다 지키기 힘들게 되었음을 두 사람은 6화 즈음에서야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결국 둘은 결국 헤이스팅스 공작의 저택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자식을 낳길 원하는 다프네와 과거의 맹세를 깨지 않기를 원하는 사이먼의 갈등도 심해져가고, 결국 두 사람은 무도회 이후 별거를 생각한다. 이전만큼의 뜨거움도, 열정도 찾기 힘들던 두 사람은 점점 지쳐간다. 누구의 잘못일까. 자식과 아내를 사랑하지 않던 사이먼의 아버지를 탓해야 하나, 아니면 아내에게조차 트라우마를 숨기고 자신의 과거 앞에서 떳떳하게 서지 못한 사이먼의 부족한 용기를 탓해야 하나.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지를 알게 된 순진한 다프네는 아직도 자신을 향한 사랑보다 사이먼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더 강하냐며 원망하고, 사이먼 역시 다프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계속 혼란스러워한다. 분명 자신의 친구이자 다프네의 오빠인 앤소니 브리저튼과의 앞선 결투에서도 자신을 희생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뿐만 아니라 결혼 이후에도 다프네와 사이가 좋았던 사이먼이었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앞에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다프네의 동생인 엘로이즈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레이디 휘슬다운은 과연 누구일까? 모든 답은 8화에 나와있다.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한 퓨전 드라마답게, 브리저튼은 다채로운 설정과 볼거리로 원작 소설을 읽은 독자들과 시청자들을 유혹한다. 특히 사교계의 무도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클래식이 아닌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you, next'나 MAROON 5의 'girls like you', 빌리 아일리시의 'bad guy'의 편곡 버전이며, 다프네는 매화마다 다른 드레스를 선보이고, 샬럿 왕비도 매번 다른 가발을 쓸 만큼 의상 퀄리티가 수준급이다. 이 드라마의 의상 담당 스태프만 무려 400명이라고 하니, 그 시대의 의상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이 점을 참고해서 보면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서 말한 흑인, 아시아계 귀족이나 왕비도 포인트다. 실제로 브리저튼의 샬럿 왕비는 포르투갈 혈통을 일부 물려받은 독일의 공녀 출신으로, 그녀의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피부색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백인의 외모와 거리가 멀고 오히려 흑인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녀의 조상들 중 1명인 마드라가나(포르투갈 왕국 국왕 아폰수 3세의 정부)가 흑인계 무어 출신이라서 그 유전자가 격세유전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드라마 내 설정은 바로 이 점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흑인 귀족이라는 설정도 근거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퓨전 드라마라는 이유로 재미를 더 추구하기 위한 설정이라는 썰이 더 타당해 보이지만 말이다. 어차피 난 재미있으면 다 용서할 수 있다.



할리퀸 로맨스라기에는 넷플릭스가 뽑아내는 퀄리티를 무시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명작까지는 아니지만, 한 시리즈에 8화라는 분량을 고려했을 때 원작 소설을 알고 있는 팬들의 상상을 충실히 재현한 브리저튼 속 모든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의 비주얼, 그리고 연인들의 진도 빼는 일은 아마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는 전 세계 팬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었을 것이다. 보통 어떤 장르의 마니아들은 자신이 파던 작품을 실사화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발끈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나라에서 아직 조용한 것을 보면 제작진은 소기의 성공을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내가 못 보거나, 그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팬덤이 없을 수도 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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