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읽고 쓰다
살다 보면 인생이 어느 순간 송두리째 뒤바뀌어 버리는 것만 같은 사건이 있다. 이를테면 대학 진학과 취업,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혹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시험 합격이나 가족의 죽음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회가 오랫동안 온전히 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구성원들에게 일반적인 미래를 보장할 때 나열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사건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학-취업-결혼-출산 같이 정해져 있는 인생의 루트가 있고, 이를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이전 세대의 어른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한국이 거대한 전쟁 속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온갖 풍파를 맞고 난 뒤라면 어떨까?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의미 없는 죽음을 맞고, 예전부터 옳다고 생각했던 사상들이 모두 무의미해져 버린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려고 할까? 27살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 이런 세상에 주목한다.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제이크 반스'를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정신적 무기력, 시대적 불안과 상실감을 그렸다.
제이크 반스는 미국인이지만 파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기 부위에 부상을 당해 성불구가 되었지만, 병원에서 만난 브렛 애슐리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녀는 이미 두 번 이혼했고 지금은 마이크 캠벨과 약혼한 사이이다. 소설의 제1부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의 파리에서의 사교생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로버트 콘은 브렛 애슐리에 대해 연정을 품게 된다. 제2부에서 주인공 일행은 에스파냐 팜플로나 지방으로 투우 축제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유대인으로 불리는 로버트 콘은 마이크 캠벨, 주인공 등과 갈등을 벌인다. 한편 브렛 애슐리는 유명한 19세의 투우사 로메로와 사랑에 빠지고 로버트 콘은 그를 때려눕힌다. 브렛과 로메로는 한때 도망을 치지만 로메로가 브렛을 떠나고, 브렛은 다시 주인공에게 도움을 청해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일상의 나열, 혹은 한 여자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사랑싸움으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출간 후 미국 문단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일단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유럽과 미국의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부터 이전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말, 태도, 행동 방식, 의상, 언어, 그리고 섹스에 이르기까지. 당연하다고 배운 것에 질문을 던지며 인생을 보내는 방식을 실험하던 격동의 1920년대는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는 혼란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미국 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윌리엄 포크너,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바로 그 유명한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이다. 이들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일단 이 무렵의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달러 가치가 높았고, 그래서 유럽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훨씬 생활비가 적게 들었던 시기였다. 이에 미국 출신 작가, 화가 등 많은 예술가가 예술적 자유를 보장하는 파리 같은 도시로 이주하여 공부하면서 작품을 발표했다. 그래서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이디스 워튼을 비롯해 우리가 잘 아는 미국 작가들이 파리로 대거 이주했고, 이외에도 영국이나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들 역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유럽에서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기에 변화하는 삶의 모습과 사람들의 가치관을 작품 속에 녹여내었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속 인물인 제이크의 자기 연민적 사고와 계속되는 여행, 혹은 브렛의 일탈적 행동 등은 모두 시대적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물이 자신을 놓아버린 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전자는 주인공 제이크와 그의 친구 빌 고턴, 그리고 투우사 페드로이다. 이들은 혼란스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의 행동 규범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제이크는 폭력과 무질서로 가득 찬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적절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우사로서 임무를 완벽하고 아름답게 수행하는 페드로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다.
후자는 로버트 콘과 마이클, 브렛이다. 그중에서도 브렛은 앞선 제이크와 달리 규범적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미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제 마이클과 약혼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제이크와의 기억을 놓지 못하면서도 로버트 콘과 산세바스티안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때 새로 만난 투우사 페드로와도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전통적인 숙녀의 모습을 중시하던 당시 독자들에게 브렛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다. 심지어 헤밍웨이의 어머니마저 이 글을 읽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품 말미에 페드로가 떠나자, 그녀는 다시 규범적인 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마드리드를 가로지르는 택시 속에서, 제이크와 브렛은 또 다른 미래를 살아가는 방법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떨까? 사실 전쟁 같은 사건이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강대국은 자국우선주의를 취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중국은 이제 대만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 다양한 위험이 산재한 국제 상황은 기업에도 영향을 줬고, 과거와 달리 정년을 보장하면서도 만족할 만한 임금을 보장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갔다.
사람들은 공무원 시험과 전문직에 다시 눈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이것 역시 쉬운 길이 아니다. 이미 내 주변의 몇몇 친구들이 길에 도전했거나 도전하는 중이고, 간혹 실패하거나 포기하는 친구도 보였다. 요즘 술자리의 화두는 이성이나 게임, 여행이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변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한 순간의 쾌락을 좇는 인간으로 살기엔 너무 겁이 많다. 어떻게든 나만의 규칙을 두고 살아나가기, 이것이 그나마 만족스러운 정답이 될 것으로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