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

by 난척선생

월요일이고 연차휴가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몸이 찌뿌듯했다. 주말에 무등산을 다녀온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었다. 스스로 대중목욕탕을 찾아간 것은.

쭈뼛쭈뼛 탕 속으로 들어앉아 몸을 지지고 있으니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이마와 콧잔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문득 '인생에는 정답은 없다'는 말을 이제는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았다.

이는 살면서 꽤 자주 들었던 말인데, 그럴 때마다 그럴듯한 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명하거나 확실한 느낌은 아니어서 여전히 어슴푸레하기만 했는데,

오십이 넘자 삶에 정답은 없다는 걸 확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예전엔 인생에 확실한 정답 같은 것은 없다고는 해도 어떤 공식이나 법칙 또는 규범 같은 것은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삶은 되도록 정직하고 성실해야 하며, 돈이나 물건은 아끼는 것이 좋으며, 머무는 곳은 되도록 청결한 것이 좋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식의 사회통념이나 스스로의 믿음 따위 말이다.

물론 이런 삶의 태도나 방식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내가 가지고 있는 생의 태도나 방식이 인생의 정답이나 규범 혹은 모범에 가깝다고 믿지는 않는다.

또한 삶에 있어 어떤 정형화된 원칙이나 법칙 따위도 존재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 또한 마땅히 없으며, 그저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철학만이 오롯하게 존재할 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삶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일 뿐이며,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은 부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경박하지 않고, 진중하게 접근해야 하며, 이왕이면 위인들의 삶의 본받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각자의 생은 스스로가 책임지고, 사회통념을 벋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어진 인생에서 각자가 쌓아 올린 개별의 성(城)은, 스스로에게 잘 맞추어서 적당히 높고 튼튼하게 쌓아 올려져야만 할 것이다. 또한 생이 어느 정도 익었을 무렵, 그간 쌓은 성에서 밖을 내다보며 남들이 쌓아 올린 성의 모양과 견고함이나 그 높이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긴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성에 대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물론 타인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며 스스로가 지니지 못한 것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쌓아 올리고 가꾸어온 인생은 어디까지나 자기만의 것이라는 스스로의 인정과 몇 가지 자부심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설령 누군가 자기의 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더라도, 뒤돌아서서 콧방귀를 뀔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비록 자신의 성이 남들에 비해 엉성하거나 남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신의 성은 오롯이 당신만의 방식과 특별한 경험으로 쌓아 올린 당신의 흔적과 에너지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불확실하다는 사실만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지만, 우리 인생에는 정답은 없다고 확실히 믿고 있다.


어쩌면 지금껏 쌓아 올린 당신의 성만이 허상처럼 덩그러니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바로 그 성이 인생의 정답이라면 정답인지도 모를 일이다.

뜨거운 탕에서 빠져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거울에 비친 알몸을 물끄러미 보았다.

점점 탄력을 잃고 있는 피부와 성기고 힘없이 가늘어진 머리카락을 보며 씁쓸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더 잦아질 것이다.

문득 바나나 우유가 마시고 싶어졌다.

어릴 적엔 바나나 우유는 큰 사치였다. 아플 때면 아주 가끔 엄마는 달달한 바나나 우유를 사주었고, 엄마를 따라 목욕탕을 갔다가 오는 길에 노란 바나나 우유를 손에 들려주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바나나 우유를 집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진다.

바나나 우유에 경쾌하게 빨대를 꽂아 넣고, 노란 우유 한 모금을 마시며 목욕탕을 빠져나오자

찬 겨울 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인생의 맛은 달거나 쓰지도, 맵거나 짜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질 뿐이리라.

삶에 있어 어떠 어떠한 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어떤 법들이 있다면,

기억들과 함께 서서히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중이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어느새 내 짧은 휴가도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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