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좋아합니다.
도서관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면 늘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켜둡니다. 잠들기 전 침대에서도, 운전을 할 때도, 카페에서도,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멜론' 플레이 리스트에 저장된 음악을 틀어둡니다. 클래식, 팝, 힙합, 가요, 재즈, 락, 블루스, 라틴음악 등등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입니다.
일상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곡들 가운데 와닿는 느낌이 좋다면, 얼른 멜론을 켜서 음악을 검색하고 플레이 리스트에 저장해 둡니다. 하지만 '트로트'를 이런 식으로 찾아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군요. 가끔씩 라디오나 TV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트로트 멜로디를 흥얼거리거나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트로트를 떼창 할 때도 있지만, 트로트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점점 트로트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토요일, 수영강습이 끝나면 아들과 함께 단골 국숫집으로 향합니다.
10년 전쯤 우연히 이 국숫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수영을 한 뒤 출출한 터라 가볍게 요기할 만한 곳을 살피다가 마치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듯한 이 가게를 발견했을 때, 왠지 만만하고 부담 없는 느낌이 들더군요.
조심스레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대여섯 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공간에서 말끔한 인상의 남자 사장님이 혼자 계셨는데, 외관은 허름하고 간소했지만 가게 내부는 사장님 얼굴처럼 깔끔했습니다.
대표메뉴인 듯한 멸치국수를 주문하고 5분 정도 지나자 하얀 소면 위에 부추와 양파, 얇게 채 썬 노란 단무지가 고명으로 정갈하게 올라가 있고, 곱게 갈린 참깨가루가 소복이 뿌려져 있는 국수대접과 발간 고춧가루 양념 옷을 입고 있는 깍두기가 청자빛 사기그릇에 소담하게 담겨 나왔습니다.
맛있었습니다. 멸치육수는 맛이 깊었고, 소면은 탄력이 있어 식감이 좋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맛이 깔끔하고 밸런스가 좋았습니다.
지난봄, 이 가게는 좀 더 넓은 평수로 이전했습니다. 이전을 한 후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바빠서 아주머니도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 가게를 찾을 때마다 은근히 걱정이 됐습니다. 제가 방문하는 시간이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매번 손님이 눈에 띄지 않아 과연 수익이 나올까 했는데, 장사가 잘 된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음식의 맛과 주인의 성품이 좋은 단골 음식점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게들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더군요.
이곳은 저도 좋아하지만 진짜 팬은 제 아들 녀석입니다. 원체 입이 짧은 녀석인데, 이 국숫집만큼은 열광하더군요.
팔 년 전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과 함께 외곽으로 자전거 라이딩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국수나 먹자고 이곳에 들렀습니다. 아들 녀석이 한 젓가락을 먹어 보더니, 맛있다며 흥분한 채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먹던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시간은 흘러, 이제 고3이 된 아들 녀석과 매주 토요일이면 이 가게로 와 멸치국수를 먹고 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습니다.
가게는 보통 오전 10시 30분경에 문을 여는데, 수영 강습이 끝나고 천천히 걸어가면 얼추 오픈시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첫 손님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어쩌면 토요일 이 시간이면 국숫집 사장님은 아들과 저를 넌지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가게문을 들어서면 사장님이 먼저 인사를 건네옵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멸치국수 2개죠?'
'네, 멸치국수요. 삶은 달걀 하고요.'
가게 안에는 FM 라디오 '주현미의 러브레터'가 들려옵니다.
사장님의 아내는 현직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계신데, 그래선지 한쪽 벽면에 매달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대개 트로트나 옛 가요들이 더군요. 보통 이 시간이면 오늘처럼 가수 주현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유행가요를 주로 들려주더군요. 토요일에는 사연과 신청곡을 소개하고 들려주는 것 같고요.
처음에 이런 노래들이 흘러나왔을 때는 귀에 거슬리는 기분도 들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가게를 찾는 횟수가 더해질수록, 그 시절의 음악에 점점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겠더군요.
생각해 보니, 제 기억들은 주로 80년대 초반부터 그나마 도렷한 이미지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억 속에 파묻혀 있는 옛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그 시절 들었던 음악이 아닐까요.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예전에 들었던 익숙한 음악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가사를 흥얼거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끔은 멜로디와 가사를 쫓아 그 시절 어떤 기억 한줄기가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특정 장소나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노랫말이나 노래를 부른 가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이 가게를 들어서기 전이면 '오늘은 또 어떤 노래가 나올까' 하고 적잖은 기대를 하게 되더군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언저리엔 국수를 먹으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트로트'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들었습니다. 나훈아의 '울긴 왜 울어'를 들었습니다. 현철의 '사랑은 나비 인가 봐', 조용필의 '그 겨울에 그 찻집', 혜은이의 '감수광', 세샘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을 들었습니다.
이런 노래들이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노랫말을 흥얼거리고 있더군요.
제 경우엔, 추억은 보통 옛 노래를 타고 오는 것 같습니다.
팍팍했던 지난날을 돌아보건대, 가수 송대관의 노랫말처럼 트로트엔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가운 노래들을 들으며 맛난 국수를 먹고, 가게를 나서면 주말 동안 꽤 기분 좋은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옛 음악들을 통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리며, 결코 만질 수 없는 행복을 쓰다듬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추억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면, 창창했던 젊은 날의 이미지가 피어오르고, '몸은 비록 노새처럼 늙고 지쳤지만 아직은, 아직은 살아있어. 아직까지 죽지 않았어.'라는 안도감을 내쉬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지난주에는 국수를 먹고 막 일어서려는데, 조용필의 '미워 미워 미워'가 나오더군요. 반가운 마음에 잠깐만 들어 볼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잊으라는 그 한마디, 남기고 가버린, 사랑했던 그 사람, 미워 미워 미워. 잊으라면 잊지요. 잊으라면 잊지요. 그까짓 것 못 잊을까 봐.'
조용필의 끓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숨이 막혀 오더군요.
'와! 과연 조용필이구나. 조용필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가게를 나오며 사장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조용필, 정말 잘 부르네요. 전엔 이렇게까지 잘 부르는 줄은 몰랐어요."
사장님은 흥분한 나를 보며 슬그머니 웃음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조용필, 아닙니까. 아무래도 요즘 가수들하고는 다르지요!"
한 번은 남진의 '빈 잔'이 흐르는 가운데 '요즘 들어 이상하게 트로트가 좋아진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 말에 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옛 노래들이 좋아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아마도 그 시절의 음악들은 각자의 시간 저편에 가라앉아 있는 추억을 불러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익숙한 멜로디나 가사가 주는 편안함 때문일 것도 같고요.
세월의 두께가 더해질수록 익숙한 것들이 가져다주는 다정함과 편안함이 있죠.
귀에 익은 옛 노래가 흐르면, 그 시절의 기억들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더군요.
익숙하고 단순한 멜로디를 따라 마음은 말랑해지고 넉넉해집니다. 가슴과 머리를 거쳐 입가로부터 흐뭇한 미소의 파장이 번져나갑니다.
'그래, 그랬었지.'
이 노래가 유행했던 그 시절의 에피소드가 부옇게 흐려진 기억 저편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군요.
옛 노래가 좋은 이유를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추억을 아니, 한때 싱싱했던 자신의 젊음을 소환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토요일 오전 10시 30분이면 멸치육수가 깔끔한 국수를 먹기 위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트로트를 듣기 위해, 정겨운 멜로디와 리듬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기 위해 단골 국숫집을 찾습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진 토요일 오전, 오늘은 어떤 곡이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추억을 불러들일까요.
가끔씩 아들 녀석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나를 보면서 생경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냉큼 국수 한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갑니다.
먼 훗날, 아들 녀석도 자신의 아들과 국수를 먹다가, 우연히 어린 시절 들었던 노래를 듣고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르죠.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늙지만,
멋진 음악들은 오래오래 세상 속에서 숨 쉬고 있을 테니까요.
아무튼, 이제 트로트가 좋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