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밴으로 돌아보는 호주 대륙(10); 케이프 트리뷸레이션
호주 동해안 최북단에 있는 케인즈(Cairns)라는 큰 도시에서 문명 생활(?)을 만끽하며 지냈다. 그러나 도시 생활이 편하다고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떠날 시간이다. 동해안을 따라 캐러밴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최북단에 있는 케이프 트리뷸레이션(Cape Tribulation)을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핸드폰이 터지지도 않는 열대 우림지역이다.
야영장을 예약하려고 이곳저곳에 전화한다. 그러나 자리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끈기 있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야영장 한 곳을 간신히 예약했다. 내가 원하는 장소는 아니다.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그래도 묵을 곳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케인즈와 작별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달린다. 포트 더글러스(Port Douglas)라는 관광지를 지나쳐 계속 운전한다. 차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호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기막히다. 흔히 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는 빅토리아주(Victoria State)에 있는 남해 도로(Great Ocean Road)를 꼽는다. 그러나 이곳 풍경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차창밖에 펼쳐지는 태평양을 곁눈질하며 운전한다.
해안선이 아름다워서일까, 도로변에 전망대(Rex Lookout)를 설치해 놓았다. 전망대에 잠시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낸다. 해안선을 따라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요즈음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조언이 넘쳐난다. 하지만 때 묻지 않은 자연에 몸을 맡기고 온몸으로 호흡하는 것 이상 건강에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도로는 해안을 벗어나 사탕수수밭이 펼쳐지는 내륙으로 들어간다. 조금 들어가니 자동차가 길게 늘어서 있다.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자동차 행렬이다. 강폭이 넓지 않아 다리를 놓아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배를 타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가격도 저렴하지 않다. 수입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많이 기다리지 않고 배에 올랐다. 배는 쇠줄로 묶어서 운행하고 있다. 강을 건너니 도로 풍경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나무가 도로를 뒤덮고 있다. 자동으로 켜지는 전조등은 대낮임에도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할 정도로 해가 들지 않는 밀림이다. 다리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많은 자동차가 밤낮없이 다니면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을 꺼리는 관광지라는 생각이 든다.
야영장에 도착했다. 가격은 지금까지 지내온 야영장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이곳은 세계 문화유산(World Heritage List)에 등재된 국립공원이다. 시설물을 지으려면 제약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숙박 시설도 적을 수밖에 없다. 비좁고 열악한 장소에 캐러밴을 주차했다. 좋으나 싫으나 당분간 지내야 하는 보금자리다.
숙박시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까, 관광버스가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아온다. 버스 일정표를 보니 에마겐 계곡(Emmagen Creek)이라는 장소가 있다. 포장된 도로가 끝나는 곳에 있는 장소다. 관광버스가 들린다면 가볼만한 장소일 것이다.
에마겐 계곡을 찾아 떠난다. 울창한 숲속의 비좁은 도로를 운전하여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캐러밴을 끌고 가지 않기에 운전은 편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영장 크기의 호수가 있다. 울창한 밀림을 지나온 물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장소다. 수영하기에 좋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 더위를 식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옆에 있던 사람이 악어가 서식하기 때문에 물놀이를 할 수 없다고 귀띔해 준다.
잠시 호수에서 머물렀던 물은 도로를 가로지르며 또 다른 밀림 속으로 흘러간다. 도로에는 물이 넘쳐흐르지만, 사륜구동차가 심심치 않게 다닌다. 물을 건너 계속 올라가면 케이프 요크 반도(Cape York Peninsula) 최북단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험한 비포장도로를 운전해야 한다. 튼튼한 사륜구동차에 많은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은 바다를 찾았다. 모래가 유난히 고운 백사장이 펼쳐진다. 야자수가 줄지어 있고 코코넛 열매가 백사장에 뒹굴고 있다. 사진으로 보았던 태평양에 있는 외진 섬, 관광지 모습이다. 고운 모래를 발바닥으로 느끼며 백사장을 걷는다. 구석진 곳에는 호주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맹그로브(mangrove) 나무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해도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은 없다. 악어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열대 우림 지역이다. 따라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니다가 관광객을 위한 산책로(Dubuji Boardwalk)를 발견했다. 나무가 울창한 밀림 안으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동식물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산책로는 지면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 온 이후 계속 비가 내린 것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산책로를 걷는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그러나 굵은 빗줄기도 무성한 나뭇잎을 맞고 떨어지기에 생각보다 걸을 만하다. 우산으로 비를 막으며 울창한 숲길을 발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걷는다. 비가 와서일까, 풀 내음이 진동한다. 분위기도 좋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식당을 찾았다. 제법 큰 야외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서니 수영할 수 있는 계곡이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그런데 옆에 써놓은 문구가 익살맞다. 악어 고기가 들어간 햄버거는 있으나 계곡에는 악어가 없다는 문구다. 악어 햄버거? 귀가 솔깃하지만 먹을 자신이 없다. 소고기 햄버거를 주문한다.
악어가 없다는 계곡에 들어서니 작은 호수가 있다. 물이 조금 차다. 그러나 일찌감치 온 젊은 남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지난 3일 동안 샤워를 하지 못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수영장이 아니라 목욕탕을 찾아온 젊은이들이다. 차에서 숙박하며, 무료 야영장에서 지내는 젊은이들은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내기 일쑤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진다. 문을 열어보니 벗어놓은 신발은 물속에 잠겨있다. 의자와 탁자도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있다. 심한 빗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낸다. 특별한 관광지에서 겪는 특별한 경험이다. 오늘 밤에 겪은 힘들었던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하루 이틀 정도는 지낼만 하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계속하라고 하면 진저리를 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대충 정리하고 근처에 있는 전망대를 찾았다. 심한 경사를 운전해 전망대 가까이 도착하니 핸드폰이 요란하게 소리를 낸다. 카톡 소리와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다. 지대가 높아 전화 통화가 되는 것이다. 반갑다. 외부와 단절되어 무척 갑갑했었다.
핸드폰이 없어도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핸드폰과 한시도 떨어져 살 수 없다.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는 나를 본다. 편안한 삶은 인간을 허약하게 만든다고 역설하던 철학자가 생각난다. 가끔은 익숙함과 편함을 떠나서 지내는 삶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행자들이 찾아 떠나는 고행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주 동해안에 많이 서식하는 맹그로브 나무,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