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밴으로 돌아보는 호주
내일은 바닷가 마을 카룸바를 떠나 호주 내륙으로 들어간다. 다윈(Darwin)을 목적지로 정했기 때문이다. 다윈까지 거리를 알아보았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가면 2,300km 정도다. 그러나 비포장도로를 택하면 1,800km 정도 운전하면 된다. 거리가 500km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택해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쉴 수 있는 마을을 찾아보니 버크타운(Burketown)이라는 동네가 눈에 뜨인다. 서너 시간 운전하면 갈 수 있는 동네다.
아침에 일어나니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청명하다. 요즈음에는 물 쓰는 것을 제한할 정도로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여행객으로서는 날씨가 좋아 지내기 좋지만, 주민들은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디선가 들었던 ‘날씨가 항상 좋으면 사막이 된다'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평소와 다름없이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야영장을 떠난다. 악어 동상이 동네 중심가에 있는 노맨톤(Normanton)에 도착해서는 휘발유를 가득 채운다. 오지로 들어가면 휘발유 가격이 비싸기도 하지만 주유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지에 있는 동네를 향해 내륙으로 들어간다. 가는 길도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의 연속이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달린다. 두어 시간 운전했을까, 메뚜기 떼를 만났다. 심한 지역에서는 메뚜기들이 비 오듯이 자동차로 달려든다. 속도를 줄여보지만 피할 방법이 없다. 수많은 메뚜기를 죽이며 운전할 수밖에 없다.
메뚜기 떼를 벗어나 조금 더 달리니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생각보다는 잘 닦여진 비포장도로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직선 도로라 운전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경사가 있는 곳을 지날 때는 캐러밴이 심하게 흔들리기도 한다.
버크타운에 도착했다. 인구가 200명 조금 넘는 작은 동네다. 그러나 야영장은 만원이다. 야영장 입구에 빈자리가 없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다. 예약하지 않았으면 길거리에서 지낼뻔했다. 이 외진 동네에 왜 사람이 많이 찾느냐고 물으니 겨울에는 남쪽 지방에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철새의 삶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야영장에 캐러밴을 설치했다. 자동차는 물론 캐러밴도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심지어는 캐러밴 실내도 흙먼지가 깔려있다. 물건은 제자리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정리하고 청소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앞으로 비포장도로를 계속 운전해야 하는데, 걱정이 조금 앞선다.
야영장 직원을 찾아가 다윈으로 가는 비포장도로 사정을 알아보았다. 비포장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처음부터 포장된 도로를 택했다면 이 동네에 올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멀다. 고민이다.
결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온천수가 나온다는 관광지를 찾아갔다. 온천수가 있다고 하기에 당연히 온천욕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온천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는 것이 전부다. 물은 손대기가 어려울 정도로 뜨겁다. 온천수가 흘러 내린 지역에는 풀과 작은 꽃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풀이 많아서일까, 캥거루가 떼를 지어 있고 이름 모를 새도 많다. 호주 오지에는 예상외로 온천이 많다. 그러나 한국처럼 온천욕을 할 수 있도록 개발한 곳은 드물다.
온천수를 구경하는데 흙먼지를 뒤집어쓴 큼지막한 사륜 구동차가 주차한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다윈에서 오는 길이라고 한다. 내 자동차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확실한 대답을 꺼린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는 도로가 많이 파여 힘겹게 운전해야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오는 길에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두 개나 교체했다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며 겁(?)을 주기도 한다.
야영장에 돌아와 지도를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이 택하지 않는 길을 나만의 속도로 운전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비포장도로를 택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장고 끝에 결정한 계획은 다음 날 아침에 바뀌었다. 비가 오기 때문이다. 일주일 이상 비포장도로를 운전해야 하는데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 온다면 고립될 수도 있다. 멀지만 안전한 도로를 택하기로 했다.
오늘은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동네를 걸어본다. 오래된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로 사용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큼지막한 종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교회 건물이다. 종소리를 들으며 교회에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교회를 바라보며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관광안내소와 도서관을 겸한 지자체(Council) 건물이 이 동네에서는 제일 크다. 찾아가니 문이 잠겨있다. 그러나 나를 본 직원이 문을 열어 주면서 들어오라고 한다. 관광 할 곳이 있느냐고 물으니 벽에 걸린 서너 개의 포스터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관광은 경비행기로 주위를 돌아보는 것만 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관광은 원주민들이 운영하는데 요즈음 럭비 경기가 있어 다른 동네에 갔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럭비(AFL)를 좋아한다. 따라서 작은 동네이긴 하지만, 이곳에도 럭비 경기장이 있다. 야간 경기를 위해 라이트 시설도 갖춘 제대로 된 경기장이다.
버크타운은 내륙이지만 바다에서 멀지 않다. 그리고 큰 강도 흐른다. 따라서 보트를 가지고 야영장을 찾은 사람도 있다. 야영장에서 생선 손질하는 곳을 따로 마련할 정도다. 손질하는 곳에 가보니 서너 명의 일행이 생선을 다듬고 있다. 큼지막한 생선을 많이 잡았다. 대충 살만 발라내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아까운 생각이 든다.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살이 많이 붙어 있는 생선을 보여주면서 가지고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탐이 난다. 그러나 혼자 지내면서 생선 요리한다고 법석을 떨고 싶지 않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면 푸짐하게 끓여 먹었을 것이다.
생선을 사양하고 식당을 찾아 나선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술집(pub)은 시골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큼지막하다. 술집 건너편에 또 다른 식당이 있다. 건너편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예상외로 동양인이다. 중국 사람 같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메뉴에는 생선 초밥도 있다.
다음날에는 동네 근처를 흐르는 강(Albert River)을 찾았다. 수심이 깊고 수량이 많은 강이다. 강에는 관광객이 낚시도 하면서 주위를 즐길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물고기를 손질 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큰 강이다. 그러나 조수의 영향을 받는다. 강이 바다로 흐르지 않고 역류하고 있다.
다리 위를 오가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나이가 지긋이 든 여자가 다가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외진 곳에 정착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주저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는 단순한 삶이 좋아서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이유는 의료 시스템이 좋아서라고 한다.
의료 시스템이 좋다는 것은 이외의 답변이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설명한다. 매주 수요일 의사가 찾아와 진료한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병은 비행기로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돌보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모든 비용은 무료다.
사람들이 외진 곳에 정착하는 것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병원이 멀어서라는 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었다. 내 생각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평소에 믿었던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지식은 하나씩 축적하는 것이고, 지혜는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평소에 옳다고 생각했던 아집을 하나씩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옳고 그르다는 분별의 삶을 초월한 성인의 경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보다 조금은 더 지혜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평소의 신념을 하나씩 내려놓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