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에 대한 생각

레트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

by ou pire

요즘 거리를 지나다보면 과거의 패션이 유행하는 걸 봅니다. 크롭티(배꼽티)라든가, 혹은 통이 넓은 바지라든가, 또한 남성들의 머리스타일도 가르마펌이 유행하고 있지요.


레트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고열풍이라고 해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과거의 것들이 새로운 감성에 맞춰서 다시 유행하고 있는데요.




이즈음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면 바로 2001년입니다.


2001년 나카모리 아키나의 싱글곡

제가 좋아하는 가수 나카모리 아키나는 이때 It’s Brand New Day라는 곡을 발표했네요. 이 곡의 가사에는 “여기서 살아가는 의미를 계속 찾고 있다. 모든 것은 너의 영혼(마음) 안에 있어. 새로운 나날을 향해 걸어가자”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2001년을 잘 표현하고 있죠. 이 곡이 2001년 5월에 나왔으니, 닷컴열풍이나 밀레니엄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던 열망을 잘 표현하고 있는 가사네요.


확실히 2001년 초반만 해도 모든 것이 꽤나 잘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희망이 파괴된 사건이 바로 911 테러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어렸습니다. 그래서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미국이 공격당했다는 자막을 보고서 뭔 소리야. 미국이 왜 공격당해?라고 생각하고 별 느낌이 없었죠. 다들 처음에는 별 일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가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빈 라덴이 누군지도 몰랐죠. 테러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나오는 속보를 보고서 당황했습니다.


미국의 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하고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나왔죠. 그 당시 미국의 위상은 지금보다도 더 컸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지금의 위치조차 되지 못했죠. 그냥 과거에 힘 좀 쓰다가 망한 나라들에 불과했습니다. 오로지 절대적인 미국의 시대였죠. 그런데 그런 미국이 공격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제국의 중심인 뉴욕에서 비행기가 고층빌딩에 충돌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중계됐습니다.

세계제국 미국이 공격당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나카모리 아키나가 말했던 새로운 날들, 희망에 가득 차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그런 미래가 아니라 공격과 파괴, 혐오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 날이었죠.




미국은 분노했습니다. 뉴욕의 심장부가 무너지는 것과 더불어 미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죠.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를 공격합니다.

미국의 분노, 그 분노를 정당화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 기반이 된 철학자가 바로 “레오 스트라우스”입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앞서 소개드린 칼 슈미트와 친분이 있으며, 또한 제자급이기도 합니다. 칼 슈미트의

정치 =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 이라는 이론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죠.

레오 스트라우스 / 이미지출처 : 네이버


레오 스트라우스의 이론은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극단적 귀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죠.


대중은 멍청하기 때문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절망한다. 그에 따라 사회에 혼돈이 온다. 그러므로 진리가 존재한다고, “고귀한 거짓말”을 해야 한다.
종교나 문화, 정치를 동원하여 신과 진리가 존재한다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치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정예 엘리트만이 담당해야 한다. 이 정치엘리트는 대중이 고귀한 거짓말을 믿게끔 통치해야 한다.
또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을 만들어야 한다. 적이 없다면 가짜로라도 만들어라.
대중에게 적에 대한 분노를 심어주고 우리 편에 대한 자각을 일깨움으로써 사회를 통합해야 한다.

박성래 지음.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 김영사 참조


부시 행정부에는 이런 사상적 기원을 가진 네오콘들이 많이 활동했습니다. 이 네오콘은 아직도 미국 정계에 존재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대중은 멍청한 존재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자유로운 의사표현으로 진리를 만들어가는 자유주의의 이념이나,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민주정의 이념을 거부합니다. 네오콘의 이념은 엘리트주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고귀한 엘리트가 통치해야 하는데, 대놓고 고귀하다고 하면 밥맛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와 같은 미국적 이념이 최고라는 거짓말로 대중을 통합하고, 뒤로는 극단적 귀족주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귀족주의적 정치를 위해서는 대중에게 “적”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침공하여 적의 개념을 확실하게 하고, 이를 통해 미국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보수주의(네오콘) 사상이었습니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많이 참조한 학자가 플라톤입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비밀스러운 진리를 알려준 학자들의 계보도를 만들고, 제자들에게 그 학자들만 읽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스트라우스가 특히 찬양한 학자는 플라톤이었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철인정치”에 주목합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반대한 이유는 당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파시즘”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시즘보다 소수의 귀족정이 낫다는 태도로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인데요.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철인정치를 그대로 가져와서 엘리트주의로 나아가버립니다. 이렇게 엘리트가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귀족정의 중요성을 현대사회에 제시해버리면서 시대착오적인 괴물사상이 탄생합니다. 역사를 무시하고 잘못된 신념만을 가지게 된 결과, 고전시대의 통치모델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복고적인 초울트라보수주의가 탄생한 겁니다.



2001년은 이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시무시한 해였네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20년이 지나고 돌이켜보니, 그때 시작된 분노와 증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역사학자들이 지금 걱정하는 것은 스페인독감이 있고 난 이후 경제위기가 왔고, 그 이후 경제적 문제의 극복을 위해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스페인독감이라는 팬데믹이 지나가고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파멸을 겪었죠. 이처럼 지나간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지 걱정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과도한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만, 다시 유행하는 크롭티나 가르마펌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아요. 밝은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 끔찍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반복학습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걱정이 시대착오적인 과민반응이었으면 좋겠네요.




근본적인 의미에서 레트로, 복고란 불가능합니다. 왕정복고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패션에서의 레트로는 새로운 시대의 패션과 과거의 패션이 결합되어 새로운 패션상품이 나온다는 측면에서 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혁신이 이루어진다면 근본적인 의미에서 “레트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죠.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이 만나 미래지향적인 혁신이 등장한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패션계에 불고있는 레트로는 일종의 레트로-퓨처, 과거와 미래가 결합한 것이라고 불러야 정확합니다.


어쨌든 이런 복고열풍이 문화에서만 이루어지고 정지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거회귀가 버블닷컴의 붕괴나 국제정치 분야에까지 이루어진다면 다시 생각하기 싫은 2001년의 파괴와 분노의 시대로 완전히 회귀하는 것이니까요.


추억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돌려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추억의 세계를 원형 그대로 현실에 돌려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지옥도에 빠지고 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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