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 급증 비해 예산은 턱없이 부족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아너:그녀들의 법정」은 거대한 스캔들이 되어 돌아온 과거와 마주 서서, 세 여성 변호사가 디지털 성범죄 카르텔과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드라마에서 법정과 로펌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언론과 권력이 서로 얽히는 현장이자, 한 사회가 ‘명예’와 ‘정의’를 어디까지 감당할 의지가 있는지 시험해 보는 공간이다. 과거의 침묵과 현재의 싸움,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를 둘러싼 가능성이 한 거점에 겹쳐 있는 셈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성폭행,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를 대리하며, 20년 전 숨겨진 진실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우리가 채널을 돌리는 순간, 화면 밖의 피해자들은 카메라도, 드라마 같은 반전도 없는 현실과 마주선다.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도 전에 수사기관, 의료기관, 상담소를 전전하고, 뒤늦게 “변호사를 선임하라”는 말을 듣는다. 돈이 없으면, 결국 법률구조공단, 공익변호사, 지자체 무료상담실이 마지막 기댈 곳이 된다. 드라마가 비추는 건 화려한 회의실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법정이지만, 현실의 공익변호사는 그보다 훨씬 작은 공간에서, 부족한 수임료와 과한 사건 수를 동시에 감당하며 버티고 있다.
‘성폭력·젠더폭력’ 피해자를 위한 공공 예산
2026년 성평등가족부 예산 중 ‘안전하고 성평등한 사회 조성’ 분야에는 2,909억 원 정도가 편성되었다. 디지털 성범죄 대응 예산은 중앙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인력 확충 등에 14억 원이, 통합 대응 예산에는 전년보다 약 17억 원이 추가로 들어갔다. 성폭력·가정폭력·스토킹 피해자에 대한 무료 법률지원 예산은 9억 원이 늘었고,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 전담지원센터 사업비도 2억 원 증액되었다.
그러나 이 그물망이 실제 피해자의 몸을 제대로 받쳐줄 만큼 촘촘하다고 보긴 어렵다. 2024년 한 해에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인원이 1만 305명으로 전년보다 14.7% 늘었고, 딥페이크 등 합성·편집 피해 건수는 1년 새 227%나 폭증했다. 이 급증 속도를 감안하면, 지금의 예산 증액은 규모 면에서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상담과 쉼터, 의료 지원에 비해 법률 대리와 소송 수행에 직접 투입되는 재원은 특히 더 얇게 깔려 있어, 화면 속 ‘아너’의 법정만큼 현실의 변호사가 피해자 곁을 오래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공익변호사의 시간과 인건비
한국에는 변호사 3만 명이 넘지만, 그 중 전업으로 공익활동만 하는 변호사는 극히 소수다. 대한변협이 프로보노 운영위원회와 공익활동 교육에 쓰는 예산은 연 1,300만 원 남짓이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도 공익변론을 위한 최소 운영비인 연 7,000만 원조차 채우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 숫자를 「아너」의 한 장면에 대입해보면, 디지털 성범죄 카르텔과 싸우는 세 주인공이 화면을 떠난 뒤, 피해자의 곁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변호사는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 된다. 드라마 속 ‘명예를 건 소송’은 한 시즌이면 끝나지만, 현실의 피해자 지원은 몇 년씩 이어지는 장기전이다. 이 장기전을 버틸 수 있는 인건비와 조직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금 공익변호 체계의 가장 큰 균열이다.
법무부는 2026년 예산에서 범죄피해자 지원, 여성·아동 대상 범죄 대응, 디지털 성범죄 대응 인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중에서 공익변호사 조직의 인력 확충이나 공익 소송 전담 인건비를 별도 항목으로 세운 경우는 드물다. 성평등가족부 예산에서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무료 법률지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지원은 대부분 사건당 수임료를 쪼개 보전해 주는 방식에 가깝다. 한 명의 변호사가 사건을 ‘직업’으로서 꾸준히 맡기보다는, 변호사들의 선의와 자원봉사를 전제로 한 구조다. 드라마가 그려낸 ‘프로페셔널 공익 로펌’의 이미지와, 정부 예산 속 ‘공익변호사’의 자리는 이렇게 어긋나 있다.
지자체 예산과 ‘현장’의 공백
지방자치단체들도 나름의 법률복지 예산을 편성해, 무료 법률상담실, 찾아가는 법률주치의, 취약계층 소송구조 사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몇몇 광역시는 지역변호사회와 협약을 맺어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전담 변호사를 두고, 사건당 수임료를 지자체 예산에서 보조하는 방식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사업의 공통점은 ‘짧고 얇다’는 점이다. 많은 지자체 젠더폭력, 법률지원 사업이 1년 단위 공모와 적은 규모의 예산으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한 해 처리할 수 있는 사건 수가 예산 한도에 맞춰 제한되고, 사업이 끝나거나 다음 해 공모에서 탈락하면 지원 자체가 끊기는 구조가 반복된다.
그 사이 피해자들은 “상담은 받았지만, 소송까지 가기에는 돈이 없다”는 벽에 부딪힌다. 「아너」 속 피해자들이 공익 로펌의 일원처럼 세밀한 조력을 받는 장면은, 그래서 더 낯설게 보인다. 현실의 지자체 예산서에는 여전히 ‘무료상담 ○건’, ‘법률교육 ○회’ 같은 양적 지표만 남아 있다.
‘아너’가 비추는 예산의 방향
이 지점에서 다시 드라마로 눈을 돌려보자. 「아너: 그녀들의 법정」은 세 여성 변호사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한다는 기획 의도를 분명히 내세운다. 과거의 성폭력 사건과 그를 둘러싼 권력 카르텔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변호사는 단순한 대리인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 전체를 함께 감당하는 동료로 그려진다. 현실의 공익변호사도 마찬가지다. 공익소송은 회차가 정해진 드라마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장기 연재다. 그 장기 연재를 버틸 수 있도록 공익로펌, 공익단체, 법률구조기관의 인건비와 상근 인력을 책임지는 예산이 없다면, 결국 ‘명예를 되찾는 싸움’은 개인의 헌신에만 기대는 일이 된다.
2026년 정부 예산에서 젠더폭력 대책과 범죄피해자 보호, 디지털 성범죄 대응 예산이 늘어난 것은 분명 반가운 변화다. 하지만 이 예산이 상담, 쉼터, 홍보를 넘어, 실제 법정에서 피해자 곁을 지키는 공익변호사의 시간과 노동까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구조화되어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드라마 속 허구가 현실의 답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질문만큼은 또렷하게 남긴다. 지금 이 나라의 예산서에서, ‘명예와 정의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배정된 공익변호사의 몫은 과연 충분한가. 이 질문에 이 질문에 정부와 국회, 지자체와 공익변호사들이 어떻게 답하느냐가, 앞으로의 공익법률, 젠더폭력 대책을 가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