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대상·수단·예산·시간표 한 페이지에 담기
[사라지는 건 인구가 아니라 정치다] 시리즈 9
우리가 말하는 공약 설계도는 두꺼운 계획서가 아니다. A4 한 장짜리다. 의원, 단체장, 공무원이 모두 같은 양식을 보면서 ‘우리 동네에서 뭘, 언제, 어떻게 할지’를 한눈에 맞춰 보는 도구다. 선거철에만 쓰고 버리는 종이가 아니라, 임기 내내 회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계속 꺼내 보는 실무 양식에 가깝다.
이 한 장에는 다섯 가지가 꼭 들어간다. 목표, 대상, 수단, 예산, 시간표다. 말은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순하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어느 돈으로, 언제까지 할 것인지’를 칸을 나눠 적는 종이다. 이 다섯 칸이 비어 있는 상태로 회의를 하면 말이 길어지면서도 결론은 흐려지고, 다섯 칸을 채우고 회의를 시작하면 회의는 짧아지는데 쟁점과 합의는 또렷해진다. 한 장짜리 설계도는 공약 목록을 정리하는 도구인 동시에, 회의와 정치의 방식을 바꾸는 틀이다.
보통은 목표 → 대상 → 수단 → 예산 → 시간표 순서로 채우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예산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돈이 없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무엇을 위해 쓰는 돈인지가 뒤로 밀린다. 반대로 목표와 대상을 먼저 맞춰 두면, 예산과 시간표 이야기도 ‘이 목표를 위해, 이 대상을 먼저 챙기려면’이라는 조건 위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1) 목표: 이 동네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첫 번째 칸은 ‘목표’다. 여기에는 ‘이 공약으로 이 지역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한 줄로 적는다. ‘청년을 돕겠다’가 아니라 ‘3년 안에 우리 구 청년 정규직 일자리 300개 늘리기’처럼 숫자와 기간이 붙은 문장이다. 이 한 줄이 선명하지 않으면, 뒤에 나오는 사업·예산·시간표도 모두 흐릿해진다.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구는 몇 년 동안 ‘청년 정책 강화를 내세우고 여러 사업을 벌였다. 취업캠프, 토크콘서트, 멘토링 등 사업 이름은 많았지만, 정작 ’그래서 무엇이 얼마나 나아졌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내놓기 어려웠다. 예산특위에서 한 의원이 “결국 뭘 얼마나 바꾸겠다는 거냐”고 묻자, 담당 과장은 행사 횟수와 참여 인원만 나열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 다음 해, 공약 설계도 목표 칸에 ’청년 정규직 일자리 300개, 3년 안에 확보‘라고 적는 것으로 출발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300개를 채우려면 기존 사업으로 몇 개까지 가능하고, 어디서 몇 개를 더 만들어야 하는지’를 놓고 구청과 의회가 함께 따져 보기 시작한 것이다. 목표 칸 한 줄이, 그동안 각자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기준을 한곳으로 모아 주었다.
목표를 적을 때 중요한 것은 멋있는 문장이 아니라, 판단 기준이 되는 문장이다. “유출 인구를 줄이겠다”가 아니라 “매년 빠져나가는 청년 1,000명 중 절반은 붙잡겠다”, “출산율을 올리겠다”가 아니라 “출생아 수 감소율을 4년간 10% 안으로 묶어 두겠다”와 같이 적는 것이다. 이렇게 쓰면 단체장은 임기 말에 무엇으로 평가받을지 알 수 있고, 공무원은 어떤 통계를 기준으로 성과를 관리할지 정리할 수 있으며, 의원은 ‘이 숫자가 과도한지, 현실적인지’를 두고 논쟁할 수 있다.
2) 대상: 누구를 먼저 바꿀 것인가
두 번째 칸은 ‘대상’이다. ‘주민 전체, 청년 전체, 어르신 전체’라는 말은 정치적으로는 편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문장이 되기 쉽다. 현장에 가 보면, 대상이 넓게 적힌 공약일수록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약 설계도에서는 대상을 가능한 한 좁고 또렷하게 쓰도록 요구한다.
한 군 단위 농촌 지역에서 ‘농민 소득 증대’를 내걸었던 단체장이 있었다. 선거 때는 ‘농민 전체를 위해’라고 말했지만, 취임 후 예산을 짜다 보니 비슷한 보조사업이 조금씩 늘어나는 수준에 그쳤다. 이때 공약 설계도 대상 칸을 두고 다시 논의했다. ‘쌀 농가 전체’ 대신 ‘쌀 외에 한 품목을 더 재배하는 50대 이하 농가 300호’라고 좁히자, 금세 구체적인 질문이 나왔다. “그 300호가 읍·면별로 어디에 몰려 있느냐”, “이 농가들이 공통으로 겪는 어려움은 가격인지, 판로인지, 인력인지”를 놓고 통계와 지도를 다시 꺼내 들게 됐다. 대상이 좁혀지는 순간, 행정 안에서의 상상력과 토론이 살아난 것이다.
의원 입장에서도 대상이 구체적일수록 지역구 현장과 연결하기 쉽다. “홀몸 어르신을 지원하겠다”는 말과, “75세 이상 홀몸 어르신 2,000가구 중 안전사고 위험이 높은 500가구를 집중 지원하겠다”는 말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그냥 좋은 말이고, 후자는 ‘내 지역구에서 그 500가구가 어디에 모여 있는지, 이미 어떤 서비스가 들어가고 있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단체장·의원·공무원이 같은 집단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누구를 먼저 챙길 것인가’를 두고 구체적인 선택의 논쟁이 가능해진다.
3) 수단: 어떤 방법으로 움직일 것인가
세 번째 칸은 ‘수단’이다. 여기서는 역할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단체장과 후보는 “청년 창업을 돕겠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고, 공무원은 임대료 지원, 융자, 멘토링 같은 사업 이름을 떠올린다. 의원은 조례를 고칠지, 예산을 늘릴지를 고민한다. 같은 내용을 두고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다른 말로 설명하니, 회의는 길어지고 오해는 쌓인다.
한 장짜리 설계도는 이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수단 칸을 두 줄로 나눠, 윗줄에는 주민에게 설명할 문장을, 아랫줄에는 실제 행정·제도·사업 이름을 쓰도록 한다. 예를 들어 윗줄에는 “우리 동네 창업 청년 100명을 키운다”, 아랫줄에는 “공유오피스 임대료 지원, 초기 자금 융자, 멘토단 운영, 실패 후 재도전 기금 조성”을 적는다. 그러면 단체장은 윗줄을 중심으로 브리핑하고, 공무원은 아랫줄을 보고 세부 계획과 예산을 짠다. 의원은 두 줄을 나란히 보면서 ‘윗줄에서 약속한 방향을 아랫줄 사업들이 얼마나 뒷받침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다.
어느 기초의회에서 골목상권 공약을 둘러싸고 실제로 이런 경험을 했다. 단체장은 ‘우리 군 전통시장 살리기’를 강조했고, 공무원은 시장 환경개선 공사 위주 계획을 세웠다. 의원들은 “정작 임대료와 공실, 주차 문제가 핵심 아니냐”고 지적했다. 수단 칸을 두 줄로 나눠 다시 적어 보니 윗줄에는 “우리 군 전통시장 빈 점포 50곳을 3년 안에 채운다”라고 쓰면서도, 아랫줄 사업 목록에는 임대료 지원·공실 활용·주차 대책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업 목록으로 정말 빈 점포 50곳을 채울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계획은 전면 수정됐다. 수단 칸은 사업을 나열하는 칸이 아니라, ‘말과 일’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고 줄여 가는 칸이다.
4) 예산: 어디서 얼마나 가져올 것인가
네 번째 칸은 ‘예산’이다. 이 칸이 비어 있는 공약이 현장에서 가장 흔하다. 선거 때는 ‘전액 지원’, ‘대폭 확대’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만, 예산 칸이 비어 있으면 공무원에게는 “나중에 알아서 맞춰 오라”는 말로 들리고, 의원에게는 “선거가 끝나면 흐지부지될 약속”처럼 보이기 쉽다.
예산 칸에는 두 가지를 적는다. ‘얼마가 더 드는지’와 ‘그 돈을 어디서 가져올지’다. 처음부터 원 단위까지 산출할 필요는 없다. ‘연간 5억 내외, 그 중 3억은 기존 행사성 예산 조정, 2억은 시·도 보조금 확대 요청’ 정도만 적어도 회의는 달라진다. 단체장은 “행사 예산을 실제로 줄일 수 있느냐”를 스스로 묻게 되고, 공무원은 “어떤 행사를 줄이거나 통합할 수 있을지”를 찾아야 한다. 의원은 “이 행사들을 줄이고 이 공약을 택하는 것이 맞는지”를 주민 앞에서 설명해야 한다.
어느 시에서는 어르신 복지 공약을 두고 이런 일이 있었다. ‘경로당 냉난방비 전액 지원’이라는 공약이 나왔지만, 실제 예산은 기존 지원금에 소액을 더하는 수준으로 편성되었다. 논란이 생기자 공약 설계도를 다시 만들면서 예산 칸에 ‘연간 추가 소요 5억, 재원: 불요불급 행사성 예산 3억 감액, 시 보조금 2억 확보’라고 적었다. 그제야 ‘어떤 행사를 줄일 것인지, 시와 어떤 조건으로 협상할 것인지’를 두고 단체장·의원·공무원이 공개적으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예산 칸 한 줄이, 공약을 ‘누구나 박수칠 말’에서 ‘무언가를 줄이고 다른 것을 늘리는 선택’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산 칸을 채우는 과정은 공무원에게는 재정 구조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이고, 단체장에게는 ‘내가 정말 줄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의원에게는 ‘이 공약을 살리기 위해 어느 사업을 줄이고, 어느 사업을 지켜야 하는지’를 유권자에게 설명할 근거가 된다.
5) 시간표: 언제까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마지막 칸은 ‘시간표’다. 공약이 언제 시작되고,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임기 안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는 칸이다. ‘임기 내 추진’이라는 말은 듣기에 좋지만, 행정 입장에서는 아무 정보가 되지 않는다. 가능하면 연도별·단계별로 나눠 쓰는 것이 좋다.
도시철도 연장처럼 장기 사업을 예로 들어 보자. 한 광역시에서는 선거 때마다 ‘도시철도 ○호선 연장’이 반복해서 등장했다. 시민들은 ‘도대체 언제 되는 거냐’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공약 설계도 시간표 칸에 ‘1년 차: 타당성 조사와 중앙정부 협의, 2년 차: 기본계획 수립과 예산 요구, 3년 차: 실시설계와 보상 계획 확정, 4년 차 이후: 공사 착공과 단계별 개통’ 이라고 적었다. 그러자 단체장은 “내 임기 안에 개통까지 가기는 어렵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대신 ‘1~3년 차까지의 과정은 임기 안에 반드시 끝내겠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버스 노선 개편, 환승 할인 같은 단기 대책을 별도의 설계도로 만들어 ‘당장 1~2년 안에 체감할 변화’도 함께 제시했다.
시간표 칸은 이처럼 ‘단기 과제와 중장기 과제를 나누는 장치’다. 의원은 이 칸을 보면서 ‘올해 예산심의에서 챙겨야 할 것은 어느 단계인지’를 확인할 수 있고, 공무원은 내부 업무계획과 조직 역량을 조정할 근거를 얻는다. 시민 입장에서는 ‘다음 선거 때 무엇을 가지고 평가할지’를 미리 알 수 있게 된다.
갈등을 없애기보다, 자리를 바꾸는 종이
한 장짜리 설계도가 있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예산은 항상 부족하고,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다. 다만 이 한 장이 있으면 “좋은 일은 다 하자”라는 막연한 말 대신, “어떤 목표를 위해, 어떤 대상을 먼저, 어떤 수단과 예산, 어떤 시간표로 갈 것인가”를 두고 논쟁할 수 있게 된다. 공약 설계도는 갈등을 없애는 도구라기보다, 갈등의 자리를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구체적인 곳으로 옮겨 놓는 도구에 가깝다.
후보와 단체장은 이 한 장을 들고 주민에게 방향을 설명할 수 있다. 공무원은 이 한 장을 펼쳐 놓고 세부 계획과 예산을 짤 수 있다. 의원은 같은 한 장을 보면서 공약 이행 정도를 점검하고, 필요한 조례·예산 조정을 제안할 수 있다. 종이는 한 장이지만, 선거, 행정, 의정이 모두 만나는 공통의 작업지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