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접한 오픈AI의 공동창업자 일리야 수츠케버의 토론토 대학 연설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좋든 싫든 우리 모두의 삶은 머지않아 AI와 기계에 의해 송두리째 뒤바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예언처럼 다가왔다. 스크린 너머로 당당하게 미래를 선언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거대한 공포가 서늘하게 휘감은 허무감,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 점 모래알이 느끼는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내가 느낀 그 공포와 허무감의 정체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속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동료에게 총구를 겨눈 이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영화는 지극히 희극적인 상황으로 시작한다. 재취업을 위해, 더 나은 자리를 위해 경쟁자를 살해한다는 설정은 블랙 코미디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만수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드리운 시대의 그림자를, 그가 느끼는 거대한 '허망함'을 목도하게 된다. 기계와 AI라는 불가해한 시스템이 우리 모두를 대체할 것이라는 공공연한 사실 앞에서, 인간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절망이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영화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거대하고 명백한 위협 앞에서, 이토록 무력했던 적이 있었던가. 만수의 총구는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가 겨눈 것은 경쟁 상대인 '인간'이었지만, 그를 방아쇠로 이끈 진정한 공포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이 거대한 적 앞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는가? 나는 그 이유를 우리 사회가 교묘하게 '러다이트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를 직접 파괴하며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라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적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데이터의 흐름 속에, 알고리즘의 연산 속에, 클라우드 서버의 소음 속에 안개처럼 흩어져 존재한다. 이 보이지 않는 적 앞에서 우리의 분노와 불안은 길을 잃고, 가장 만만하고 가시적인 대상, 즉 바로 옆자리의 동료, 나의 이익을 위협하는 타인에게로 자연스럽게 치환된다. 진정한 적은 안갯속에 가려진 채, 인간은 서로를 제거해야 할 경쟁자로 규정하며 자멸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공포이자 허망함 그 자체다. 공격할 대상조차 특정할 수 없는 이 거대한 변화의 파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정말이지 영화 제목 그대로 어쩔수가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목에 어쩔 수 없이 총구를 가져다 댄다. 살아남기 위해서, 시스템의 더 나은 부품이 되기 위해서. 영화 속 만수는 결국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회사가 원하는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부품으로 재탄생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성공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실패이며, 인간성의 소멸을 통해 얻어낸 기계적 승리다.
이러한 아버지의 비극과 정확히 반대편에 그의 딸 '리원'이 서 있다. 리원은 첼로를 연주한다. 그녀는 타인의 악보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연주자가 아니다. 그녀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악보를 창조하고, 자신만의 선율을 만들어낸다. AI가 수만 개의 악보를 학습해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를 작곡해낼 수는 있어도, 리원의 손끝에서 태어난 단 하나의 상처받고 불완전한 선율은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 리원의 첼로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증명하는 처절한 저항이자, 시스템이 결코 이해하거나 복제할 수 없는 영혼의 영역에 대한 선언이다. 부품이 되기를 택한 아버지와, 대체 불가능한 자신이 되기를 택한 딸의 대비는 이 영화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가장 아프고 중요한 질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리원의 길을 따를 용기도, 재능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리원의 독창적인 악보를 만들기보다, 만수처럼 시스템의 완벽한 부품으로 전락하기를 자처하며 불안한 안도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완벽하게 복무하고자 했던 바로 그 시스템, 그 기계가 겨누는 차가운 총구를 맞고 소멸하게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묘사하는, 코미디처럼 비참하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인류의 미래다.
이 거대한 허망함 앞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위로받아야 하는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만수의 공허한 눈빛과 리원의 처연한 첼로 소리를 통해 우리의 비극을 똑바로 마주하게 할 뿐이다. 어쩌면 위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때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결국 대체될 부품이라는 사실을,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말이다. 그 씁쓸한 인정을 공유하는 것, 서로의 공포와 허무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이 ’자동화 시대‘와 ’대량실직’ 이라는 대격변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위로일 것이다. 박찬욱은 결국,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진혼곡을 연주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