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나는 음악에 관한 한,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판사였다. 나만의 법전에는 ‘좋은 음악’의 조건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첫째, 악기 본연의 날 것 같은 사운드가 살아있는가.
둘째, 가사는 인간 내면의 고뇌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셋째, 예측 불가능한 코드 진행과 변주로 귀를 사로잡는가.
나는 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세상의 모든 음악을 심판대에 올렸다. 조금이라도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들을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해 버렸다. 당시에는 그것이 곧 지적인 취향의 증명이라도 되는 양 어깨를 으쓱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이었다.
그 견고했던 나만의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내 삶이 나의 완벽한 통제와 예측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수많은 날들을 살아가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음악에 위로를 받았던 경험들이 쌓여갔다. 격무에 시달린 퇴근길,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아이돌의 경쾌한 댄스곡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하루의 시름을 잊었던 순간. 이별의 아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 상투적이라 비웃었던 사랑 노래의 가사가 내 심장을 그대로 관통하며 함께 울어주었던 순간. 나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험들이었다. 그 순간 나를 구원한 것은 복잡한 화성학이나 철학적 사유가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 내 마음에 가장 절실했던 단순한 멜로디와 솔직한 감정이었다.
그 경험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이것이다. 음악의 좋고 나쁨은 장르나 형식, 가사의 깊이나 연주의 기술력 같은 객관적인 잣대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형태의 음악이든,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음악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 가오는 가였다. 음악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박제된 예술품이 아니라, 듣는 이의 삶과 만나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유기체와도 같았다.
지금은 해외 팝이나 밴드음악를 즐겨 듣는 나지만, 10년 뒤 어느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발라드를 들으며 눈물을 쏟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더 먼 훗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동요를 따라 부르다 까닭 모를 행복감에 젖을 수도 있다. 그 순간 나에게는 그 발라드와 동요가 세상 그 어떤 명반보다 위대한 음악이 될 것이다. 삶의 특정 순간과 완벽하게 공명하는 음악,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좋은 음악’의 유일한 정의가 아닐까.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여전히 과거의 나처럼 자신만의 잣대를 맹신하며 다른 음악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많다. "이런 음악은 진짜 음악도 아니야." "가사가 너무 유치하잖아." "요즘 애들은 뭘 듣는지 모르겠어."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무기 삼아 타인의 취향을 공격하고, 장르 간에 우열을 나누며 소모적인 논쟁을 벌인다. 어쩌면 이는 자신의 취향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로하다. 음악은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평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신나는 춤을 추게 하고, 때로는 조용한 위로를 건네고, 때로는 잊었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 앞에서 ‘급’을 나누고 순위를 매기는 행위만큼 무의미한 일이 또 있을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삶이 다르듯, 각자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도 다르기 마련이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을 향한 멸시와 공격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음악의 세계에서만큼은 그런 불필요한 계급 나누기나 선민의식이 없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자신만의 ‘최고의 음악’을 마음껏 사랑하고, 타인의 ‘최고의 음악’ 또한 미소 지으며 인정해 줄 수 있는 세상.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조용히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담긴, 그래서 나에게는 세상 가장 ‘좋은 음악’들로 가득한 목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