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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희 Dec 02. 2024

자기다움의 시작과 확장

서비스, 메이커, 그리고 감각에 대해 알아봅니다.




서비스, 브랜드, 제품




(목차)
서비스와 메이커의 정의
감각의 본질
감각의 태도
    -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
    - 사소한 일을 큰일처럼 대하는 마음
    - 좋아하려는 마음

의도로 연결될 때, 메이커
    - 맞는 사용자 경험
    - 안정감 있는 이미지

    



서비스와 메이커의 정의



여러분은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어떤 관점으로 보시나요?

정답은 없습니다만, 이 글은 위의 질문에 답해가는 여정의 시작점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실체 혹은 가상 서비스를 무한히 사용하고 느낍니다. 여기서 서비스의 정의는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가령, 서비스(service)의 어원은 12세기 후반 라틴어 'servire(노예가 되다, 봉사하다, 노예로 살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는 'servus(노예)'와 관련 있다고 합니다. 13세기 초에는 '식사를 차리다', 14세기 중반에는 '고객을 대접하다'로 뜻이 확장되었다고 하죠. 현대에 와서 미국의 마케팅학회는 서비스를 '판매를 목적으로 제공하거나 판매와 연계하여 제공하는 활동, 편익, 만족'으로 정의합니다. 이는 상당 부분 서비스 공급자의 입장입니다.


보통 프로덕트 매니저(PM)와 프로덕트 오너(PO)가 정의하는 서비스는 '사용자에게 편의, 혜택, 도움 등을 줄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는 IT 서비스 특성 상 '무형'의 형질만 추가한 것일 뿐, 크게 현대 미국에서 건너온 정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는 시대, 공급자, 그리고 정의에 따라 서비스 목적과 사용자인 우리의 역할이 변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서비스를 소비해야 할까요? 이를 보다 먼저 고민해보며, 사용자를 단순히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인 주체로 바라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가 정의하는 서비스는 '사용자(user)의 입장에서 기능을 고민하고 경험을 의도하는 모든 유무형의 제품'입니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창작자(maker)'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감각의 본질



감각은 많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패션 감각, 예술 감각, 요리 감각 등 말이죠. 단어 자체가 주는 추상적인 느낌도 강합니다. 그래서 단어가 가진 본래 의미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우선 '감각'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감각
1. (명사)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2. (명사)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


한 마디로, 감각은 외부적인 동시에 내부적으로 느끼는 그 무엇입니다. 1의 정의가 외부의 자극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2의 정의가 외부에서 온 자극을 내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각은 외부로부터 존재하는 사물과 이에 따른 자극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감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외부 대상, 내부, 그리고 외부와 내부의 연결이 필수적입니다. 중요한 건, 감각자가 자신 내부의 미세한 감각과 느낌에 접근하지 않으면 자신의 감각을 인지하지 못 할 확률이 높다는 점입니다. 감각은 본래 외부로부터 감각자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발현한 결과물이지만, 현대는 '감각'이 자신의 내부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입니다. 달리 말하면, 감각의 축적이 자기다움의 시작입니다.


유리잔


조금 추상적인가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A씨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각을 아래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A씨는 책상에 놓인 유리잔을 볼 때 깔끔하다고 느낍니다.

1. A씨는 눈으로 외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유리잔이 책상 위에 존재해야 합니다.
3. A씨는 유리잔을 발견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4. A씨는 과거에 깔끔하다고 느끼는 사물의 인상과 느낌을 떠올립니다.
5. A씨는 4의 느낌을 유리잔과 연결해봅니다.

6. A씨는 책상에 놓인 유리잔이 깔끔하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감각'은 우리가 기존에 가진 소중한 조건들이 하나로 모인 결과물입니다. 1~5의 종착점은 6의 감각이지만, 6이 되기까지 많은 우연과 필연이 거쳐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각들은 '나'를 구성하는 원자이자 세포의 역할을 합니다. 사실 감각을 인지하고 재해석하는 데 위와 같이 단계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감각 자체를 재조명하는 일은 언제나 '자기의 감각'을 대상화하는 데 용이하고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저는 종종 제 감각을 인지할 때 번호를 매기거나 상황을 쪼개서 조명해봅니다. 이를 각자만의 방식으로 시도해보면 스스로의 익숙하거나 낯선 관점이 드러납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감각의 축적이 자기다움의 시작입니다. 축적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축적의 질을 결정하는 건 감각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감각은 후천적이고 정성적인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감각의 태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

참 모호한 말입니다. 감각은 후천적이고 정성적인 결과물이라니. 이 글을 쓰는 스스로 역시 감각과 의도를 정의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보다 중요한 일은, 그 과정에서 질문하는 것이겠죠. 제 생각과 글을 읽는 여러분의 생각이 다른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는 보통 '좋다'는 말은 잘 하지 않습니다. 좋다는 건, 나쁘다는 것이 있는 상태에서 결정하는 마음입니다. '나쁜 것'으로 무언가를 치부하거나 배제시키는 일이죠. 따라서 '좋다'는 말을 하기 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지점은 환영할 일이고, 서로의 관점에 여유를 가져주는 행위입니다. 나아가 이런 여유의 틈을 각자만의 사유로 채울 때 더욱 입체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감각'에 관한 앞선 논의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마저 옹호하고 궁금합니다. 그 누군가가 하는 말 자체보다, 그 누군가의 여러 마음과 관점에 집중할 때 다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가의 생각이 사실 제가 가진 사유의 일부일 수 있고, 또한 앞서 정의내린 감각의 본질을 탈피해 "본질이 의미가 있어?"라는 새로운 질문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글을 읽고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수직보다 수평적일 때, 우리는 보다 멀리 볼 수 있으니까요.


커피 프론트 (coffee front)



사소한 일을 큰일처럼 대하는 마음

최근에 집을 새롭게 바라보고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집은 생각해보면 가장 심리적으로 가깝지만 가장 감각적으로 멀기도 한 공간입니다. 10년 간 같은 집에 살면서, 변화를 준 적은 거의 없습니다. 10년 전 큰 가구와 작은 물건들은 그대로고,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습관에 익숙해지는 건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이죠. 모순적이게도, 익숙한 만큼 감각적으로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선 제 눈에 들어온 건 컵이었습니다. 물을 마시는 컵, 커피를 내려 마시는 컵 등 매일 제 감각을 결정하는 사물입니다. 여러 시도 끝에, 커피를 내리는 컵을 작은 온더락 유리 잔으로 바꿔보았습니다. 잔이 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양이 줄어 항상 커피를 남기고 버렸던 상황이 줄어들었습니다. 나아가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시각적으로 보이는 커피, 적당한 양 등 모든 것이 조화롭게 느껴졌습니다. 사소한 일이 구체적인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이후 집에 있는 모든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지만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소파, 아무도 보지 않지만 켜지지도 않는 TV, 책상과 높이가 맞지 않는 의자, 처음부터 정해진 조명. 이런 사소한 것들이 제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소한 것을 사소한 것으로 보는 시선과 당위가 스스로의 감각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꿀 수 있는 건 자신 뿐입니다. 자신이 삶의 오너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려는 마음

커피와 물을 마실 때 유리잔이 제 취향이란 건 발견했습니다. 이후 구체적인 유리잔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일은 좋아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예산 내에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유리잔을 찾아내려면 우선 유리잔을 많이 봐야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일상을 살아가니, 평소 생각 없이 방문하던 카페에서 유리잔에 계속 시선이 갔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리잔


직접적으로 마음에 든 유리잔을 발견했지만, 로고나 정보가 없는 유리잔은 카페 직원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죄송한데, 이상한 질문일 수 있지만 이거 어디서 구매한 유리잔인가요? 너무 궁금해서 여쭤봅니다."라고 말이죠. 보통 돌아오는 대답은 "그건... 사장님이 발주해서 사장님만 알 것 같은데, 저는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였죠.


그렇게 몇 개월 간 다니던 모든 카페에서 후보를 추려내고 HAY의 유리잔을 구매했습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마실 때, 그 유리잔이 매번 제게 좋은 느낌을 선사합니다. HAY 유리잔 역시 제가 즐겨 다니는 카페 사장님의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감각은 역시 혼자 결정되기보다, 누군가의 감각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더라고요. 주변의 여러 감각을 둘러보고 구매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블루 보틀 (blue bottle)







의도로 연결될 때, 메이커



맞는 사용자 경험

HAY를 발견한 이후 궁금해지는 건 메이커의 의도였습니다. "왜 HAY 유리잔은 다른 유리잔에 비해 좋은 느낌을 줄까?"가 화두였습니다. 컵을 잡을 때 그립감, 마실 때 입구 공간감, 그리고 제품 자체 등 모든 부문에서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HAY는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좋은 디자인은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일상 제품을 디자인적으로 재해석하는 덴마크 브랜드입니다. HAY 메이커들이 만든 좋은 디자인이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유리잔의 사례와 HAY는 여러 상황 중 한 가지 예시지만, 이는 분명 메이커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좋은 사례가 됩니다.


HAY 유리잔, 카페 코펜하겐



HAY 유리잔은 다른 유리잔에 비해 입구가 넓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향을 음미할 때 더욱 유리한 구조이며 마실 때 편안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또한 사용자가 잔을 더 잘 잡을 수 있도록 가로로 유리를 쌓아올려 적절한 그립감을 제공합니다. 나아가 잔을 내려놓을 때 더 안정감을 주기 위해, 잔 바닥은 조금 더 깊은 두께감을 가집니다. 결정적으로, 유리잔을 설거지할 때 HAY 유리잔은 다릅니다. 유리잔 입구에 붙은 HAY의 작고 심플한 로고 스티커는 방수 재질이며 쉽게 떼지지 않습니다. 오래 유리잔을 사용해 자연스럽게 떼지도록 의도를 가진 유리잔이었죠. 이로써 로고가 떼지더라도 사용자는 HAY를 기억하도록 설계하는 것입니다.


이는 HAY가 라이프스타일 제품 브랜드로써 사용자에게 깊이 공감해 '맞는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좋음'이라고 정의하지 않는 이유는, '좋음'은 누구에게나 좋을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서비스/제품에 '맞는 디자인'은 사용자 입장에서 기능과 경험을 고민하고 의도한 결과물입니다. 결국 유리잔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맞는 디자인인 것이죠.



출처, HAY 공식 네이버 스토어




안정감 있는 이미지

위의 모든 요소가 결합할 때, 사용자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HAY가 주는 일관된 심플함, 제품 자체가 자연스럽게 가지는 의도, 그리고 브랜드가 가지는 이미지 등으로 말이죠. 서비스/브랜드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안정감입니다. 안정감을 가진 것들은 특별히 창의적이지도 않고, 각별히 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사용자가 해당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억됩니다. 나아가 서로 공유하게 됩니다.



이 모든 건 메이커가 가진 감각들입니다. 제가 정의한 이상적인 메이커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사용자 입장에서 기능을 고민하고 경험을 의도하는 것
2. 1을 잘 구현해 사용자, 커뮤니티, 그리고 시장(market)도 공감하게 하는 것
3. 1,2를 메이커 스스로의 방식대로 지속하는 것


이는 책 <일의 감각>에서 조수용님의 사유를 빌려 응용한 정의입니다. 위의 방식들을 반복하고 실험하는 메이커들은 항상 주변에 존재합니다. 이런 메이커들은 자기다움을 '확장'한 경우입니다. 이는 앞서 자기다움의 축적과 태도에서부터 생성된 하나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메이커는 항상 누군가의 사용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역시 그런 메이커가 될 수 있을까요?


위 질문은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메이커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집니다. 이를 위해 앞서 논의했던 감각을 가진 메이커를 발굴하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감각의 본질, 태도, 그리고 의도로 연결될 때'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용자의 감각부터 메이커의 감각까지 다뤄 보았습니다.


<감각과 의도 사이, 메이커>는 다양한 감각적인 메이커와 서비스/브랜드를 깊이 있게 만나고 아카이브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 감각적인 메이커가 될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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