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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연 May 01. 2018

말랑말랑해서 시원해

신발 그거(장화) 신고 가게?
응. 이거 예뻐.
덥지 않을까?
아니야. 시원하고 좋아.


아이는 비 오는 날 신었던 장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 장화를 신고 나가기를 원했다. 해가 쨍쨍한 날들이 이어졌고 무척 덥기까지 했지만 아이에게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아이가 무더위에 장화를 신고 발에 땀을 모으며 외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도 같이 모을 거라는 사실을 염려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 마음만 접으면 우리의 외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의 의견은 마땅히 접었고 아이는 당연한 듯 화창한 무더위에 장화를 신고 외출을 했다. 나는 더웠지만 아이는 덥지 않았다. 아이의 장화가 아이를 더욱 가볍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난생 처음 하이힐을 샀던 날, 나는 비로소 진정한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배낭 같은 책가방을 짊어지고 언덕 위 학교를 매일 등산하느라 종아리 알통은 이미 수준급으로 단단해졌거늘, 그래도 가느다란 하이힐에 억지로 발을 구겨 넣으며 마냥 행복했다. 마치 신데렐라가 된 거 같았다. 진정한 여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설레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 화장대에서 몰래 립스틱을 바르고 엄마 구두를 신어보며 즐거워했던 기억과는 차원이 달랐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산 하이힐은 내게 진짜 여자를 선사해주었다.


그때부터 하이힐은 긴 시간 나와 함께했다. 편한 신발이 어울리는 장소에 갈 때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하이힐을 신었다. 작은 키를 커버하고 싶은 이유는 두 번째였고, 사실은 내가 예뻐 보인다는 느낌이 중독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중독성은 나를 높은 신발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가느다란 하이힐을 신고 뚜벅뚜벅 잘도 걸었다. 때로는 열심히 달렸다. 마치 하이힐이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여성의 각선미와 키가 높아질수록 자존감도 높아지고 그만큼 성공에도 가까워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거 같기도 하고…(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남자친구는 제발 하이힐 좀 신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자기를 만날 때만큼은 꼭 운동화를 신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운동화가 얼마나 예쁘고 편하냐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를 만날 때마다 하이힐을 고집했던 이유는 언젠가 그가 흘리듯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여자는 확실히 하이힐을 신었을 때 각선미가 더 예뻐 보이는 거 같긴 하더라.” 


남편이 된 그는 여전히 내게 하이힐을 신지 말라고 잔소리를 한다.

“편한게 우선이지. 편한 신발을 신어야 활동도 편하게 하지.”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억지로 불편한 신발을 신을 열정이 남아있지 않다.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구만으로 하이힐에 발을 넣을 용기가 없었다.


안 더워?

응. 말랑말랑해서 시원해.

안 불편해?

응. 엄청 편해.


무더운 날 장화를 신고 어기적 걸으면서도 신이 난 아이의 표정을 보니, 하이힐을 신고 종종거리면서 신나게 거리를 활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발은 불편하고 몸은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고개만큼은 꼿꼿하게 세웠고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었다. 아이 역시 그랬다. 땀도 나고 발도 불편했겠지만 아이에게는 그것을 감소하고 좋아하는 걸 지킬 용기가 있었다.


각선미를 포기하고 열정도 사그라드니 내 발에는 어느덧 편안함만 남았다. 오래 묵혀둔 하이힐에 먼지가 쌓여간다. 신지도 않을 하이힐을 꺼내서 괜히 한번 만져본다. 이것이 진짜 내가 신던 신발이 맞는지 신기하고 이상하다. 이제는 낯선 느낌마저 드는 지나간 나의 열정들…. 좋아하는 걸 지킬 용기보다 당장의 안위에 길들여져 사는 삶이 아이에게는 아주 늦게 찾아왔으면 좋겠다. 나 역시 언젠가는 내 하이힐을 다시 찾으련다. 각선미는 포기해도 좋으나 그 안에 담겨 있던 내 열정만큼은 그냥 흘려보내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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