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음'이 있기에 신보다 위대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고...

by 다니엘 조

까마득히 먼 옛날,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을 소재로 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서양 문학의 출발점이자 걸작이라고 칭송받는다. 몇 천년동안 몇 세대를 걸쳐 일리아스는 후손들에게 전해져 수많은 판본들이 널리 퍼졌고, 오늘날에는 책은 물론이고 블록버스터 영화로까지(좀 오래되긴 했지만..) 제작되어 트로이 전쟁의 숨막히는 순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정작 원전에 가깝다고 하는 판본을 보게되면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일리아스와는 다른 스토리가 쓰여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일리아스의 절정인 '트로이의 목마'는 정작 일리아스에는 없는 내용이다. 혹자는 트로이 전쟁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트로이 전쟁 자체가 있었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원래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 '일리아스' 말고도 '오디세이아'를 비롯해 몇 편의 서사시가 더 있다. 바로 그 다른 서사시에서 우리가 들었던 트로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후반기 몇 일간의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자, 이제 우리 인간들을 수 천년간 매료시킨 트로이 전쟁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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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리아스라는 책을 처음 접해본 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처음에는 기대하지 않고 무심히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다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파리스의 심판과 헬레네의 탈출, 그리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대립,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시작과 10년 간의 치열한 싸움, 헥토르의 죽음과 트로이의 목마 등 책장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넘치게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리스어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책에서는 그때 느꼈던 느낌은 거의 느끼기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리아스는 소설이 아닌 서사시다. 그리고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삼국지연의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를 읽고난 후의 반응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극적 장치, 이른바 조미료들을 뺀 순수한 일리아스를 접하니 읽는 게 어색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그리스식 명칭과 문체는 서서히 적응해갔고 여러 전사들의 전투 장면과 고뇌하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엄청난 무력과 지력을 발휘하는 영웅들은 마치 신이 빙의라도 한 듯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일리아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된 '트로이'에서 봤던 장면들이 하나 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무도 생생한 '죽음의 순간'들이었다. 창과 칼이 바람처럼 날아 전사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땅에 시뻘건 피를 쏟아낸다는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오는 것이 마치 영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을 보는 그 느낌이었다. 이러한 전투 장면들이 지나고 또 휴전기와 함께 다시 전투가 시작되면서 죽음에 대한 묘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일리아스에서 그린 죽음 중 가장 슬픈 죽음은 바로 '친구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 '남편의 죽음'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전투 의지를 상실한 아킬레우스를 깨우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볼프강 페터젠이 감독한 영화 '트로이'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친척이자 아직 미숙하고 어린 학생같은 이미지로 나오지만 원전 일리아스에서는 그리스군에서 손꼽히는 역량을 가진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영화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라오스가 뚱뚱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미녀 아내인 헬레네와 함께 미남으로 묘사되었다.


일리아스의 절정과 결말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1:1 대결에서 결국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밤중에 프리아모스 왕이 아킬레우스에게 간절히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일리아스는 끝이 난다. 헥토르의 죽음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헥토르가 누구인가? 트로이의 영웅이자 왕자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헥토르의 죽음은 영화 트로이에서도 잘 묘사되었다. 헥토르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 왕과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 영화에서는 특히 안드로마케가 넋이 나간 듯 성벽에 주저 앉는 장면으로 나온다. 실제 일리아스에서는 남편인 헥토르가 죽은 줄 모르고 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다가 북소리가 나는 걸 듣고 성벽 전망대로 갔더니 그리스군이 자기 남편의 시신을 질질 끌고 진영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나서 기절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는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적장 아킬레우스를 만나게 된다.


헥토르의 죽음과 그의 시신을 돌려받으러 적진 한복판까지 간 아비 프리아모스 왕의 모습은 호메로스가 그린 인간의 본질이라 볼 수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핫이슈이자 숙제였다. 일리아스에서는 죽음 외에도 인간의 여러 모습을 그리고 있다. 분노, 그리고 복수..특히 분노는 일리아스의 시작을 알리는 인간의 특징이다. 하지만 일리아스에서 그리는 죽음을 통해 영원히 살고픈 당시 인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후손들이 기억해주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 트로이의 마지막에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대사가 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솔직히 일리아스의 끝이 좀 허무해서 그런지 영화의 이 마지막 대사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람들이여 기억해다오. 내가 헥토르와 한 시대를 살았음을. 그리고 아킬레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음을.."




신이라 불리는 영웅도 결국 죽는다. 하지만 그 이름을 남겨 마침내 신의 반열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글 초반부에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을 모티브로 했는데, 이 트로이 전쟁 자체가 허구라는 설이 있다고 했다. 수 천년동안 인간의 마음을 매료시킨 일리아스의 내용이 실제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장소는 어디인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트로이 전쟁이 진짜 허구라면, 호메로스는 더욱 위대해지는 셈이 된다.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 서서시를 쓸 소재를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일리아스를 비롯해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전부 호메로스의 머리에서 나왔다면..대단하다는 말밖에 안나온다.



이제 일리아스의 다음 편인 오디세이아를 통해 길었던 트로이 전쟁의 결말을 보러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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