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씨 Jul 22. 2020

설거지 담당 할머니, 요리 욕심 없는 엄마처럼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아래 글에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그락달그락.

가사 중 제일 좋아하는 설거지를 하던 햇살 따뜻한 어느 날. 괜히 미안한지 곁을 맴돌던 엄마가 말했다, "할머니가 설거지 담당인 게 신기해."

"응? 할머니 요리 잘하시잖아."

"아, 아니~ 할머니가 친구들이랑 여행 가면 설거지 담당이래. 요리는 하는데 설거지는 안 하는 친구가 있어서."

처음엔 이 말이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이어지는 적막 속에서 곰곰이 상상해볼수록 더해지는 낯섦을 느꼈다. 종종 할머니 댁을 놀러 가면 할머니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주방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구첩반상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설거지 담당 할머니라니? 다른 친구가 요리를 할 동안 할머니가 주방이 아닌 공간에서 대기하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담당한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요리 담당 할머니였는데.


할머니 딸에 관해서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어머니가 열심히 준비한 요리를 내어주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듯 머쓱하게 말했다. "나 요리 못해도 돼. 그거 별로 잘하고 싶지 않아." 하하 웃다가 몇 번을 다시 물어봤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확인하려고. 음식은 맛있었고 먹는 내내 칭찬 비슷한 것을 했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생각의 늪에 빠져있었다. 어머니는 진심이었고 나는 틀렸었다. 결혼 직후부터 육아에 전념하며 가사를 오랜 기간 도맡아온 어머니가 가정 중심의 삶에 적응하고 개인적인 욕심도 가사나 가족과 관련되어있을 것이라고 단정 지어 버렸었다. 어쩌면 가방끈이 아버지보다 길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어머니로부터 예상 가능한 말인데도 설거지 담당인 할머니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솔직함을 빌려 비겁하게 말하자면 어머니를 응원하기보다는 그저 사회가 바라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주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 왔었다.


설거지 담당인 할머니와 요리 욕심 없는 엄마. 당연히 그럴 수 있는데 그냥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낯섦이 나를 잠시 멈추게 했고 젊은 여성으로서 파헤치고 부수고자 노력했던 사회 속 가부장제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사고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충격과 괴리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른 가정은 어떨까. 사회 속에서 이런 여성들은 어떻게 그려질까.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담겨있었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15년 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다른 가족들과 조우한다. 서로 등 떠미며 누가 장례식에 갈지 논의할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세 딸. 이번 계기를 통해 알지 못했던 15년 동안의 아버지의 삶을 간략하게 알게 된다. 둘째 부인과는 사별했고 둘 사이에 낳은 딸 스즈(히로세 스즈)는 셋째 부인과 살고 있다는 사실. 부모를 잃고 환영받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중학생 스즈에게 동거를 제안하며 네 자매는 가족으로서 따뜻한 도약을 한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 반해 오랜만에 어머니가 할머니의 7주기 제사에 참석한다는 소식에는 한껏 삐뚤어진 감정을 표현하는 첫째 사치(아야세 하루카). 그에게 14년 전 집을 나간 어머니의 모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집을 처분하자는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다툼을 하는 도중 어머니는 스스로 "죄가 많은 건 알지만 따지고 보면 바람피운 네 아빠가 원인"이라고 과오를 인정하면서 본인의 입장을 성실히 변호하지만, "엄마는 늘 남 탓만 한다"는 딸 사치와 "신랑이 바람난 건 너한테도 책임이 있다"며 말문을 막는 이모할머니.


"요리 못하는 엄마 답지."

오래 끓여야 하는 고기 대신 해산물을 넣는 것이 특징인 해산물 카레는 어느덧 요리 못하는 어머니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어 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딸에게도 맛있게 끓여줄 음식이 되었다. 부인이 있는 남자에게 구애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사과하는 동생 스즈에게 "누구의 탓도 아니"라며 위로하는 사치는 정작 이혼하지 않은, 아내와 별거 중인 남자와 연애 중이다. 그 집에서 늘 숨이 막혔는데 딸들에게는 소중한 곳이 되었다니 신기해하는 어머니는 할머니 산소에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다. 오랜만에 찾아뵌 몹쓸 딸이라며.


사회 속에서 환영받지 않는, 도덕적이지 않은 선택들을 따른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과 그들을 향한 끝없는 비난. 15  외도하여 집을 나간 아버지의 죽음으로 14 전의 어머니의 과오는 왜인지  짙어 보이고, 꼬리표는 바래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질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하물며 자기를 향한 손가락질도 구분할  없는 지경이 되었고, , 어머니, 할머니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은 너무 잘못하고  너무 정직하여 죄책감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주어진 역할이  개인의 역량과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추구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리 담당이 아닌 설거지 담당 할머니와 요리 못하는 어머니는 자연스럽다.


달그락달그락.

내가 먹은 그릇을 깨끗이 헹궈내며 조금 낯선 상상을 해본다. 친구들과 여행 간 할머니가 설거지조차 담당하지 않을 때는 어떨까. 어떤 대화가 할머니를 웃게 하고 어떤 빛깔의 햇살이 할머니를 안도하게 하며 어떤 순간들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아내, 딸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가 아닌 '임정자'로서 풍만한 감정을 느낄까. 요리를 하지 않는 순간 속의 어머니는 어떤 글을 읽고 쓸 때 글의 중요성을 깨달을까. 어떤 음악을 들으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춤을 출까. 오늘 하루는 어땠고, 내일은 어떻게 흘러가길 바랄까. 하루 중 어떤 시간의 공기를 만끽할까. 어떤 일을 할 때 아버지의 아내, 나의 어머니가 아닌 '김이나'로서의 만족감을 느낄까. 설거지와 요리를 하면서 나 또한 설거지를 담당하든 안 하든 괜찮은 할머니와 요리 욕심 없어도 행복한 어머니를 꿈꾼다.

작가의 이전글 선택적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