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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맘 Jul 31. 2020

30만 원의 교훈

누구나 다 만드는 상품



단호박을 수확할 때가 되니 걱정과 불안함이 밀려왔다.


2천 개의 단호박을 딸 일도 걱정이거니와, 그걸 저장할 창고도 없었고, 팔 일은 더욱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통하게 여물어가던 단호박은 기쁨이자 설렘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젠 골칫거리로 전락하다 못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다 팔지 못우의 수 생각해두어야 했을 만큼.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땅에 무언가를 심고 수확하는 행위까지만 농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농사를 사업이라고 생각했다면, 모종이 생겼다고 대책 없이 덥석 받아 심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키우는 동안, 얼마를 받고, 누구에게 팔아야 할지, 생산원가와 이윤은 얼마나 책정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고객을 어떻게 확보하고, 어떤 방법으로 판매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대책 없이 키우기만 잘했다.

아니, 키우는 것 역시 땅이 다 알아서 했다.

남편과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심어준 일 밖엔 없었으니까.


"이걸 다 어떻게 하지?"


"동네 마트에 한번 가볼까?"


"그런데 우리 걸 사줄까?"


"밑져야 본전이지. 일단 가봐야지. 방법이 없잖아."


동네에서 좀 크다는 마트를 찾아간 남편은 어찌어찌 이야기가 잘 되어 량 다 납품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가격은 둘째치고 몽땅 다 사준다는 거래조건이 더 기뻤다.

농사를 짓다 보면 아롱이다롱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큰 녀석, 작은 녀석, 엄청 큰 녀석, 엄청 작은 녀석. 적당한 녀석, 동그란 놈. 넓적한 놈. 뾰족한 놈 등등.

그런데 그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몽땅 구입해준다니 너무나 감사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호박을 따고 콘티에 담았다. 1박스씩 채워질 때마다 행복했다. 우리의 귀농 첫 수입이 이렇게 땀으로 채워지니 뿌듯했다.

단단한 호박 꼭지를 가위로 잘라 다듬느라 손가락에 방아쇠 증후군이 생겨 잘 구부러지지 않아도 마냥 행복했다. 귀농 5개월 만에 처음 벌어보는 돈이었다.


그렇게 모두 수확해서 3차례에 걸쳐 마트에 실어다  주는 수고까지 마친 후 손에 쥔 돈, 180만 원.

모종값을 빼고, 비닐피복비를 빼고, 려 쓴 농기계값을 빼고, 등등의 들어간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이 30만 원이었다.


30만 원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이다.

아니, 턱없이 적은 돈이다.

4인 가족이 물놀이장에 가서 하루에 다 쓸 돈이다. 그걸 우리 부부는 4개월에 걸쳐 벌었다.

감격이 벅차오르면서 기뻐야 하는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흘렀다.


600평의 땅으로 4개월을 땀 흘려 고작 30만 원을 벌다니!


런 비효율성이 바로 농업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왜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는지 이해됐다.

속옷까지 흠뻑 젖을 만큼 뙤약볕 아래의 고된 노동의 대가라 하기엔 너무도 초라한 수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다. 귀농한 의미도 없다.

이런 방식으로 시골에 살다가는 굶어 죽기 딱 알맞았다.

다른 방법,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골생활이 즐거우려면 적어도 배가 고파서는 안되니까 말이다.

생산에서 판매까지의 모든 영역에서 점검하고 새로운 접근 방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이제, 시골에서의 낭만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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