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 1-2코스 일부를 걷다 (죽성사거리에서 대변항 척화비까지)
갈맷길 1-2코스는 기장군청을 출발하여 대변항, 해동용궁사, 송정을 거쳐 해운대 문탠로드 입구까지 21.4km의 길이다. 1시간에 3km를 걸으면 7시간이 걸리고, 1시간에 4km를 걸으면 5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갈맷길 안내서에 소개된 표준 시간은 6시간이다.
잠자리에 들고서도 머릿속은 갈맷길 생각으로 설렘 반 걱정 반이다. '폭염이 예고된 7월의 마지막 날에 21.4km를 다 걸을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이번 기회에 1-2코스를 다 걷고 싶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해동용궁사까지 3시간 정도만 걷는 것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걱정을 하다가 마침내 일정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고 생각한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 길을 많이 걷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길을 가면서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면 된다. 힘이 들거나 멈추고 싶으면 거기에서 멈추면 된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의 인내력을 시험하거나 나의 한계를 확인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자유롭게 걸을 뿐이다.
아침에 길을 나서려 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여름 방학이라고 창원에서 조카 둘이 와 있다. 게다가 오늘은 나흘간의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다. 나 혼자 길을 걷자고 아내와 딸을 두 조카와 함께 두고 가자니 꺼림칙하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 물어본다. "나와 함께 갈맷길 갈 사람? 은유야 같이 가자. 너희들 함께 가지 않을래? 당신은 어때?" 아무도 함께 갈 뜻이 없음과 나 혼자 나가는 것에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조금은 마음 편하게 집을 나섰다. 오전 9시이다.
39번 시내버스를 탄다. 10시경 갈맷길 1-2코스가 시작되는 죽성 사거리에 내려 죽성로에 들어선다. 바람에 살랑이는 잎새처럼 이는 기대감. 봄 비 내리는 4월의 죽성로는 차창밖으로 그냥 그대로 한 폭의 초록 수채화였는데, 한 여름의 죽성로는 어떨까?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죽성로는 잠깐 쭉 뻗은 시원한 모습을 보여 주더니, 곧 뜨거운 여름 길이 되었다. 비에 젖은 사월의 죽성로와 뙤약볕쬐는 한여름의 죽성로가 같은 길일 거라고 애초에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인가가 드물어지면서 도로가의 보행로도 점차 없어지고, 좁은 이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에 신경을 쓰면서 갓길을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죽성로를 40~50분 걸었을 것이다.
두호마을, 갈맷길 1-2코스에서 처음 들리는 마을이다. 두호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두모포라 불리었는데, 이곳은 연안방어를 위한 수군이 주둔했던 군사요충지였다. 지금도 두모포진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축조한 왜성이 마을 뒷산에 남아 있다. 왜란 후 두모포진은 부산 수정동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북쪽에서 죽성천이 흘러드는 곳에 작은 지방어항인 두호항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언덕 위에는 노거수老巨樹 다섯 그루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으며, 그 가운데 국시당이라 불리는 서낭당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서쪽에는 봉대산이 죽성만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정상에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마을 동쪽에는 해안 암석과 어우러진 동해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해안을 따라 황학대, 기장 죽성 성당, 어사암이 있다.
기장 죽성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원한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해안 암석에 그림처럼 올라앉아 있는 죽성 성당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다. 이곳에서 예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조선시대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죽성을 자주 찾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죽성은 예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명소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살다 간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야기가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라면 더욱 흥미가 간다.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대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여기에 있었다. 기장에서 7년간 유배생활을 할 때, 그는 죽성 해안의 작은 섬 송도의 아름다움에 끌렸다. 아름다운 바다, 시원한 바람, 코 끝을 스치는 바다 냄새와 해송 향기, 파도와 갈매기 소리가 그의 시름을 달래 주었다. 그는 이곳을 양쯔강 하류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황학루에 비하면서 황학대라 이름하였다.
봉대산 높은 곳에서 죽성만을 내려다보면 날개를 활짝 편 학 한 마리가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기가 막히게도 방파제는 학의 긴 부리처럼 보인다. 해송이 드문 드문 자란 황학대는 학의 머리, 오른쪽 암석 해안과 왼쪽 해안은 좌우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푸른 학의 머리에 황금빛 암석과 모래사장이 두 날개가 되어 황학은 북쪽을 향해 날고 있다. 고산은 백성의 병을 치료할 약초를 캐러 봉대산에 올랐다가 죽성만을 내려다 보고 학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옛날 유배생활의 시름을 씻어주던 황학대의 절경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고 30여 그루의 해송만이 옛날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10명 남짓 올라설 수 있는 6~7m 정도 높이의 조그만 바위 언덕 앞에 초라한 황학대 안내문이 안쓰럽다.
아름다운 자연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짓이겨 버리는 인간의 몰지각함이 슬프다. 조선 최고의 시인 윤선도가 극찬한 황학대의 절경을 지루한 회색 시멘트로 덮어버리고, 볼썽 사나운 전봇대와 황학대 주위 공간을 가로지르며 시야를 방해하는 전기줄로 궁색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기장 군청에서는 하루 빨리 황학대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초라하게 남아있는 황학대에 올라 본다. 바다를 바라본다. 아! 아직도 여전히 황학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아름답다.
윤선도의 비 온 뒤 풍경을 그린 시 한수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우후요 雨後謠
구즌 비 개단 말가 흐리던 구룸 걷단 말가,
압 내희 기픈 소히 다 맑앗다 하나산다
진실로 맑디 옫 맑아시면 갇긴 시서 오리라
궂은비 개인다 말인가 흐리던 구름이 걷힌다 말인가
앞 시내 깊은 연못이 다 맑았다 하는구나
진실로 맑디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
황학대 옆에 황학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매력적인 정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희봉 님의 "한국 건축의 모든 것 - 죽서루"에 나오는 '한국의 누정은 밖에서 바라보는 건축물 이상의 의미가 있다. 누정의 존재 의미는 누정의 안 공간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데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땀도 식힐 겸 피곤한 다리도 쉬어줄 겸 신발을 벗고 황학정을 올랐다. 황학정의 계자 난간에 기대어 앉아 죽성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느 듯 나는 400여 년 전 윤선도처럼 그 절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땀을 식힌 후 기장 죽성리 해송을 보기 위해 두호마을 뒷 언덕에 올랐다. 기장 죽성리 해송은 400년 수령의 거대한 해송 다섯 그루이다. 다섯 그루가 그 한 가운데 서낭당인 국수당을 품고 있다. 400년 전 이 언덕에 돌무덤을 쌓고 그 주위에 여섯 그루의 해송을 심어 국수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해방 이후에는해마다 정초에 마을을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서낭당이 되어 현재는 국수당이라 불리고 있다.
언덕 아래 두호마을의 벽에는 가지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쉽다. 벽화보다는 오히려 황학정을 살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을 해 본다.
두호마을 해안에는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이 있다. 마을 앞바다에 있는 널찍한 해안 바위 '어사암'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고종 때 대동미를 실은 조운선이 풍랑으로 죽성 앞바다에 침몰하였다. 굶주린 어촌 주민들이 이 곡식을 건져 먹었다가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붙잡혀 가 문초를 받다 죽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였다.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어사에게 호소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바위(어사암)를 찾았을 때 월매가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이곳의 절경과 월매의 교태로 흥이 난 어사는 흔쾌히 "그 불쌍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하며 주민들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매바위 위에 "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天空更無物 海闊難爲詩 環球九萬里 一葦可航之)"라는 시를 새겨 넣었다.
어사의 은혜를 고맙게 여긴 주민들은 매바위를 어사암이라고 불렀다.
두호마을 다음 마을이 월전마을이다. 두호마을에는 죽성드림 성당을 보러 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월전마을에는 횟집 찾는 손님들이 붐빈다.
월전마을에서 대변항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해변을 따라가는 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작은 고개를 넘어가는 기장 옛길이다. 해변길은 많이 걸었으니, 이제는 산길을 걷자고 마음먹고 숲으로 들어선다.
산길을 20~30분을 걸었더니 여름 소나기와 퍼붓는 햇살을 듬뿍 먹고 무성히 피어난 풀들이 길을 온통 덮어 버렸고, 길은 그 흔적을 잃는다. 이따금 나타나는 갈맷길 표식, 파랑 분홍 리본만이 여기가 길임을 알려준다. 풀숲에 숨어있는 뱀이 무서워 작대기를 휘둘러 풀을 이리저리 치며 걷는다. 진한 풀냄새와 흙냄새, 내리쬐는 햇볕,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함께 걸었던 고생 길이다.
자연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한 편 무섭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 사는 인간은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무서움을 느낀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며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낀다.
길 / 고은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중략)
'길이 없는 곳에서부터 진정한 희망이 시작된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다시 사람이 지나 다니던 흔적이 보이고 산등성이 사이로 멀리 대변항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대변항이다. 갈맷길 1코스 중에서 가장 큰 항이다. 큰 해변이란 뜻의 대변. 해마다 대변 멸치축제가 열린다. 대변의 멸치회는 꽤 유명하다. 항구에는 수산물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몇몇 화가들이 대변항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찍어도 될까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한 컷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는 너무나 쉽게 찍어낼 수 있는 장면을 화가들은 붓끝으로 일일이 터치를 해가며 마음속의 심상을 그려내고 있다.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흥을 표현하고 있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들과 함께 수산과학관을 갔다가 지금 송정 맥도날드에 와 있다. 와서 같이 점심 먹자." 폭염 속을 걷는 고생을 멈출 명분이 생겼다. 세 시간째 무더위 속을 걷자니 예삿일이 아니다.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멈출 때는 멈추자. 무리하지 말자. 혼자 걷는 길이 좋은 이유는 나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대변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대원군 척화비 앞에서 죽도를 바라보며 오늘의 갈맷길 답사를 끝내기로 한다. 다음 갈맷길 답사는 척화비에서 시작하기로 기약하고 181번 버스를 타고 송정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