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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언맨 Oct 20. 2016

오랑대에서 해운대 달빛길 입구까지

도시로 향하는 갈맷길 1-2구간

기억은 희미한 그림자의 조각난 파편이다.  


다시 오랑대를 찾았다. 버스는 해광사 입구 정류소에서 기차여행 정류소까지 점점 해안에 가까워지다가 기차여행 정류소부터는 잠시 해안과 나란히 달린다. 나는 기차여행 정류소에서 내려 해안을 따라 오랑대로 접근한다. 길 한쪽으로는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하면서 자갈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쪽에서는 무성한 들풀이 흔들린다. 푸른 달개비와 진분홍 고마리가 지천인 이 길에는 바닷내와 들의 향기가 섞여 있다.  



지난번 오랑대에 들렸을 때, 놀랍게도 30여 년 전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당시 주고받았던 몇 마디의 말들이 기억의 심연에서 떠 올랐다. 단지 기억의 한 조각이 맞지 않아 의아했었다. 다시 찾은 오랑대에서 잃어버린 조각을 찾았다. 서툰 개구리헤엄으로 30여 미터를 헤엄쳐 건너갔었던 작은 바위섬이 거기 있었다. 


"행님은 팔과 다리가 완전히 따로 노네!"


기억은 오감과 이어져 있는가 보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지나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 올랐다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이때 기억은 미각에 이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나의 오랑대의 기억은 시각과 이어져 있는 셈이다. 큰 바위에 둘러 싸인 천연 풀장과 같은 오랑대의 풍경이 시각에 비치자마자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의식의 수면위로 떠 올랐다.  



오랑대라는 이름의 유래에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부산역사대전에 의하면 "옛날 기장으로 유배 온 친구를 만나러 시랑 벼슬을 한 다섯 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왔다가 술을 마시고 즐겼다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고, "이곳에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오랑대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가 오랑대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동해안 마을 살고 있는 부부였는데, 어느 날 남편 연오랑이 바다에서 미역을 건져 올리다 움직이는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그를 신이 보낸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 기다리던 연오랑이 오지 않자 세오녀는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왔다가 그녀도 역시 움직이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연오랑을 만나게 되었다. 이일 후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고, 신라에서는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연오랑과 세오녀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다만 세오녀가 건네준 고운 비단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다시 해와 달이 빛을 되찾게 되었다. 이 설화에 나오는 동해안 마을이 바로 기장 대변이라는 설이 있다. 그래서 이 곳은 애초에는 연오랑대라고 불렸으나 나중에 오랑대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설도 있다. 삼한시대 때 부산 동래지역에 독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사로국과 가야 사이에 끼인 독로국은 결국 사로국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데, 그때 지배층 일부가 기장에서 출발하여 포항 영일을 거쳐 일본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이 사건이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5377498참조)



오랑대의 높은 바위 위에 자리 잡은 용왕단은 인근 해광사의 부설 암자인지 용왕에게 제사 지내는 제용단인지 알 수가 없다. 이름을 보자니 제용단인 듯 하지만 실상 용왕단 안에는 불상이 놓여 있고, 불자들은 그 앞에서 합장하여 예불을 드린다. 어떤 이는 먼 동해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용왕단 주위에는 무속 신앙인들이 제를 올리기도 한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비둘기와 갈매기들이 오랑대 주위 자갈밭에 떼 지어 앉아 있다가 사람이 다가 가면 일제히 날아오른다. 비둘기를 노리는 것인지, 젯밥을 노리는 것인지 고양이도 바위 위로 머리를 내민다.   



오랑대 해변에는 파도에 밀려온 것인지 낚시꾼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쓰레기들로 지저분한 곳이 더러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화가 섞인 슬픔을 느낀다. 나는 딸에게 깨끗한 자연 속에서의 삶을 물려주고 싶다.  



오랑대를 지나 숲 속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갈맷길 리본이 보이질 않는다. 길은 군사시설물로 보이는 건물의 정문으로 향해있다. 순간 당황스럽다. 육중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는 길의 끝을 바라보다, 그 앞까지 가보기로 한다. 철문 앞에 다다르자 담벼락을 따라 작은 샛길이 나 있다. 보이지 않던 길이 있었던 것이다. 


동암마을. 동암항을 끼고 있다. 한쪽에서는 대규모 호텔 공사가 한창이다. 옛 모습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 그러면 어떻게 변할 지가 중요한 문제일텐데, 동암마을에 불어 닥친 변화의 바람은 이 지역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동암마을에서 수산과학관과 해동용궁사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용궁사에서 동암항까지 산책길 사이에 수산과학관 후문이 있다. 용궁사를 들린 사람들이 산책을 하다가 수산과학관도 관람할 수 있다.



저기 해동 용궁사는 바닷속 용궁이 수면에 어른거리듯 신기루처럼 물 위에 떠 있다. 해동 용궁사는 양양 낙산사와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한국이 3대 관음성지로 유명하다. 관음이란 관세음보살을 뜻하는데 불자들은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 하면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기복적 특징을 지닌 불교 신앙을 관음신앙이라 한다. 무한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바닷가 외로운 곳에 상주하면서 용을 타고 화현 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관음성지는 일반적으로 바다에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용궁사를 지나 용궁사 들어오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 교통안전기원탑에 이른다. 여기서 숲 속 암자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선 후 왼쪽으로 갈래 난 길을 따라간다. 용궁사의 붉은 담벼락은 잠시 갈맷길과 동행하다 급하게 바다 쪽으로 꺾인다. 시랑대 안내판. 바다 쪽으로 꺾인 담을 따라 작은 갈래 길이 풀섶 속에 숨어 있다. 자칫 시랑대를 놓칠 뻔했다. 풀섶을 헤치며 내려가니 용궁사 담 너머로 거대한 불상이 보이고, 담 바깥쪽으로는 유리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돌탑이 우뚝 서 있다.



시랑대! 커다란 바위에 한문으로 시랑대라고 새겨져 있다. 시랑대의 유래에 대해서 '부산문화역사대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시랑대는 1733년(영조 9)에 시랑직[이조 참의]을 지낸 권적이 기장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 바위에서 놀며 바위 위에 시랑대라 새기고 이를 시제로 삼아 시를 지었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이후 홍문관 교리였던 손경현이 학사암으로 불렀다고도 하나, 지금은 시랑대라는 이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시랑대는 원래 부근에 비오리가 많아 원앙대라고도 불렸단다. 그러다 미랑의 전설에 따라 미랑대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시랑대라고 불린다. 미랑의 전설은 해동용궁사의 승려 미랑과 용왕의 딸이 사랑이야기이다. 


"옛날 어느 여름이다. 날이 가물자, 마을 사람들은 원앙대 아래에 있는 해룡단에서 미랑 스님을 모시고 기우제를 올렸다. 스님은 기우제가 끝나자 큰 방처럼 넓적하게 생긴 원앙대에 홀로 앉아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노는 비오리 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듯, 해질 무렵이 되어 땅거미가 찾아들자, 어둠이 머문 원앙대 밑의 동굴에서 아름다운 용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을 동해용왕의 셋째 딸이라 소개했다. 그러더니 원앙대에 올라서는 자신의 아름다운 정장을 찬찬히 벗더니 머리에 얹은 찬란한 진주관이며, 산호와 칠보로 된 목걸이와 귀걸이를 벗어던졌다. 달빛 아래서 아리따운 자태가 빛났다. 미랑 스님은 그만 넋을 잃고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덮쳤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줄을 애초 모른 건 아니었지만, 피 끓는 한 쌍의 젊은 남녀에게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원앙도 떼를 지어 함께 밀월을 즐겼다. 세월은 꿈처럼 흘러 용녀는 아기를 뱄고 만삭이 됐다. 용녀는 동해 용왕의 눈을 피해 원앙대에서 해산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자리를 펴놓고 탯줄을 끊을 가위와 상자를 준비했다. 진통이 오자, 신음하면서 자리를 펴고 아무도 못 보게 하였다. 미랑 스님은 용녀의 분부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용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스님은 병풍암 뒤에 숨어서 소리만 들을 뿐 어쩔  수가 없었다. 용왕은 공주가 인간 세상에 나가 불륜을 범하여 원앙대에서 출산의 산고를 겪고 있다는 급한 전갈을 받았다. 크게 진노한 용왕은 분노하여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용녀는 막 순산하여 그 탯줄을 끊지도 못한 채 성난 파도에 휩싸였다. 이 처절한 광경을 보고 있던 옥황상제는 재빨리 천마를 내려 보내 용녀와 아기를 구하여 하늘나라로 올려서는 천상의 옥녀로 삼았다. 지금도 바위에는 용녀의 탯줄이 붉은 줄로 길게 박혀 뚜렷이 드리워져 있고, 탯줄을 끊은 가위가 떨어진 자국과 네모진 바늘 상자의 깊게 파인 흔적도 그 옆에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다. 바위 끝에 깊게 파여 있는 곳이 용녀를 구출하려고 뛰어내렸던 젊은 수도승의 짚신 자국이라 한다. 후세에 사람들은 용녀를 위하여 해룡단이란 제단을 세워주고, 그들이 사랑을 나누던 원앙대를 미랑대로 불렀다 한다. "

(출처: 부산스토리텔링 http://story.busan.go.kr)


시랑대는 기장 8경의 하나이지만 정작 시랑대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랑대 가는 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용궁사를 찾는 사람 중에 몇이나 시랑대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더구나 시랑대가 용궁사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용궁사 담을 따라 시랑대로 내려가는 길에는 잡풀만이 무성히 자라고 있다.  


시랑대에서 미처 보지 못한 학사암, 미랑과 용녀의 전설에 나오는 탯줄 자국과 가위 떨어진 자국, 짚신 자국은 다음 기회에 찾아 보리라.  



시랑대를 뒤로 하고 다시 숲 길을 걷는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닷물이 맑다. 갯바위에 낚시를 즐기는 조사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숲 길 중간중간에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이 길 끝에는 초소가 있다. 아마 이 길을 가장 많이 걷는 사람들은 밤길 초소로 향하는 군인들이지 싶다. 



공수마을 들어서기 전에 마주한 아주 작은 벌판. 무성한 들풀 사이로 갈맷길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데, 길을 침범한 들풀 사이에 들꽃들이 눈에 띈다. 둥근이질풀, 괭이밥, 쑥부쟁이. 그런데 이게 쑥부쟁이가 맞는지 아니면 구절초인지 나로서는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구절초는 잎이 쑥처럼 생겼다는데, 그리고 한 줄기에 꽃 한 송이가 핀다고 들었는데, 또한 쑥부쟁이는 한 줄기에 무더기로 꽃이 핀다고 하던데. 말로만 듣고 글로만 읽고서는 야생에 핀 꽃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식한 놈>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무식쟁이라고 한 건가?

도대체 시인은 무슨 생각으로 '무식한 놈'이라고 했을까? 상상해 본다. 


친구와 함께 가을 들길을 걷는다. 한참 동안이나. 가을 들판에는 들국화가 만발해 있다. 참 예쁘다. 시인은 허리를 구부려 예쁜 들꽃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감동의 발로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약간의 관심과 보는 눈만 있다면 분명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꽃을 보고서는 구별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잎 모양이 다르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놈이 여태 들길을 걸어왔는데도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하지 못하다니, 이 놈은 자연에 대한 관심도 없을뿐더러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놈이다. 무관심, 무감각, 무감동이라니, 네 녀석은 내 친구도 아니다. 이 무식한 놈아! 




공수마을에는 어촌 체험장으로 사용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래사장이 있었다. 그물 체험장이란다. 그물 당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주 어린 시절 광안리 해변에서 그물 잡아 당기던 기억이 떠 오른다. 아마 밤이었던 성 싶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 담을 통을 하나씩 가지고 나왔다. 모두들 모래사장에서 그물을 당겼다. 영차 영차, 그리고는 우르르 모여서 잡은 물고기를 통에 담아 갔다. 늦게 온 사람은 그물에 걸린 작은 게를 가지고 갔다. 


 공수마을 입구에서 집사람과 딸아이를 만나 송정의 근사한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으로 가서 우아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공수마을로 와서 계속 길을 걷는다.    



송정이다. 소나무 '松'자에 정자 '亭'자를 써서 송정이다. 해운대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지만, 송정은 조용하고 물이 맑아 부산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송정이란 지명은 경주 노씨의 선조가 백사장이 내려다 보이고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은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지금의 송정해수욕장 일대를 예전에는 가래포라 불렀는데 가래는 갈대의 사투리이고 송정천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갈대밭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또한 송정의 지명은 6.25 당시 사격 연습으로 없어진 죽도 바다 쪽 암벽에 서 있던 노송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 가라라고 부르다가 송정으로 바꿨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조선에 가거든 '송'자를 주의하라"는 영을 받고 파병되어 지명에 '송'자가  든 마을에는 접근하지 않는지라 전재를 피하기 위해 송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해송림이 울창한 곳에 세워졌다는 정자가 어디쯤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송정 모래사장 왼쪽에 있는 죽도 끝 자락에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근사한 정자가 하나 있다. 예전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죽도라 불렸겠지만 지금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솔섬이라 불러야 할 판이다. 



송정 해변은 언제부터인가 서핑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송정의 적당한 파도와 얕은 수심 그리고 넓은 백사장은 서핑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모양이다. 바다에는 서핑을 즐기는 사람, 해변도로에 있는 서핑학교에는 서핑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송정은 서핑의 성지가 되어 버렸다. 

 


송정에서 해운대로 가는 길은 여러 개다. 첫째 달맞이 길이다. 열다섯 번 구부러져 있어 십오곡도라고도 불린다. 부산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이다. 벚꽃이 활짝 피는 사월이 이 길의 절정이다. 봄비라도 내릴라치면 떨어지는 벚꽃잎과 함께 솔향기처럼 흐르는 비안개로 달맞이길은 신선이 노니는 그런 곳이 된다. 술에 취한 듯 꿈에 취한 듯 아른거리는 풍경이 장관이다.  


둘째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동해남부선 철길이다. 이 철길은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달린다. 해운대 미포에서 청사포, 송정 구덕포를 거쳐 송정역까지 철로는 기차 없이 달린다. 이 길을 레일바이크로 개발하자는 측과 그냥 그대로 보존하자는 측이 팽팽이 맞서고 있다.  


셋째는 삼포길이다. 세 개의 포구를 이어주는 길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구덕포, 청사포, 미포. 달맞이길과 동해남부선 철로 사이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이다.


나는 삼포길을 버리고 동해남부선을 택한다. 이미 걸어본 길이기 때문이다. 송정에서 청사포까지 동해남부선을 걷는다. 청사포靑蛇浦에는 푸른 뱀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만선을 기대하며 바다로 떠났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부질없이 기다렸다. 어디선가 푸른 뱀이 나타나 파도를 가르며 아내를 남편에게도 인도했다. 하지만 이미 남편은 죽어있었다. 이제는 푸른 뱀의 전설은 옛이야기가 되었고, 푸른 모래 '청사靑沙'로 바꾸어 부른다. 청사포에서 동해남부선을 버리고 달맞이 길로 올라선다

 


도로 한쪽에 자란 벚나무가 도로 위 하늘을 뒤덮었다. 도로변의 전망 좋은 곳에는 레스토랑과 커피점들이 들어서 있다. 한국의 몽마르뜨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갤러리들이 산재해 있기도 하다.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소나무 숲길 문탠로드도 있다. 달맞이 언덕 높은 곳에 있는 해월정에서 보는 달은 대한 8경의 하나이다. 달빛 가득한 해운대 앞바다의 모습을 보고 싶다.     



달맞이 고개를 넘어 해월정을 지나 해운대 모래사장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갈맷길 1코스를 마친다. 4번의 걸음으로 1코스를 마친다. 이제는 해운대와 광안리를 거쳐 이기대까지 갈맷길 2코스가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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