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시공간
"우리 삶의 여러 시기는 서로 겹치곤 한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아무 상관도 없을 여인 때문에, 현재는 상관이 없지만 앞으로 사랑하게 될 여인을 건방지게 거절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348쪽)
마르셀은 질베르트를 사랑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질베르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마르셀은 질베르트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르셀은 질베르트를 만나지 않는다. 이렇게 만남을 유예하면 결국은 사랑도 식어질 것이라 확신하면서, 이별의 아픔을 견디며 만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위의 구절에 나오는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아무 상관도 없을 여인"이 질베르트이다.
그런데, 마르셀은 어느 만찬에 초대를 받았지만,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에 실패한 후라 슬픈 마음에 모든 초대를 거절했다. 집에서는 마르셀이 아버지를 따라 공식 만찬에 가지 않는다고 한바탕 언쟁이 벌어질 정도였는데, 사실 그 만찬에는 봉탕 부부가 그 무렵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던 조카딸 알베르틴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었다.
위의 구절에 나오는 "현재는 상관이 없지만 앞으로 사랑하게 될 여인"이 알베르틴이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아무 상관이 없을 여인' 질베르트 때문에, '지금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앞으로 사랑하게 될 여인' 알베르틴을 거절한 셈이었다.
시간이 흘러 마르셀이 질베르트를 잊었다. 그리고 그는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 후, 과거를 회상하며 '시간'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는다.
"우리는 흔히 삶의 커다란 불행이 닥쳤을 때, 그 불행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바쳤던 희생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내가 질베르트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봉탕 부인의 조카딸(알베르틴)을 만나기를 거부했던 그 저녁, 나는 내가 미래의 가장 큰 기쁨을 발로 차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시간은 내가 질베르트를 잊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녀를 위해 거절했던 그 낯선 소녀를 나의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유일한 존재로 바꾸어 놓았다."
프루스트 소설의 시공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공간 속에서 섞인다. 그 미묘한 시공간에서 프루스트 특유의 표현이 나타난다.
혹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줄거리가 없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 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례대로 읽을 필요가 없으며, 어느 부분에서 시작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은 한 번만 읽고, 다시 돌아와 두 번을 읽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프루스트의 문장들이 보인다. 시간이 뒤섞여 버린 곳에서 피어난 미묘한 표현들과 생각들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