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의 일
한 여름 오후의 햇살이란 어디 가나 잔인하다. 부산 라벤더팜의 보랏빛 위에도 어김없이 햇빛이 내려앉아 빛바랜 라벤더 꽃을 경작하고 있다. 비가 많이 와서일까, 강렬한 햇빛 때문일까. 라벤더 꽃의 보랏빛은 바래가고 있었고, 한쪽 모퉁이에서는 벌써 라벤더 수확이 시작되었다. 라벤더 꽃 사이엔 벌들이 붕붕거리며 이리저리 꿀을 빨고 있다. 한 여름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부지런한 벌과는 달리, 그리 넓지 않은 처음 방문한 라벤더 팜을 둘러보느라 몇 발짝 걸었다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아마도 가만히 땀방울을 들여다보면 보랏빛 라벤더팜의 모습이 담겨있을 것이지만, 이내 손가락으로 땀을 훔친다. 서너 개의 라벤더팜이 순간 사라졌다.
애초에 라벤더 향기가 궁금해 들렀었다. 라벤더팜에 들어설 때 명료하면서도 풍부한 라벤더 향을 느끼며 신경을 곤두 세워 그 향을 기억하려 하였으나 어느 순간 향기은 사라지고 말았다. 후각 세포는 쉬 피로해져 냄새를 오래 맡지 못한다더니, 지난 초 봄 코 끝을 스치며 콕 쏘던 매화향이 그러했었다. 향기는 이 라벤더팜에 가득할 텐데, 정작 난 더 이상 향기를 얻지 못하니 풍부 속의 빈곤인 셈이다.
수확하는 일꾼들의 보라색 앞치마도 그렇거니와 보라색으로 칠해진 목마와 마차, 그리고 자전거 등도 보라색을 뱉어내고 있다. 연인들이 뜨거운 햇빛 아래서 포즈를 취하지만 전혀 더워 보이지 않는 것은 젊음의 싱그러움 때문일까, 산뜻한 햇볕 가리개 모자 때문일까.
라벤더팜의 초입에 농장의 전경이 보이는 곳, 그곳에는 이은숙 화가의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보랏빛 꿈을 꾸다' 보랏빛 라벤더팜이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현장에서는 작가가 붓대신 카메라를 들고 보랏빛 렌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가는 보랏빛 그늘에 앉아 이 라벤더팜의 최고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 햇볕이 사정없이 비칠 때는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빛과 어둠의 교차가 뚜렷해지는 해질 무렵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 때면 여전히 빛이 아롱대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비스듬한 햇살이 가로막혀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지는 공간이 생기기 마련. 이 둘 사이의 빛의 차이를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때가 되자 라벤더팜의 서쪽 저 건너편에 어둑어둑한 숲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 앞에는 살짝 굽은 길이 밝은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또한 그 길 앞에는 보랏빛 라벤더 꽃들이 꿈꾸듯이 보랏빛을 흩날리고 있었다.
사진은 빛을 포착하는 예술이다. 사진작가의 일이란 포착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은 결실을 가져다준다. 제주의 바람을 사진 속에 잡아 두려 했던 김영갑 작가는 한 없이 기다리다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셔터를 눌러 순간을 잡아챈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 판에 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행작가가 그럴 것이다. 사진에 기대지 않고 글로 풍경을 그리는 작가는 마음의 셔터를 누를 것이다. 눈동자를 통해 마음에 새겨진 풍경은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의 여행작가 숀은 진정 아름다운 순간은 찍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사진을 찍느라 아름다운 순간을 흩트리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에 필름을 장착하지 못한 한심한 작가는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사진을 보며 풍경을 묘사한다. 그리고 사진작가도 에누리 없이 셔터를 눌러야 한다. 사진으로 말해야 하니까.
돌아오는 길에 이은숙 작가의 기다림을 더듬어 보며 삶의 행복도 기다림에 많이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