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짓이었다
여러 해 전, 오십 초반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다. 그랬더니 책을 많이 읽으신, 친구처럼 지내는 형님이 말했다. "자본론은 피가 끓는 이십 대에 읽어야 할 책이지, 오십 대에 읽는 책은 아니지. 오십 대에 자본론을 읽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바보야!"
육십 대에 들어서서 '데미안'을 읽었다. 그리고는 나 혼자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자본론을 읽는 놈이나 나이 들어 데미안을 읽는 놈이나 똑같다.'
아마 십 대 후반이었던 듯하다.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던 때가. 난 주인공 '한스'가 헤르만 헷세 자신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도 내가 '한스'와 같다고 생각했다. 헷세는 청춘의 심리를 잘 잡아내고 있었고, 난 동질감을 느끼며 그냥 헷세가 좋았다. 그리고 그 당시 '데미안'을 읽으면서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속에는 뭔가 신비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꼈다.
별이 되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소년은 절벽에서 별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러면 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이 허공에 뜬 순간 소년은 이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추락하여 땅에 부딪혀 죽었다. 만약 그 소년이 끝까지 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그 믿음대로 되었을까?
데미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난 이 이야기가 믿음의 신비를 설파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진리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오십에 접어들어 '싯달타'를 읽었다. 서양 철학과 종교에서 찾을 수 없었던 깨달음을 동양의 철학과 종교에서 찾고자 했던 헷세의 방황이 결실을 맺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까지였다.
'지와 사랑'을 읽었을 때 난 헷세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고와 표현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고, 오히려 풋내가 나는 듯 느껴졌다. 그의 글은 성장 소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육십 들어 다시 '데미안'을 읽었다. 예전에 읽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그 속에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와 사랑'에 이어 다시 한번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성장 소설의 한계 내에서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어떻게 보면 현대의 자기 계발서의 범주에 속하는 듯 보였다.
이번에는 헷세가 '데미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보였다. 하지만 조금은 어지러이 정리되지 않은 개념들,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지는 신비적인 색채들. 예전에는 마음을 끌었던 요소들이 이제 오히려 유치해 보이는 건 나이 듦 때문일까?마음이 늙었기 때문일까?
'데미안'에 드러난 헷세의 논점 몇 가지를 축약해 본다.
첫째,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이른바 선과 악. 헷세는 이분법적인 세계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선과 악의 두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신 아브락서스를 향해 있다. 삶이란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악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또한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 지는 함부로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헷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모호하다. 헷세의 사상은 서양의 합리성을 떠나 동양 철학의 모호함에 깃들여 있다.
둘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그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그는 신에게로 향한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서스."
데미안은 선각자이자 유혹자였다. 강제하지 않는 유혹자이다. 싱클레어는 성장기 내내 끊임없이 두 개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몸부림친다. 어둠의 세계를 향한 그의 몸짓은 그의 성장기를 지배한다. 전통적인 삶의 가치를 버리고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살라고 충동질하는 데미안과 세리토리우스의 유혹이 거세다. 하지만 그 유혹은 사실 싱클레어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 당기는 유혹일 것이다. 자기 자신만의 삶은 어둠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악의 세계를 말하는 듯 하나 - 사실 전통적인 가치 체계로 보면 악의 세계인 것은 맞다 - 사실은 그 최종 도달점을 알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지워진 그 운명의 삶은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야 할, 암중모색하며 나아갈 미지의 세계라는 점에서 어둠의 세계인 것이다.
헷세는 전통적인 가치를 깨뜨려야 할 그 무엇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 스스로의 운명적인 삶을 살아나가는 데 장애물인 것이다.
헷세는 깨뜨리는 데만 골몰해 있다. 깨뜨린 후의 세계는 무엇인지, 아니면 무엇을 다시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셋째, "본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기필코 어떤 것이 필요하게 되면 그 필요불가결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법인데, 그런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것을 갈구하는 그 사람 자신이다. 그 사람 자신의 욕구와 필연성이 그 사람을 그곳으로 데려간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말과도 통한다. 의지를 무엇에 집중만 시키면 반드시 목적은 달성된다고 헷세는 말한다.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싱클레어가 사모하는 에바부인은 싱클레어에게 "나는 선물을 주고 싶지 않아요. 획득당하길 원하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싱클레어가 에바부인을 진정 사랑하고 정말 간절하게 원한다면, 싱클레어 자신의 의지로 획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멋진 자기 계발서의 한 구절이다. 젊은이에게 앞으로 나아갈 큰 힘을 주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냉소적인 건가?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다 성장한 성인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그건 시효 소멸과 같은 것이다. "아브락서스는 신이며 동시에 악마이지.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한 몸에 지니고 있지. 그는 자네의 어떤 사상에도, 자네의 어떤 꿈에도 반대할 이유가 없어. 자네가 언제가 비난할 여지가 없는 정상인이 되면 그는 자넬 버릴 거야. 그리고는 자신의 사상을 요리할 수 있는 새로운 냄비를 찾게 되겠지." 아브락서스는 몸부림치는 성장기에 있는 인간만을 찾아다니는 셈이다. 그러니 나에게 데미안을 읽는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