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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Dec 04. 2022

<헤어질 결심>

뒤늦은 감상과 논평이 효과적인 경우는 그것이 고전에 관하는 경우이다. 헤어질 결심은 이 시대의 고전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대주제 안에서 사랑이라는 소주제를 펼쳐내는 박찬욱의 연출은 관객이 혼란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만든다. 사랑의 아포리아에서 자기를 비워낸 한 개인으로서 보이는, 글 쓸 결심.       


바다와 해준     

바다는 채우지 않는다. 바다는 스며든다. 헤어질 결심도 그러하다. 이 영화는 우리의 공허함을 채운다거나 삶의 무료함을 위로해주거나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는다. 다만, 갈비뼈 사이에, 혈액 중에, 지방과 근육의 접경 지대에 스며든다. 이 영화는 관객을 해준으로 만든다. 영화 속 해준의 시선은 관객이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과 상통한다. 불쾌함에서 시작하여 간절함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를 생각나지 않는 상태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복잡하면서도 간결하고, 난해하면서도 단순하고, 작품 같으면서도 텍스트이고, 산에 가고 싶으면서도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헤어질 결심을 하면서도 만남을 이어가는...


마침내 죽었다     

중국인 여자의 죽음과 홀로 남은 늙은 남편. “남편이 불쌍해” 해준의 거짓말은 자기 지시적이 되었다. 해준은 불쌍해졌다. 아내와의 소원함, 중국인 사랑-자의 죽음, 홀로 해변을 배회하는 고독함. 마침내. 긍정과 부정을 아우르는 포괄적 어휘, 그것이 의미가 일맥상통하는 죽음과 병렬되었을 때 드는 위화감. 영화가 말하는 것도 위화감이 아닐까. 해준과 서래의 사랑,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다. 하지만 불륜, 치정, 혹은 용의자와 형사의 이뤄질 수 없는 결합? 그것들은 사랑의 불협화음을 보여준다. 드디어 마지막에 찾아온 죽음. 그것은 사회가 용인하지 않은 사랑의 말로이며, 미제 사건의 멜로이다.      


아내의 속삭임 

숫자와 근거, 데이터와 통계. 정안이 해준에게 전달하는 텍스트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들이다. 수치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숫자에 짓눌린 개인의 죽음이다. 피의자와 피해자의 형용하기 힘든 관계를 추적하는 직감과 대비되는 치밀한 이성의 논리는 해준과 서래의 관계 맺음의 충분조건이다. 불륜의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산이다. 모든 통계는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 주지 못하며, 그것에 뭉개진 개인은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 같으며, 모래에 감춰지길 원하는 깊숙한 곳으로의 파묻힘의 다른 이름이다.      


헤어질 결심

누구와? 서래와? 정안과? 사건과? 직장과? 살인과? 폭행과? 가정과? 높은 곳에서 아래를 쳐다보는 신의 시선에서, 그가 헤어진 것은 세상임이 포착된다. 그는 세상과 사회와 구조라는 거시적인 것에서 헤어진다. 그는 한 명의 개인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사회의 연결로 직결되지 않는다. 비대칭적 구조와 단절에서 찾아오는 사회에의 낯섦은 청록색을 띤다. 청색 같으면서 녹색인, 녹색 같으면서 청색인, 오묘하고 모호한, 애매하고 헛갈리는 정동은 개인의 내면을 흐르다 심장 아닌 마음에 침전된다. 그 침전물은 사회로 확대되지 않는다. 오롯이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비수가 꽂힌 듯한 날카로운 흉기의 흉터, 그것은 사회가 드러내지 않는 개인의 상처를 봐야 함을 규탄한다. 사회로부터 헤어질 결심. 그리고, 자신을 파헤칠 결심. 그 결심만이 바다에서 길을 찾는 기적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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