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대한민국 땅에서 예술은 예술로 인정돼야
한동안 잠잠했던 문신예술(타투아트:tattoo art) 법제화 움직임이 서서히 본격화할 조짐이다. 최근 정의당의 류호정 의원이 국회의사당에서 타투업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벌인 퍼포먼스로 대중적 관심이 다시금 쏠리고 있다. 그는 등이 훤히 드러나는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고 스티커 타투 여러 개를 붙인 채 기자회견을 진행해 타투 관련 합법화 논의에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류 의원의 이번 퍼포먼스로 지난 10여 년 동안 매 회기마다 발의됐다가 묻히곤 했던 타투 관련 법안이 드디어 주목을 받게 됐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사실 타투라는 새로운 예술장르 태동을 위한 우리 사회의 진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새천년 들어 왜곡된 사회인식과 법의 경직성 앞에서 겪어야 하는 이 산고(産苦)의 중심에 서 있었던 타투아티스트 김모(여·45)씨. 그는 일찌감치 화가의 꿈을 접고 평생을 바칠 대상을 문신예술로 정한 ‘영 파이어니어(Young Pioneer)’였다. 모 여대 서양화과 1학년 재학 중 국내에 있던 미국 전문가에게 문신예술 테크닉을 전수받게 되면서 휴학한 것이 1997년. 이후 남다른 재능과 정열을 발휘, 한국에서 흔치 않은 문신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던 터였다.
영화 ‘조폭마누라’와 ‘달마야 놀자’ 등에서 선보인 현란한 문신디자인이 그의 작품. 일본과 프랑스 등지의 문신 관련 국제행사에 초청될 정도로 그의 예술성은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법은 김씨를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건범죄단속법상 불법 의료행위를 한 범죄자로 낙인찍어 문신예술 행위를 못 하도록 족쇄를 채웠다. 2003년 8월 1심 재판에서 받은 형량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벌금 300만원. 이듬해 1월 2심에서는 항소 기각, 이어 대법원에 상고하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도 냈으나 반전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당초 경찰에 체포될 당시에는 병역법상 병역기피 방조범으로 의심받았다고 한다. 병역기피 목적으로 신체에 문신을 한 입영대상자가 김씨에게서 시술을 받았다고 자백했기 때문. 검찰 기소과정에서 병역면탈에 도움을 주려는 ‘방조의 고의’는 없었던 것으로 인정돼 최종적으로 유죄판결을 내리는 데 적용된 법이 보건범죄단속법이었다. 유죄판결의 취지는 문신이 일종의 의료행위로, 국가가 인정하는 의사면허가 있는 사람만 시술이 가능하다는 것. 문신이 조직폭력배의 전유물이 아니라 귀뚫기처럼 인류의 기원과 함께 시작된 오랜 대중문화 행위이며, 일단 허용한 후 제도화해야 마땅하다는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직된 법이 예술가를 전과자로 전락시키는 일이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사회적 통념으로는 예술행위임이 분명한데 법적으로는 범죄행위인, 명백한 이율배반이다. 2심 재판부가 설명한 항소기각의 배경은 현행법의 모순점을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씨가 예술적·위생적으로 문신을 해온 점, 한국 문신문화 발전을 위해 기여한 점 등은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현행법상으로는 어쩔 수 없다. 만약 김씨에게 무죄를 준다면 다른 모든 문신 시술자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안 된다. 김씨의 항소를 기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의 무죄를 주장하는 각계 인사들은 관련 당국에 꾸준히 탄원서를 내면서 문신예술 법제화 캠페인을 벌여왔다. 김씨 사건 재판(裁判)이 1960년대 후반 ‘가수 윤복희 미니스커트 사건’의 재판(再版)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은 그들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당시 관점으로는 용납될 수 없었던 미니스커트가 합법화됐듯이, 문신도 조만간 예술의 한 장르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실현 시기를 앞당기려는 그들의 외침과 몸부림에도 의료계의 반발 등 장벽은 너무도 높은 게 현실. 논의가 일다가도 유야무야되기 일쑤였다. 류호정 의원의 퍼포먼스로 또다시 시작된 부채질에 짙게 드리워진 안개가 걷힐지 귀추가 사뭇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