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바뀔수 있다면
외로움이란, 인간이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지 않을까싶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만드시고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만들어주시지 않았는가.
공동체와 국가를 이루고 살아도, 가족관계의 단순하지만 복잡한 혈연으로 필사적으로 붙어있다고 할지라도 외로움은 심연에서부터 차고 올라오는 인간 본연의 정서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앉아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손을 맞잡고 연인과 걸어가는 순간에도 외로움은 우리 안에서 다른 둥지를 트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외로움이란 정서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본질적 감정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누가 그랬다. 외로움과 고독은 동전의 앞뒤라고. 외로움이라고 느끼면 불행의 정서가 실과 바늘처럼 따라온단다. 그런데 고독이라고 느끼면(나는 고독이라고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말하고 싶다) 불행의 정서가 따라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선택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외로움이 고독이 되는 순간. 그리고 그 고독은 매우 자발적이며 주도적이라는 것.
가령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는 길인데, ‘혼자 가니까 외롭다’로 우리 마음이 흘러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밥 먹기 싫다’로, ‘내일은 또 어떡하지’로 흘러가게 된다. 그런데 그 생각의 흐름을 바꾸어서 주도적으로 외로움이 아닌 고독이라고 선택해보자. ‘나는 오늘 혼자 밥 먹어야지’로 선택하고 나면, 그것은 나의 주도적인 의지가 되면서 ‘어서 밥을 먹고 일해야지’ 또는 ‘오늘은 무슨 반찬일까?’ 등의 여러 에너지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외로움은 수동적이고, 고독은 능동적이다.
나는 가끔 상담이 취소가 되어 갑자기 시간이 생기는 날에는 주도적이고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하곤 한다. 혼자서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거나 아니면 혼자서 새로운 호흡을 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그 시간을 한 번도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나의 의지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에게 적용하여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지금 이순간에도 칠흙같은 외로움이 너무도 견디기 힘든 이들도 있다. 도저히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을만큼의 외로움으로 몰아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온 우주에 나 홀로 떠 있는것 같은 외로움을 안고사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때로...우리가 너무 열악한 상황이 아닌 경우라면, 우리의 외로움이 주도적인 고독으로 바뀔 수 있으면 어떨까. 그러면 외로움이란 새장에 갇혀 숨 막히던 나의 세상이 결국 빗장을 풀고 나와 창공을 날아오르는...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뀔 수 있지 않겠는가. 바람처럼 자유로운 고독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