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사이, 머리가 발들에게 말했다. "생각이란 게 없는 것들."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장장 1년 만에 뵙는군요.
어느 나이부터인가 해가, 년이 바뀌는 것이 하루가 바뀌 것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것에도 나쁜 점과 좋은 점은 있기 마련인데, 이런 느낌의 좋은 점은 누군가와 1년 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사이인 것처럼 서먹하지 않게, 반갑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랜만에 뵌 것에 대한 핑계가 그럴듯한가요?
인간 사회는 유기적으로 구성되고 작동한다. 마치 우리 몸과도 같이 모여서 이루고, 작동하며 생존한다.
아이들은 분화되고 특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존재인 걸까, 아니면 이미 DNA에 새겨진 역할이 있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존재인 걸까. 이런 의문은 인류 철학사를 보면 계속해서 모습과 이름을 바꾸어 나타나지만, 입체적 물체의 전, 후, 좌, 우, 위, 아래 면처럼 결국 같은 내용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이에게는 무어라 이야기해 주어야 할까. 발이 필요해서 세포가 발로 변하는 것인가, 원래 발로 변하도록 생성된 세포인 것인가.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 어떤 직업을 가지던지 돈을 똑같이 벌면 어떨까? 유럽 어느 나라는 그렇다던데."*** "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요, 편할 것 같기는 해요." " 뭐가? " " 공부를 안 해되 되잖아요. 돈은 잘 벌고." " 잘 번다고는 안 했는데. 똑같이 번댔지." " 아, 그래요?"
아이가 잠시 생각했다.
" 우리나라가 그래도 선진국에 들어가잖아요. 다 같이 못 벌어서 가난하게 살지는 않겠죠. 어느 정도 잘 벌지 않을까요?" " 그래. 그렇다고 생각해 보자. 다 같이 어느 정도의 돈을 똑같이 버는 거야. 그럼 학생들은 어떨까."
" 아마도 어른들이 지금처럼 공부하라고 하진 않을 것 같아요." " 왜? " " 돈을 다 똑같이 버는데요 뭐." " 이야. 좋겠다. 학생들. 공부에 시달리지 않게 되겠구나. " " 아마도요."
아이의 얼굴이 좀 나아졌다.
" 그럼 너는 뭐 할 거니? " " 놀아야죠. " " 두 가지 질문이었어. 첫째, 공부를 안 해도 된다면 뭐를 할 것인가, 둘째,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 " 우선은 놀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거 하고." " 뭐 하고 놀고 싶은데? " " 친구들하고 게임도 하고 싶고, 축구나 야구도 하고 싶고, 여행도 가보고 싶고 그래요." " 지금 하면 되잖아. 못할 것들이 아닌데? " " 어휴, 공부해야 하잖아요. 어른들이 못하게 하면서." " 아.. 미안하구나. 그럼 다 하게 해 주면 뭐 할 건데? " "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막상 생각하자니 모르겠네요. 그냥 그때마다 하고 싶은 거요." " 하고 싶은 게 많구나." " 네."
" 하고 싶은걸 맘대로 하면 참 좋겠다. 그럼 직업은? "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 모르겠어요."
" 시험을 봐서 의사, 판검사, 기업 사장 같은 좋은 직업을 가지지 않을 거야? " " 돈을 똑같이 번다면서요, " " 그렇지." " 그럼 뭐 하러 힘들게 공부해서 그런 직업을 가져요."
아이의 말에서 좋은 직업이라는 단어가 빠졌다. 신기하다.
" 중요한 직업이잖아.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 힘들잖아요.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시험도 봐야 하고." " 그래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않을까? " " 요즘 티브이 보면, 의사들 파업하고, 판검사 욕하고 하던데요." " 뭐야, 그럼 존경받지 않는 거야? " " 다들 자기들 이익만 보려고 일한다던데요. AI로 대체해야 한다고."
아이의 말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전에는 좋은 직업이라고 했는데. 돈이라는 기준이 빠져서 그런가.
" 그래도 중요하잖아. 아픈 사람 고치고, 범죄자 잡고. " " 싫을 것 같아요. 피도 봐야 하고, 범죄자들 하고. " " 그렇구나. 그럼 다른 직업들은 어때? 농부나, 건설노동자나. " " 전 시골에 안 살아봐서 농사는 못 지을 것 같아요. 건설노동자는 힘이 들 것 같고. " " 돈을 똑같이 벌어. 의사나 판검사나 농부나 건설노동자나 모두가. " " 뭐 다들 힘들겠네요. "
상당히 평등한 판단이 되었다.
" 그럼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
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다. 맑고 검은 눈에는 순수하고 깊은 빛이 감돈다. 마치 밤하늘처럼.
" 공부는 어떨 것 같니. 돈을 똑같이 버는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있다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 치고 하고 싶니? " " 아니요. 공부하기 싫어요. 시험도 싫고. 아마 엄마도 공부하라고 안 할걸요. " " 그럴까. 그럼 엄마는 네게 뭐 하고 잔소리할까? " " 글쎄요. 씻고 밥 먹으라고? "
아이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래도 작게나마 보인 아이의 순수한 행복의 웃음이다.
* 신년 초에 아시는 분들에게 신년 인사를 보냈다. 해가 떠서 질 동안의 시간이 걸려서. 많은 분들이 1년 전 신년 인사가 보낸 메시지로 남아있고 그 후로는 연락이 없는 상태였다. 잠시 신년에만 인사를 하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1년에 한 번이라도 인사하면 좋지 않나. 그것도 복을 빌어주는 인사인데. 아니나 다를까 1년 만에 인사에도 모두 반갑게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었다.
**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일신론과 다신론, 유명론과 경험론, 계몽주의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실존주의 등등 거칠게 압축하면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이다.
*** 유럽식 사회자본주의(임의명칭) 계열의 국가들. 직업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국민의 행복도가 높고, 교육만족도가 높고, 학문 및 사회적 성숙도가 높다고 다큐멘터리에서 배워야 할 대상으로 소개되는 국가들.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은 작게 소개되거나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