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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명 May 28. 2021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나에게 와닿았던 세 가지

관람하는 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예술


 지난 16일에 막을 내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이 뮤지컬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소설 "돈키호테"와 그 작가 세르반테스를 바탕으로 새롭게 그려낸 극중극 형식의 공연이다. 나에게 있어서 처음 이 뮤지컬을 관람했을 때의 느낌과 3년 후, 두 번째로 관람했을 때의 감상은 분명히 달랐다. 어느 부분이 달랐냐하면, 같은 장면을 봤을 때 느낀 내 감정이다.


 해당 뮤지컬에 대한 해석이나 관람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전문가도 아닌 내가 그에 관해 덧붙이는 말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다만, 작품 내의 메시지와 내 상황과 부합했기 때문에 와닿을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상주의자는 정말 미친 사람일까?


 여기 미친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풍차와 싸우고, 기사 호칭을 내려줄 영주를 찾으며, 휘어진 검을 손에 쥐고 모험을 떠나는 돈키호테가 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자들과, 그분만을 생각한다며 실은 가문의 흠이라고 여기는 위선자들이 있다.


 현실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역할은 사실 후자에 가깝다. 자신의 꿈을 좇아 노력하고, 그로 인해 성과를 거둔 사람을 보고 대단하다고 박수치거나,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형상들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하다'거나, '현실감각이 없다'는 가시 돋친 말들을 쉬이 내뱉기 마련이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라는 말로 그 모든 행태가 정당화되기라도 하는 듯. 그래야만 제 삶의 지반이 평평해지기라도 하듯, 나와 다른 것은 끌어올리거나 끌어내려야만 하는 사람들. 그러나 사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단단한 자들이다. 그 수많은 비난과 밑으로 잡아끄는 손들 사이에서,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자신만의 무게와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분명히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바라보며 묵묵하고 꾸준하게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런 부류가 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다만 나를 포함해 돈키호테와 같은 이상주의자들이 있다면, 나의 벌어진 틈으로 상처를 내려하는 길 옆의 방관자들에게 흔들려 방황하지 않기를. 잠시 거센 파도를 맞은 배처럼 흔들리더라도 삶의 키를 두 손안에 붙잡고 있는 든든한 선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후회를 떠나 미래를 향해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인상 깊게 담긴 부분은 파워풀한 넘버보다 한 독백 연기 장면이다.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밤에 영주님의 대저택(이라고 믿는 곳)에서 기다리는 돈키호테가 기도하며 읊조리는 말들 중 하나.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앞을 바라보겠나이다."


 <맨 오브 라만차>를 관람할 때의 나는 마침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물론 인생에서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때가 더 적긴 하지만, 저 당시에는 유독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시기였다. 대학 입학-대외활동-인턴-취업까지 큰 어려움 없이 시기적절하게 해내 온 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크나큰 좌절이었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놓여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라는 생각에 끝없는 물음표가 나를 감쌌고, 그 답의 끝은 항상 후회로 돌아왔다. 이때 이런 선택을 할걸, 저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랬다면, 저랬다면.


 그런 순간에 나에게 다가온 한 마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앞을 바라보겠나이다."


 그 순간의 뒤의 대사들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저 한 문장을 들은 순간, 고요히 감상자로서 무대를 바라보던 마음이 일렁이며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저거지. 중요한 건 저거였지.'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저 노인조차 지금의 나와 비슷한 고민을 겪는구나, 나처럼 후회하지 않게 마음을 부여잡는구나, 내가 결코 잘못 살아온 게 아니었구나, 이런 위안이 마음을 감쌌다. 바꿀 수 없는 시간들만 돌이켜보며 있을 수 없는 가정들을 내내 되짚는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내가 느끼는 예술이란 그런 것 같다. 관람자마다 마음에 담아 가는 부분이 제각각 다르지만 감상할 때의 그 순간, 마음에 따라 작품의 메시지가 다르게 와닿기도 하는 것. 3년 전, <맨 오브 라만차>를 봤을 때는 'Impossible dream'을 들으며 전율을 느꼈고,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기억에 담아왔다. 그런데 3년 후, 같은 공연을 봤는데 이번에는 어떤 넘버나 어떤 대사보다도 오히려 저 문장 하나가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위로가 된 다른 문장 하나도 함께 소개하고 싶다. 후회가 찾아오는 순간마다 돈키호테의 말과 함께 떠올리곤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분노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깨어있는 눈으로 주위를 보아라."


-James Thurber-




나는 누구인가?


 돈키호테는 모두에게 비웃음을 사고 희롱의 대상이 되는 알돈자를 향해 끊임없이 "고귀하신 레이디"라며 "둘시네아"라고 칭한다. 극 중 내내 자신은 그저 알돈자일뿐이라며 화를 내는 그는 결국 극 후반부에 가서 스스로 둘시네아라고 칭한다. 극중극에서 알돈자 역을 맡았던, 극 초반에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죄수도 마지막에 세르반테스를 향해 노래하며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알돈자의 현실은 실제로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는 여전히 고귀한 공주님이 아니며, 다시는 누구도 그를 둘시네아라고 불러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죽고 없는 알돈자의 현실에서도 변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것은 학창 시절에는 그저 학급 번호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는 직급일 수도 있으며, 친구들이 불러주는 별명일 수도 있고, 온전한 내 이름일 수도 있다. 그중에 어떤 것이 "나"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본질은 그런 것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나"다. 자신을 향해 나는 재능도 없고, 게으르고, 미래가 어두운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재능이 충만하고,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살며,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가올 밝은 미래를 향해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알고 싶어 한다. 예전부터 유행처럼 떠돌던 혈액형 타입이나, 심리테스트, 최근에 유행했던 MBTI는 이런 속내를 여실히 보여준다.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정의 내리고 싶어 하고, 특별한 성질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떠나서 실제로 내가 어떤 사람,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알돈자라고 여기기보다, 둘시네아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더 빛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에는 지불할 대가도 없는데,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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