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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명 Jun 28. 2021

국내파로 외국계에서 살아남기

유학파들 사이, 회사의 '미운 오리 새끼'?

 나는 현재 외국계 회사에 재직 중인 회사원이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는 외국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고,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설명을 들어야만 속이 시원한 내 성질은, 한 마디로 "꼰대들이 싫어하는" 스타일인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Korea Branch가 붙으면 다 똑같다, 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외국계라면 수평적인 회사의 이미지가 강하게 들지 않은가. 더불어 글로벌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도 있었기에 더욱 외국계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수많은 취준생이 으레 그렇듯, 원하는 기업을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처지는 쉬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외국계고 사기업이고 공기업이고, 인턴부터 넣는 족족 서류에서 떨어지는데 내게 선택권이 생길 리 없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공기업 인턴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되었고, 이 커리어를 바탕으로 외국계에 전환형 인턴으로 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영어 면접을 거치고, 5대 1이라는 취조와 같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던 최종 인터뷰까지 거쳐 입사한 곳은 꽤나 "외국계"스러운 곳이었다. 영어 이름을 쓰고, 모든 이메일을 영어로 작성했으며, 업무 특성상 내가 확인하는 모든 서류들은 영어였다.


 이쯤에서 내 영어 실력을 밝히자면 정말 못하지는 않는, 딱 그 수준이다. 원어민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고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결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으며, 원하는 바를 속 시원하게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는. 그냥 혼자 여행 갔을 때 외국인 친구를 가볍게 사귈 수 있는 정도.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국내파"가 바로 나다. 교환학생/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온 적이 없고, 외국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 그냥 한국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20대.


 심지어 우리 팀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에 유학파가 차고 넘쳤다. 크게 네 무리로 나눌 수 있었다.


1) 중/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외국에서 나온 사람들. 말하는 중간중간 영어 단어를 많이 섞어 쓰고, 한자어나 속담같이 어려운 한국어는 잘 모르기도 한다.


2) 해외대학 출신. 대학을 외국에서 나온 유학파인데, 이 케이스들은 대부분 한국어+영어 다 능숙하다.


3) 기회가 돼서 비자를 받아 외국에서 1~2년씩 일한 사람들.


4) 교환학생/어학연수. 이 부류가 가장 많다. 교환학생은 한 학기든 1년이든 기본적으로 다들 경험이 있었고, 어학연수도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5번이 국내파, 바로 나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나만 동떨어져 있었다. 상경계 전공자들 틈새에서 홀로 사회과학 전공이었다. 여행으로만 좋다고 여기저기 쏘다녔지, 흔해서 스펙도 안 된다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다. 입사하고 선임들과 동기들을 보니 내가 면접을 그렇게 잘 봤나 되돌아보게 되는 수준이었다. 노란 오리들 틈에서 홀로 흰색 깃털을 드러내는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


 인턴 시절,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바로 이메일이었다. "Formal"한 표현을 써야만 할 것 같은데, 미묘한 뉘앙스를 캐치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대화였다면 그냥 말하면 되는데, 기록이 남는 이메일로 쓰려니 더욱 부담스러웠다(이제는 그냥 타닥타닥 두드려서 보내버리지만). 함께 공유되는 팀 메일을 보면, Bilingual인 동기는 유려한 표현들을 써나가는데, 나는 공부를 해도 저런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못 쓸 것 같다는 모난 부러움에 젖기도 했다. 영어 공부를 틈틈이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입사하고 첫 주말, 가장 먼저 한 것은 서점에서 영어 이메일 서적을 구입한 것이다.


 입사 후 3개월 간 가장 후회했던 과거는 바로 "교환학생 좀 다녀올걸"이었다. 토플 공부가 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했던 과거의 나를 찾아가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처럼 벽장을 두드리며 외치고 싶었다. 가장 서글퍼질 때는 그들이 해외에서 살던 시절의 경험을 늘어놓을 때였다. "LA에 살 때~ 뉴욕에 있을 때~ 프랑스에 있을 때~"등. 한 명이 그곳에서의 추억을 자랑하듯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끼워 늘어놓고, 두 세명씩 거기에 자신의 기억을 보탤 때면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괜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 치솟아 그런 내 모습이 미워 씁쓸해진 적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어쩌겠나. 정규직으로 전환된 후, 칼퇴를 하며 안정적으로 생활한 후에는 또 한동안 퇴근하고 영어공부를 했다. 유튜브를 뒤적거리며 회사에서 쓸 만한 용어들을 골라 외워보기도 했다.

 '회사 다른 사람들은 영어를 잘해서 이 시간에 다른 것들을 할 텐데.'

 퇴근하고 꾸역꾸역 영어 공부를 하면 밀려오는 음울한 생각에 자괴감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끄적이고 따라 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최근 2개월 간은 다른 자격증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영어 공부는 잠시 접어두었다. 그 자격증을 취득한 지금, 언제 다시 시작해야 할까 고민 중이다. 이렇게 혼자서 아등바등 고군분투해봤자 현지에서 1년 살다온 것만 못할 텐데, 이럴 거면 코로나가 종식되고 퇴사한 후 어학연수나 가는 게 안 낫나 싶다가도, 언제 영어로 회의하는 회사로 이직하게 될지 모르니 꾸준히 준비해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그래도 지금은 이메일을 쓸 때 신입 때만큼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업무적인 용어도 잘 적응이 됐고, 영어로 가득한 서류들 사이에서도 필요한 것만 뽑아서 쓸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어색하게만 들렸던, 업무를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혼용하는 영어 단어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교육할 때 나도 쓰고 있다.


 결국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은 힘들다고 여겨지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눈자락이 아내린 자리에 꽃이 피듯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마련이다. 나는 적응의 측면에서 제일 많이 이를 체감한다. 대학도 알바도 인턴도, 처음에는 나만  하는  같고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같아 힘들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쏜살같이 적응해 초반에 그렇게 고되었던 무거운  같은 기억들도 결국에는 흐려지게 됐다.


 국내파로 외국계에서 살아남기, 별 것 없다. 그냥 퇴근 후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고, 영어 이메일 표현 책을 사서 이것저것 활용해보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직의 기회를 잡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고, 남들이 해외 거주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자연스럽게 여행의 경험을 녹여 그 사이에 말을 얹는 태연함을 가지는 것. 이렇게 미운 오리 새끼는 오늘도 유학파 오리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백조가 되기 위해 흰 깃털을 빗질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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