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인지 운명인지, 흐릿한 점의 연결
글을 남기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내게는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난 글에 언급한 적 있는 외국계 기업은 퇴사를 했다는 것이다.
소속을 옮기는 과정에 있어서 나는 또다른 경험을 쌓았다.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기로에 서 있기도 했으며. 아예 색다른 분야를 배워보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의 코앞에서 좌절되기도 했다. 그 수많은 시도 중에서 현재 내게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내가 살아가는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유럽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거주 중이다.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한 것조차 미래의 해외살이를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했을만큼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외, 특히 유럽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다. 사람 인생은 정말 어찌될지 모른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게 이보다 잘 맞는 어구를 찾을 수는 없을듯하다. 내가 지금껏 환상을 그려내던 해외살이의 장소들은 영어권 국가가 대부분이었고, 그중에서도 나는 몇 년 후에는 영국의 런던에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도록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왔고, 워홀부터 취업비자에 대한 정보는 있는 대로 두루 꽤고 있었고, 구독하는 블로거와 유튜버들도 런던살이를 하고 있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러나 '해외취업'에 목표를 두고 유럽권의 기업을 지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틀은 깨어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한참 이직 준비를 하던 지난 해에, 짧지만 외국계에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한국계 대기업의 독일 법인에 용기내 지원을 했다. 해외 유학이나 교환학생 경험, 독일어 관련 자격증이 없다는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요구 조건에 따르면 영어만 비즈니스가 가능하면 되고, 독일어는 회화가 되면 플러스 요인이 되는 수준인 것 같았다. 나름 지원 분야 관련 자격증도 있고, 해외파는 아니지만 외국계 근무 경험과 여행 경험으로 포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교양 독일어를 수강했다는 핑계도 있었겠다, 긴가민가하면서 찔러보자는 심정으로 넣었는데 얼마 안 있어 메일로 면접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근무 조건도 상세하게 보내주었고, 해당 조건을 수락하면 인터뷰를 진행하는 형식이었다. 빠르게 독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조건만 놓고 보면 한국의 취준 상황과 비교했을 때 정말 괜찮았기 때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터뷰에 응했다.
결과적으로 합격을 하고, 독일로 곧장 날아오긴 했지만 내가 합격한 요인에는 교양 독일어는 정말 무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입사해보니, 나만 독일인 직원들과 영어로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직원 중 하나였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굉장히 유창한 독일어로 소통했기 때문이다. 영어까지 3개국어로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는 매니저, 팀원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운 좋게 입사를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교양 독일어를 수강했다는 핑계가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독일에 있는 한국계 대기업에 지원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거의 4년 전 대학교 교양 수업으로 멋모르고 들어두었던 '독일어' 하나. 당시에 교수님의 강의욕에 감명받아 열심히 해 A+를 받아두었던, 정말 열심히 외워서 시험을 본 이후로 단 한번도 공부하지 않아 단어 하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독일어. 그 하나의 교양이 내 20대를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대학생 시절엔 가늠하지 못했다.
어느새 입사한지 반 년이 넘었다. 프로베 기간은 끝났고, 독일 생활도 이제 많이 익숙해진듯 하다. 퇴근한 후 일주일에 세 번씩은 어학원에 출석도장을 찍고, 신입임에도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마음껏 쓸 수 있고, 30일씩 되는 휴가는 어떻게 나눠서 써야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프랑스를 1박 2일로 다녀올 수 있고, 뭐든지 기다리는 법을 배워가는 나라, 독일이 아직까지는 굉장히 마음에 든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여행자로서 왔을 때 좋은 기억을 가진 곳은, 그곳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물론 여행과 사는 것은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사람이 그 장소에 느끼는 감각은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길을 걸을 때면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들과 색색들이 다른 파스텔톤의 건물들. 매일같이 지옥철에 시달리면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 속에서도 유지되는 거리감. 누구보다 개인주의적이지만 어느 가게에서나 인삿말과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매너와 가벼운 여유, 일종의 그런 것. 객관적으로 두고 봤을 때 모든 조건에 인종차별이라는 장벽이 더해짐에도, 왜 어떤 한국인들은 해외살이를 택하는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 속의 소소함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분명 있지 않을까.
22살, 휴학생 신분으로 독일에 여행을 처음 왔을 때를 기억한다. 프랑크푸르트는 경유로만 들렸지만, 독일 남부의 소도시들을 들렸을 때 느꼈던 작은 질투심을 잊지 못한다. 오후에 테라스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즐기는 음식과 술, 아름다운 색감과 건축양식의 건물들의 사이에, 풍경처럼 존재하는 독일인들을 보면서 '독일인들끼리만 이런 곳에 살다니...너무 부럽다.'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 틈에 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그 풍경 속의 일부로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으레 모든 유럽살이가 그렇듯이,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직장인으로서 이곳에서 일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독일에 버티고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나의 생각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독일에 살면서 느끼고, 달라지는 지점들이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떠오르고 느끼는 생각을 정돈하고, 정리된 글로 내놓음으로써 점점 더 뚜렷한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