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대한민국의 주적이 누굽니까?”
ㅡ “질문의 의도가 정치적입니다.”
ㅡ “아니,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대한민국의 주적이 누굽니까?”
ㅡ “…”
ㅡ “거참!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이거 하나 대답 못하면 어떡합니까? 북한 아닙니까. 북한!”
우리나라의 수많은 진보 진영 정치인은 주적이 누구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가? 답답할 것이다. 저 사람들은 종북 세력인가? 빨갱이인가? 정말로 그들의 집 거실 중앙에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을지도 모르겠다.
북한과 우리나라는 휴전 상태이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이다. 북한이 주적인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은가? 우리가 누구와 전쟁하는지조차 모른다는 건 정말 이상하다. 이것 하나 대답 못하는 이들이 이끄는 국가에서 우리의 소중한 청춘을 국가에 바쳐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나 정치 사안에서 양측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두 학생의 싸움을 중재해야 하는 선생님이 한 학생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해버린다면, 그 누구도 이를 합리적이라고 보지 않을 테니까. 이는 판단이 아니라 속단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생각 속에만 갇혀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약 이대로 북한을 주적이라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을 그저 빨갱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면 이 또한 속단이다. 어리석다는 것이다. 정치 사안에 대한 시각을 예리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든 면을 최대한 샅샅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들이 국무위원 청문회 같은 자리에서 북한을 주적이라고 당당히 밝히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런 확정적인 발언은 우리나라의 외교적 재량권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들은 각자만의 사정으로 북한이라는 카드를 뒤집었다 엎었다 하며 이용한다. 누군가는 북한이라는 적을 악마화하고 자극하여 자국민이나 세력을 결집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북한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여 힘을 키우기도 한다. 북한 문제는 오직 북한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때로는 어떤 문제의 예상치 못한 돌파구로서 북한을 써먹기도 한다. 이런 각각의 전략들은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따라 자연스레 뒤바뀌는 것은 물론, 각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완전히 엎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복잡한 외교판에서 우리나라가 북한을 그저 주적으로, 그러니까 가장 위험한 대상으로 단정짓는 모습은 어떤가? 답답하다. 이러한 입장을 가지면 시시각각 변하는 수많은 외교적 변수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 또한 북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지렛대 삼아 협상력을 확보할 수도 없다. 제 발을 직접 묶어버리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직적인 자세는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우리나라를 불리하게 한다. 이 문제는 갈수록 해결하기 어려워지는 만큼 일반적인 방안보다 창의적인 해법이 요구되는 반면, 그저 주적이라고 못 박아 버리는 태도는 창의적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적인 수준의 대상으로 북한을 규정하기 전에는 가능했던 다양한 평화 정착 시나리오를 더 이상 고려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해 통일을 택할지, 통일을 택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통일할 것인지, 통일을 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평화를 구축할지 등의 여러 방안을 말이다.
여러 전략을 충분히 시도해보고 단호한 입장을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유화 노선에서 강경 노선은 쉬워도, 강경 노선에서 유화 노선으로 선회하는 것은 정말 어려우니까. 선택지를 최대한 열어두는 방향이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높이는 건 분명하다.
평화뿐만 아니라 북한 붕괴 이후의 영토 귀속 문제도 중요하다. 북한이 체제의 자체적 한계든, 신종 전염병이든, 기후 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무너졌을 때, 그 영토와 국민이 당연히 우리나라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분명 중국이나 러시아와 이를 두고 다투어야 할 것이다. 국제 정치는 냉정한 힘의 논리, 즉 현실주의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때 북한 내부의 여론이 우리나라와 멀다면 우리는 협상에서 불리해진다. 이는 우리가 북한과 교류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교류가 거북하다면, 적어도 가장 적대적인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첫 번째는 북한에 대한 경직적인 태도가 일반 외교에서의 우리나라 협상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북한과 직결된 한반도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둘을 합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한반도 평화 문제와 북한 붕괴 이후의 영토 귀속 문제 등 좁은 의미의 북한 문제도 당연히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일반 외교와 북한 문제를 동시에 놓고 가장 적절한 대외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이제 더욱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 가장 경직적인 입장을 고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북한을 주적이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의 주된 논리이다.
이외에도 외교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확고한 입장 결정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다만, 이 근거는 경제적으로 교류하는 일반적인 외교 상황에 적합하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과 경제적으로 거의 교류하지 않으므로 다음의 근거가 북한에 한해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문제는 여전히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북한과 완전히 관련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를 조금만 더 살펴보자.
대외적으로 확실한 입장은 자국의 경제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비친다면, 중국도 당연히 이에 대응할 것이다. 우선 중국 정부는 자국민에게 대한민국 여행이나 유학 자제를 권고할 수 있다. 또한 화장품과 같은 한국 제품의 수입을 막을 수도 있다. K-POP 콘서트를 중국에서 개최할 수 없도록 조치하거나 한국 영화를 수입하지 않도록 하여 한류의 유행을 차단할 수도 있다. 아니면 희토류 공급을 통제하는 초강수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면 중국과 거래하던 우리나라 기업들은 굉장히 난처해진다. 사실 중국은 여전히 낮은 인건비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관련 없는 우리나라 기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므로 중국과 관련 없는 우리나라 국민도 거의 없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회사 하나만 해도 수많은 직장인이 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각자에 딸린 식구들까지 합쳐 보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민들이 확실한 외교 노선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여행 업계나 백화점 매출 타격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는 외교의 이러한 특성을 더욱 유념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수출입 비율, 일명 무역의존도는 아주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0년 이후 60%보다 낮았던 적이 없으며, 가장 최근인 2024년에는 90.4%를 기록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고정적인 입장은 우리나라에게 너무나도 위험하다. 우리는 더욱 균형적이고 모호해야 한다.
이러한 균형감은 거래를 지속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이는 곧 외교가 51대 49의 미학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51대 49의 미학이란 100의 이익에서 우리가 51을 챙기고 상대가 49를 가져가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우리가 99를, 상대가 1을 들고 가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거래를 경험한 상대국이 과연 다음에도 우리를 찾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51대 49의 비율이 탄생한다. 꾸준한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이익 구조로서 말이다. 여기에 미학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의미가 더해진다. 지속 가능한 국익을 위해 압도적이지 않은 외교, 즉 절제하는 외교가 필요하다는 의미 말이다.
이처럼 외교는 원칙적으로 중간과 흐릿함이 요구된다. 넉살 좋은 주변 지인을 떠올려 보자. 과연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그 사람. 물론 그는 균형을 유지하느라 속은 꽤나 곪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경직된 관계에서 비롯되는 비용보다 유연함에서 오는 효용이 훨씬 크기에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 이와 같은 방식의 외교가 옳다고 믿는 이들에게 북한 주적 질문은 분명 가혹하다.
이제 북한을 주적이라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마냥 간첩 같이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아니다. 혐오감만 줄어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북한은 틀림없는 주적이기에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좋다. 이젠 상대의 입장을 알고도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연히 전쟁 중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아무리 그래도 북한을 주적이라고 부르지 않는 정치인의 모습이 충분히 불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타협했다. 적어도 국방부 장관만큼은 다른 정치인들보다 북한에 강경할 필요가 있다고. 동시에 이들도 외교적 유연성과 실리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군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상부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동시에 무작정 따라서도 안 된다는 창의적 군인론도 모순점이 아니라 지향점이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모든 좌파가 너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
물론 현실에는 근거 없이 이념에만 경도되어 북한 주적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정치인도 분명 있다. 나아가 실제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긍정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집단에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이것은 진보 진영이라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아니다. 보수 진영에도 분명 극단적인 사람이 있으니까. 이건 인간이 모이면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오류에 넘어가진 말자. 그럴 땐 위의 외교 원칙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충분하다. 나처럼 생각하는 상식적인 정치인들이 훨씬 많으니까. 아무래도 자연은 정규분포를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처음의 청문회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위의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 국무위원 지명자라면 이제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나라면 다음과 같이 답했을 것 같다.
ㅡ “대한민국의 주적이 누굽니까?”
ㅡ “당연히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원님의 질문에 유감을 표합니다. 이 초보적인 논리는 우리나라의 외교적 재량권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국익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국익을 의원님의 사사로운 정치적 이익과 맞바꾸려 했다는 사실, 즉 케케묵은 프레임을 오늘날 다시 한번 꺼내 들었다는 사실이 실망스럽습니다.”